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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해양 경찰청장-김석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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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740회 작성일 2014-11-2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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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해양경찰청장입니다."

해양경찰청이 해체되기 하루 전인 지난 17일 해경의 마지막 수장(首長)이 된 김석균 전 청장을 인천에 있는 해경 본청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정복을 입고 있었다. "길어야 하루 더 입을 수 있는 앞으로는 입을 날 없는 옷"이라고 했다. 해경은 1996년 8월 경찰청에서 독립한 지 18년 만에 세월호 참사 때 사실상 구조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젠 국민안전처 해양경비안전본부로 편입된다.

해양경찰청은 1953년 내무부 치안국 소속 해양경찰대로 출범한 이후 61년 동안 우리나라 바다를 지키는 대들보 역할을 했다. 1996년 8월에는 경찰청에서 독립해 처음으로 독립 행정기관이 됐다. 하지만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때 구조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결국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마지막 해경청장이 된 김석균 전 청장이 지난 17일 인천 해경 전용부두에서 인천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해양경찰청은 1953년 내무부 치안국 소속 해양경찰대로 출범한 이후 61년 동안 우리나라 바다를 지키는 대들보 역할을 했다. 1996년 8월에는 경찰청에서 독립해 처음으로 독립 행정기관이 됐다. 하지만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때 구조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결국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마지막 해경청장이 된 김석균 전 청장이 지난 17일 인천 해경 전용부두에서 인천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 이덕훈 기자
◇"해·경·해·체"

지난 5월 19일 오전 전남 진도 앞바다 세월호 실종자 수색 구조 지휘함 3009함 회의실.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TV로 지켜보던 김 전 청장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박 대통령은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라고 했다. 전날까지 해경 해체에 대해 어떤 조짐도 눈치 채지 못했기에 충격은 더 컸다.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해·경·해·체'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고 했다. 그는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 그는 한 번 더 가슴이 철렁했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기자회견을 통해 "해경이 해체되면 수색은 누가 하느냐"고 했던 것이다.

"그 순간 엄청난 죄책감이 엄습했다. 정무수석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생각이 짧았다. 가족들이 저렇게 불안해하는데…. 사퇴는 수색 작업이 끝난 뒤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곧바로 헬기로 진도군청에 날아가 "해경에 변화가 있다고 해도 수색은 한치 흔들림 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때 실종자 가족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눈빛에서 안도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천하의 죄인이 될 뻔했다. 그 눈빛이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줬다."

◇평생 짊어질 뻔한 짐을 조금은 덜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초기 대응 부실로 해경 해체가 결정됐다. 마지막 해경청장으로서 마음이 무거울 것 같다.

"모든 게 내 책임이다. 초기 구조와 수색 과정에 문제가 있었고, 실종자 가족들과 국민의 분노가 있었다. 어떤 비판과 질타도 모두 내가 받아야 할 몫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세월호 참사 약 7개월 만에 실종자 가족들이 수색 중단을 결심했다.

"실종자를 모두 찾지 못했지만 유족들이 수색 종결에 동의한 후에 옷을 벗을 수 있게 돼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었다. 아니면 평생을 지고 살아야 했을 수도 있을 텐데…."

―남은 실종자 9명을 나중에라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나.

"100% 장담은 못해도 선체 인양 과정에서 실종자를 찾을 수도 있다.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한 곳에서 찾을 수도 있다. 생존자들이 마지막 순간 실종자들을 배 안에서 봤다고 하지 않았나. 수십 번을 살펴봤는데도 발견 못하다 나중에 '어떻게 이런 데 있었을까'하는 데서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유실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나.

"완도해경 서장을 할 때 20m 바닷속에 침몰한 어선을 한 달여 만에 인양한 적이 있다.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던 실종자가 조선소에서 배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아주 좁은 선실 벽 사이에 끼어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불쑥 나타난 것이다."

◇해경 독립때 합류해 마지막 간판 내리다

지난 18일 오후 인천 연수구 해양경찰청에서 직원들이 해경 깃발을 내리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인천 연수구 해양경찰청에서 직원들이 해경 깃발을 내리고 있다. / 뉴스1
김 전 청장은 1993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법제처에서 일했다. 1996년 해경이 경찰청에서 독립할 무렵 해경 쪽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의를 했다. 6개월을 고민한 끝에 해경에 합류했다. 고시 출신 공무원이 해경에 간 첫 사례였다. 그렇게 해경 탄생 무렵 합류했던 그는 해경의 간판을 내리는 비운(悲運)을 맞았다.

―고시 출신이 해경으로 간 것은 특이한 결단이었던 것 같다.

"고시 출신으론 처음이라고 들었다. 당시 많이 망설였다. 바다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주변에서도 하나같이 말렸다. 그래도 남들이 안 가본 길을 가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바다가 중요해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기보단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자는 차원이었다."

그는 해양 분야에서 '해적 박사 1호'로도 불린다. 2005년 아시아 해적들에 대한 연구로 한양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올해 초에는 '바다와 해적'이라는 책을 냈다.

―해적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는 등 해양 분야 쪽은 전문가지만 해난 쪽은 경험이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잠수를 해본 경험이 없다는 지적이라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지휘관이 모든 실무를 다 해봐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문가는 아니어도 전문가를 동원하고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박 대통령이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한 날 "대통령 뜻을 겸허히 수용한다"는 취지로 말해 직원들의 원성을 샀다고 들었다.

"욕 많이 먹었다. 출세하려고 조직을 팔아먹었다는 말도 들었고.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식의 문자도 받았다. 그런 직원들 마음을 이해한다. 그렇게 욕먹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허탈하고 공허한 심정을 지휘관이 대변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나한테 모든 욕을 다 하라'고 했다. 이것 또한 마지막 청장으로서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해경의 61년 자부심이 맹골수도에 침몰했다는 말도 들었을 텐데.

"국민적 질타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해경이 영원히 침몰하는 건 아니다. 해경은 국가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질타는 받지만 완전히 물에 빠져서 수장되는 건 아니다. 지금도 바다를 지키고 있고, 앞으로도 그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해경은 1953년 내무부 치안국 소속 해양경찰대로 출범했고, 1996년 8월에는 경찰청에서 독립해 처음으로 독립 행정기관이 됐다. 해체 직전 인력은 경찰관 8700명, 의경 2500명 등 모두 1만1200명이었다.

―세월호 수색 작업이 마무리됐으니 이제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도 있을 텐데.

"해경과 해군 등 구조 기관을 믿고 구조 요원들이 구조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정부 전체 대응 매뉴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방송과 국민이 구조 기관들을 믿어주고 지켜봐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절실하게 느꼈다. 얼치기 전문가들이 등장해 현장도 모르면서 이래라저래라 하고 실종자 가족들과 국민은 그걸 믿고 우릴 욕하고…. 정말 힘들었다."

◇세월호 같은 여객선 침몰 상상도 못했다

그는 세월호가 침몰한 4월 16일부터 40여일 동안 3009함에 머물면서 실종자 수색 구조 작업을 이끌었다. 실종자 가족들에게 브리핑할 때를 제외하곤 뭍으로 나올 일이 없었다. 작업이 시작되면 고무보트를 타고 바지선으로 이동해 현장 지휘를 했다.

―언제 처음 상황 보고를 받았나.

"4월 16일 오전 9시 5분쯤 해경 본청의 5층 집무실에서다. 곧바로 6층 상황실로 뛰어올라갔다. 현장에 도착한 123정은 카메라가 달려 있지 않아 화면은 못 보고 서해지방청과 무선 통신하는 내용을 들었다."

그는 올해 말까지 100t급 이상 모든 경비함정에 카메라가 장착될 것이라고 했다.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전국 잠수 구조 인력을 총동원하고 주변 경비함정을 출동시켰다. 오전 10시 반쯤 대통령 전화를 받았다. 헬기장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였다. 대통령은 '단 한 명도 포기하지 말고 구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국민이 안타까워하는 건 해경이 왜 승객들에게 탈출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가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00t급 '123정'이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이후에도 해경이 이런 대형 선박 사고에 대한 훈련이나 대비를 하지 않아 이런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 아닌가.

"청장으로서 할 말이 없다. 솔직히 세월호 같은 대형 여객선이 침몰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 상황을 가정한 훈련도 없었다."

―해경의 재난 구조 능력이 지난 21년간 제자리걸음을 했다는 말인데.

"변명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얼마 전 경남 통영 앞바다에서 어선이 침몰해 갇혔던 선원 3명을 전원 무사히 구조한 일도 있다. 그때는 유속이 1노트 정도로 느렸고, 수심도 20m로 얕았다. 배가 작아 접근도 쉬웠고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상황도 아니었다. 이럴 땐 구조가 이뤄진다. 하지만 세월호는 모든 게 달랐다. 바다에서 20년, 30년 근무한 해경 전문가들도 배가 그렇게 빨리 침몰할 수 있다는 점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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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인천 연수구 해양경찰청 1층 대강당에서 열린 김석균 해경청장의 퇴임식 장면.
지난 18일 인천 연수구 해양경찰청 1층 대강당에서 열린 김석균 해경청장의 퇴임식 장면. / 이태경 기자
◇'냉혈한'으로 보였던 젊은 청장

―실종자 가족들 중엔 당신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냉혈한'이라고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젊은 사람이 일찍 출세한 걸 봐서 비정한 사람이 틀림없을 거라고들 했다고 하고. 실종자 가족들과 소통이 부족했나.

"사고 발생 당일부터 바다에서 수색 구조 임무에만 전념했다. 실종자 가족들을 살갑게 대할 기회도 별로 없었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런 관계가 바뀐 계기가 있었나.

"7월 초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기관 보고 때문에 '며칠 자리를 비웁니다'라고 인사를 하러 갔다. 한 아버지가 그러더라. '우리 애도 참 운이 없지만 청장님도 마찬가지다. 우리 애는 수많은 사람이 왔다갔다하는 길이었는데 왜 하필 그 배에 타게 됐을까. 또 청장님은 잘나가는 엘리트인데 왜 하필 이때 청장이 됐는지….' 그 말을 들으니 그동안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솟구쳤다.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준 분들도 결국 실종자 가족들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실종자 가족들과 가까워졌나.

"가족이 됐다고 할까. 실종자 가족 한분 한분의 절절한 사정도 알게 되고…. 3대 독자 현철이의 아버지는 젊어서 안 해본 고생이 없다. 중국집 배달도 하고, 버스 운전도 했다. 그는 아들이 있어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세 가족이 식사를 하면서 맘속으로 '하느님 이 행복을 빼앗아가지 말아주세요'라고 기도하기도 했단다. 그런 분의 아들을 결국 찾아주지 못했다."

지난 2일 수색 중단 얘기가 나오던 날. 진도군청 회의실에서 회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자 한 실종자 어머니가 찾아왔다. 그는 손을 꼭 잡고 "청장님, 수색을 계속하면 안 될까요. 88수중이 못한다고 하면 언딘을 다시 불러서라도 수색을 계속 해줄 순 없나요"라고 말했다. 김 전 청장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야멸차게 그렇게 못 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냥 '미안합니다. 상황이 잠수하기엔 위험해서…'라고 말을 흐렸다"고 말했다.

◇해경은 사라져도 임무는 남는다

지난달 초 그는 헬기를 타고 중국 어선 불법 조업을 단속하는 목포해양경찰서 소속 경비함 1508호를 방문했다. 조직 해체 소식으로 뒤숭숭한 직원들을 격려하고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중국 어선들의 불법 행위를 강력하게 단속하라고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조직이 해체된다고 할 일을 안 하면 우린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울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가을철 접어들면서 현안은 중국 어선의 불법 단속이다. 이 임무를 제대로 못 하면 우린 영원히 주저앉는 거다."

―해경 해체 소식이 알려지면서 불법 조업 단속이 잘 안 된다는 말이 나왔다.

"정보 보고에 따르면 불법 조업을 많이 하는 지역 중국 어민들이 우리 해경 해체 소식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한동안 우리를 만만하게 봤던 것 같다."

―세월호 실종자 수색 작업 지휘를 하면서 불법 조업 단속 지휘도 동시에 했나.

"8월 이후 일주일에 2~3번은 현장을 다녔다. 10월부터 연말까지는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가장 극성인 시기다. 해경 임무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이뤄진다. 인명 구조 등을 중심으로 한 '해양 재난 관리'와 독도·이어도 등 도서의 영유권 수호, EEZ(배타적경제수역) 등 해양 관할권을 지키는 '해양 주권 수호'이다. 주변국 어선의 불법 조업 단속은 해양 주권 수호에 포함된다. 해경은 두 개의 핵심 임무 중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지난달 초 중국 어선 선장이 우리 해경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그날 중국 어선을 단속했던 경비함이 바로 이틀 전 방문했던 경비함 1508호였다. 때가 때인 만큼 단속 잘하라고 했다. 또 위급한 상황, 폭력적인 상황, 우리 안전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는 총기를 사용하라고 했다. 그랬는데 이틀 만에 그런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국회 답변 준비하러 본청에 와 있었는데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어쨌든 사람이 사망했으니까."

―중국 측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등 반발이 거셌다.

"중국도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무리한 공권력 행사라고 주장하는 건 당연하다. 이때 중요한 건 채증이다. 총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란 걸 증명해야 한다. 처음엔 채증 동영상이 없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보통 기동대원의 이마와 가슴에 다는 모든 카메라의 배터리가 방전됐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3~4시간 후 카메라 한 대에 영상이 담겨 있다는 보고가 다시 올라왔다.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뻔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해경이 해체돼도 이런 임무는 더욱 커지고 중요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조직도 사람 인생과 마찬가지다. 굴곡이 있고 부침이 있는 것 아닌가. 우리 해경 역사가 올해로 61년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아픔이고 진통이라고 생각한다. 해양경찰청은 사라져도 그 임무는 계속될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중국 어선의 불법 어로를 막을 더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할 것 같다.

"최근 대형 함정 4~5척으로 구성된 기동전단을 만들었다. 경찰서 서장급인 총경이 단장이다. 지난주 중국 어선이 많이 출몰하는 해역을 따라다니며 단속했는데 성공적이었다."

―일본이나 중국도 우리의 해경 같은 조직의 임무가 커지고 있는 건가.

"그렇다. 일본은 센카쿠열도를 놓고 중국과, 쿠릴열도 4개 섬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영유권 마찰을 빚으면서 해상보안청을 계속 키우고 있다. 중국도 작년에 세관과 연안 경비, 해상 경찰 등의 기관을 묶어 우리의 해경과 같은 '차이나 코스트 가드'를 창설했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 동남아 국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해경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는 이유는.

"분쟁은 많아지고 확산되는데 해군을 투입하기엔 지나친 상황이 많다. 군은 고강도 분쟁을 유발할 수 있고 정치적 의미가 너무 크다. 해양 경찰력은 무력 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이 적고 외교적 함의도 적다. 해경을 강화해 해양 분쟁에 대응하는 게 전 세계적인 추세다."

―그동안 해경이 해양 주권 수호 쪽에 너무 신경 쓰는 바람에 이번 세월호처럼 대형 선박 사고 대응에 미숙한 점을 노출한 것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다. 독도·이어도를 지키고 불법 조업 어선을 단속하는 게 중요한 관심사였다. 무게중심이 그쪽으로 많이 쏠렸다. 그것 때문에 예산과 인력도 늘었고 조직도 커졌다. 그렇다고 해양 재난 관리를 무시한 건 아니다. 그건 우리의 중요한 일상 임무였다."

―실제로 그쪽에 힘을 쏟긴 했나.

"취임 후 사고 30% 줄이기를 적극 추진했다. 17개 경찰서별로 차트를 만들어 매달 실적을 확인했다. 작년 선박 사고는 최근 3년 평균보다 39%가 줄었고, 인명 피해는 243명에서 132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차원이 다른 사고였다. 그런 대형 선박 사고를 대비하지 못한 점, 변명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경찰관복 벗는 날을 하루 앞둔 그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이튿날 본청 10층 높이에 달렸던 '해양경찰청'이란 현판은 떼어졌다.

김석균 前 해경청장은

1965년 경남 하동 출생. 진주동명고·한양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석사 학위, 한양대에서 박사 학위(행정학)를 받았다. 행정고시(37회) 합격 후 법제처에서 근무하다 1997년 2월 경찰청에서 독립한 해경에 합류했다. 국내외 권위 있는 저널에 10여편의 논문을 게재한 국제해양문제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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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측 및 프리미엄 조선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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