@+일제-광복군도 박정희시대 베트남전의 한국군도 ^戰作權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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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805회 작성일 2014-11-20 05:55본문
한-중 요인들이 1940년 9월 중국 충칭 자링빈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 행사는 중국 국민당 정부 요인 및 각 사회단체 간부와 각국 대사·공사·외교사절 및 신문기자단 등 내빈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
[기고] 한홍구 교수(성공회大)
歷史로 ^본 ^^^戰作權
박근혜 정권이 2015년까지 전시작전통제권을 전환하겠다는 공약마저 파기했다. 수구언론에는 작전지휘권을 남의 나라에 맡겨 두어도 군사주권의 훼손이 아니라는 ‘쓰레기 같은’ 글들이 넘쳐난다. <한겨레>에서도 특집과 대담, 외부기고, 사설 등을 통해 이 문제를 다각도에서 깊이 있게 다루었지만, 작전지휘권의 역사적인 측면에 대해 좀더 보태보고자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승만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한국 국민과 정부는 “현재의 적대행위가 계속되는 동안” 한국군이 “귀하의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주한미8군사령관으로 1975년 유엔군 사령부가 해체될 당시 마지막 유엔군 사령관을 겸했던 리처드 스틸웰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미국으로 넘어간 것을 “지구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주권의 양도”라고 평가했다.
현행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쟁기념사업회가 ‘군의 정통성’이라는 부제를 달아 펴낸 <현대사 속의 국군>이란 책을 봐도 마치 한국군이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처럼 되어 있다. 참 뻔뻔한 일이다. 과연 한국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지배해온 역사는 접어두고 현재의 모습만 갖고 얘기해도 광복군을 계승했다고 나설 수 있을까?
1940년 광복군이 창건될 때
무기도 중국정부가 대주었고
밥도 중국정부가 먹여주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려 했고
임시정부 내부는 들끓었다
3년간 끈질긴 교섭 끝에
1944년 마침내 중국이 물러섰다
무기도 중국정부가 대주었고
밥도 중국정부가 먹여주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려 했고
임시정부 내부는 들끓었다
3년간 끈질긴 교섭 끝에
1944년 마침내 중국이 물러섰다
박근혜 정부와 임시정부의 가장 큰 차이는 군사주권에 대한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40년 광복군이 창건될 때 무기도 중국정부가 대주었고, 훈련도 중국정부가 시켜주었고, 밥도 중국정부가 먹여주었다. 광복군이 활동할 수 있는 지역도 당연히 중국 땅이었다. 중국정부 입장에서는 광복군에 대해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에 한국에 민주정권이 들어서 예컨대 버마의 민주화운동을 후원하여 민주해방군을 훈련시켜준다 하더라도, 그들이 한국 땅에서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행사한다 하면 펄쩍 뛸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이른바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제정하여 한국군을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지휘를 받으며 임시정부가 아니라 중국 최고통수부의 유일한 군령을 접수해야 한다고 통보해 왔다. 준승의 ‘승(繩)’이 오랏줄을 뜻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은 광복군이 한국으로 진공작전을 편다면 몰라도 중국내에서는 중국군사위원회 아래 꽁꽁 묶어두려 했다. 중국국민당이 적극 지원했던 조선의용대가 어느날 갑자기 중국공산당 지역으로 사라져버린 탓에 중국도 작전지휘권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참 분했지만 돈도 없고 힘도 없던 임시정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손님인 객군(客軍)은 주재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통접수(忍痛接受), 즉 아픔을 참으며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부의 반발은 드셌다.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은 중국의 얼마 안되는 원조 때문에 “광복군이 중국에 예속된다면 광복군은 도리어 우리 독립운동을 말살하는 기관일 뿐”이라고 부끄러워했고, 군무부 차장 윤기섭은 ‘9개준승’을 받아들이면 “광복군은 중국의 노예군대”가 된다고 단언했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 임시의정원은 가히 아수라장이었다. 문일민 의원은 “이 자리에서 죽어도 또다시 망국노 노릇은 못하겠다”고 격앙했고, 조완구 의원은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9개준승’의 폐기를 선언할 것을 촉구했다. 어떻게 ‘9개준승’을 의회의 통과도 없이 정부가 접수하였느냐(1950년의 작전지휘권 이양도, 2015년의 무기한 연기도 의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았다!)는 의원들의 힐난에 외무부장 조소앙은 ‘9개준승’은 조약이 아니라 임시적인 군사협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이런 변명을 한 조소앙도 광복군이 준승에 얽매임으로서 일본군과 대적하기는커녕 중국군을 위해 하잘 것 없는 정보나 제공해주고 책상에 앉아 정훈사무나 보고 있다고 개탄했다.
임시정부의 3년간에 걸친 끈질긴 교섭으로 중국정부는 1944년 9월 마침내 ‘9개준승’을 폐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임시정부는 사람만 내었을 뿐, 남의 땅에서 남의 돈으로 군대를 꾸려야 하는 곤궁한 처지였지만, 대한민국의 국군이 외국의 작전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치욕으로 여겼다. 반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대한민국의 현 정부는 객군(客軍)인 미군이 작전지휘권을 돌려주겠다는데도 펄쩍 뛰며 작전지휘권을 받지 않기 위해 미국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
이렇게 작전지휘권을 갖지 못한 군대가 또 있었을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한국군 이전에 만주군도 작전지휘권 따위는 가질 엄두도 내지 않았다. 중국학자들은 그런 만주군을 서슴없이 위만군(僞滿軍), 즉 ‘괴뢰 만주군’이라 부른다. 한국군에게 미군이 있다면 만주군에게는 관동군이 있었다. 외형상 한미연합사라는 틀을 갖고 있는 한국군과 미군과는 달리, 관동군은 이렇다 할 법적 근거 없이 ‘내면지도’(內面指導)를 통해 만주군 뿐 아니라 만주국의 국정 전반을 좌우했다.
만주군은 소련을 상대로 하는 국방은 관동군에게 맡기고 공비토벌이라는 국내 치안만을 담당했다. 한국전쟁 기간이나 그 직후에 군에서 두각을 나타낸 백선엽, 정일권, 강문봉 등은 만주군 출신이었다. 이는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며 뻣뻣했던 일본군 출신보다 체질적으로 상전을 모시는 데 익숙했던 만주군 출신들이 미군 우위의 지배체제에 훨씬 더 잘 적응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꽤 오랫동안 미국은 한국에 작전지휘권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선 미군은 한국군 장성들, 특히 일부 일본군 출신 장성들의 지휘능력을 믿지 않았다. 한 예로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3군단장 유재흥이 중국군에 포위당했다고 지레 겁을 먹고 부하와 장비를 버리고 도망오자 당신도 군인이냐고 힐난하면서 그를 보직해임했고, 한국군 지휘관에게 주요 부대의 지휘를 맡기지 않았다. 둘째, 미국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같은 독재자들이 국내의 어려운 정치 상황을 대북 군사도발을 통해 모면하려는 불장난을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사실 이승만은 미국의 이런 우려를 적극 활용하여 미군을 붙들어 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정전협정에 끝내 서명하지 않았고, 반공포로 석방과 같은 초강수를 두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군이 철수한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또라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그의 미친 짓(이승만 입장에서는 잘 계산된 미친 짓)을 예방하기 위해 미군은 작전지휘권을 한국에 돌려주고 떠날 수 없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고 작전지휘권을 환수하지 않은 것은 이승만 개인에게는 정권유지에 유리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남북관계와 한미관계에 두고두고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남북관계에서 이북은 “어른들 얘기하는데 애들은 끼어들지 말라”는 투로 대미 직접 교섭을 추구했다.
18일 오전 경북 포항 인근 해상에서 해병대 상륙군들이 공중돌격을 위해 작전 수행중인 독도함 비행갑판에서 기동헬기에 탑승하고 있다. 해군·해병대 1900여 명과 한국형 상륙장갑차(KAAV) 20대, 독도함 및 상륙함 등 수중·수상 함정 20여 척 등이 참가한 2014 호국합동상륙훈련은 21일까지 이어진다. 포항/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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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초 이북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과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을 때 존슨 미 대통령의 특사로 한국을 방문한 밴스는 박정희가 만취상태에서 몇 차례 이북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는데 장성들은 박정희가 (술자리에서) 내린 지시에 관해 다음날 아침 언급하지 않으면 전날 밤 그가 내린 명령들을 잊어버린다고 비망록에 썼다. 미대통령 존슨은 박정희가 “지나치게 호전적”(too belligerent)이며, “과음과 엉뚱한 행동”(heavy drinking and erratic behavior)을 자주 한다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박정희는 재임 중 집요하게
작전지휘권 환수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를 믿을 수 없었다
독재자가 어려운 정치상황을
대북 군사도발로 모면하려는
불장난을 할까 우려했으며
실제 박정희는 만취상태서 몇차례
대북 공격명령 내리기도 했다
작전지휘권 환수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를 믿을 수 없었다
독재자가 어려운 정치상황을
대북 군사도발로 모면하려는
불장난을 할까 우려했으며
실제 박정희는 만취상태서 몇차례
대북 공격명령 내리기도 했다
이런 박정희에게 미국은 작전지휘권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지만, 박정희는 재임 기간 중 집요하게 작전지휘권의 환수를 위해 노력했다. <한겨레>를 포함하여 모든 언론이 작전지휘권 문제가 광주학살에 동원된 군대의 작전통제권을 둘러싸고 촉발되어 노태우 정권 때 상당 부분 진척된 것으로 쓰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작전지휘권을 되찾아야한다는 논의는 이승만을 축출한 4월혁명 이후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5ㆍ16군사반란으로 미국의 작전지휘권이 손상을 입고, 그 책임으로 매그루더 8군사령관과 그린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경질되면서 한동안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불붙은 것은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될 때였다. 미국은 안방에서도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는 한국군이 월남에서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이나 당시 공화당 의원이던 차지철(10ㆍ26사건 때 박정희와 함께 죽은 그 차지철!)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
채명신 장군은 생전에 필자에게 자신은 육군참모부장으로 있으면서 월남전은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기 때문에 파병 자체를 반대했지만 박정희가 자신을 굳이 사령관에 임명했고, 일단 파병되자 한국군이 미군에 예속되어 미군과 함께 진흙탕에 빠질 수 없기에 한국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작전지휘권만은 독자적으로 행사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관철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미군에 넘어가면 그러지 않아도 한국군을 미군의 용병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공산진영의 선전에 확실한 증거를 주게 되는 것이라고 미군을 설득했다고 밝혔다. 특히 베트남전쟁의 경우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미군 없이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함에도 베트남 측이 자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군만 미군에 예속된다면 “전세계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면할 길은 확실히 없었다.
외국에 나간 주월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확보하게 되자 안방인 한국에서도 작전지휘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당연히 힘을 얻게 되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군 출신 의원이나 전문가들도 방법이나 시기에는 조금 견해가 다를지라도 한결 같이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중대한 주권의 침해 또는 유보이며,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이를 되찾아오지 못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와 같이 중대한 주권의 양도가 국회의 동의나 비준 없이 이승만의 편지 한 장으로 이루어진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작전지휘권을 유엔사에 맡겨두는 것이 한동안 불가피 하더라도 이 문제만큼은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예비역 준장으로 중앙정보부 기획실장을 지낸 공화당 의원 최영두는 작전지휘권 이양이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지 않아 원천 무효라면서 1966년 10월 29일 <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협정>의 폐기 건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특히 1968년 1월 21일 이북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으로 ‘무장공비의 수도침입’이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도주하는 특수부대원들의 추적에 헬기 한 대 제 때에 띄울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대간첩작전에서만이라도 작전지휘권을 환수해야 한다는 소리가 군 내부에 드높았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독재자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군 장성들의 지휘능력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개선되긴 했지만 작전지휘권을 넘겨줄 마음은 없었다.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은
한국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작전지휘권만은 독자적으로
행사하기로 마음 먹었다
미군 없인 전쟁이 불가능함에도
한국군만 미군에 예속된다면
전세계 웃음거리가 되는걸
면할 길은 확실히 없었다
한국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작전지휘권만은 독자적으로
행사하기로 마음 먹었다
미군 없인 전쟁이 불가능함에도
한국군만 미군에 예속된다면
전세계 웃음거리가 되는걸
면할 길은 확실히 없었다
1976년 10월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해온 카터후보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주한미군의 완전철수 또는 대폭 감군이 가시화되자 작전지휘권 이양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특히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이 거세게 전개되고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생독립국들이 대거 유엔회원국이 되고, ‘중공’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면서 미국이 주도해온 유엔의 분위기가 바뀌어 더 이상 한반도에 유엔군 사령부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75년 6월 27일 미국의 주도하에 영국, 캐나다, 일본 등 서방 6개국은 한국정부와 협의를 거쳐 휴전협정 당사자인 중국과 이북이 동의한다면 1976년 1월 1일을 기해 유엔군 사령부를 자진 해체하겠다는 결의안을 제출하게까지 되었다. 주한미군철수와 유엔군 사령부의 사실상 해체라는 조건 하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행사해오던 작전지휘권도 큰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 11월의 한미연합사령부 창설은 이런 배경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유신시대로 후퇴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이 작전지휘권 전환을 내팽개친 것은 유신을 넘어 만주국 시절로 회귀한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박정희는 비록 만주군 출신이었지만, 작전지휘권 환수를 위해 자주국방을 표방하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 국방장관이요, 참모총장이요 하는 자들은 그런 뱃심도 없는 똥별들이다.
박정희와 박근혜의 중대한 차이는 박정희는 그 자신이 최고의 군사전문가였지만, 군사문제에 백지인 박근혜는 참모총장 출신들에 둘러싸여 군피아들의 ‘호갱’ 노릇만 하고 있다. 박정희가 나름 심혈을 기울였던 자주국방은 이제 엄청난 방산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했고, ‘육방부’는 육해공군의 균형 있는 발전대신 미군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 막대한 국방예산을 낭비하고 있다. 여기가 네버랜드인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어떻게 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보호를 책임진단 말인가. 한국 안보가 불안하다면 그 진짜 이유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자들이 자기들만이 안보를 책임질 수 있다고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사측 및
성공회대 교양학부 ^^한홍구 교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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