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건차 日 가나가와大 교수재일교포 2세 학자인 윤건차(70) 일본 가나가와(神奈川)대 교수가 최근 방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재일동포가 이야기하는 일본과 한국’에 대해 연속 세 차례 특강을 해 관심을 끌었다. 윤 교수는 해방 전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나 자이니치(在日·재일 조선인을 일컫는 일본어)라는 자의식을 갖고 살아온 지식인이다.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20대 때 우리말을 독학하며 한국 및 일본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해온 그는 ‘현대 한국의 사상’ ‘현대일본의 역사의식’ 등의 저작을 펴내며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2000년 국내에 번역된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나뉜 1980∼1990년대 한국지식인사회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그려낸 명저로 평가된다. 지난 10월 10일 서울대 특강 후 서울 시내 덕수궁에서 만나 그가 보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시대 일본의 동향과 한·일관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서울대 국사학과 특강 때 일본사회의 과제를 천황제 폐지로 제시해 놀랐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가능하지 않다.”
―그럼 왜 과제로 제시했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얘기한 것이다. 일본사회의 과제는 천황제와 조선 문제라는 것을 부각시키려고 한 얘기다. 일본이 천황제를 하고 나서 조선을 침략한 거니까 천황제와 조선 문제 해결은 일본의 과제다. 우리의 과제는 남북통일, 즉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다. 남북분단의 기본원인은 일본군의 한반도 주둔에서 찾을 수 있다. 연합군이 일본군을 무장해제 하러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분단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우리의 첫 과업은 통일이고, 두 번째는 천황제를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인이 아니니 다른 말로 일본의 민주화라고 말하면 된다. 그게 바로 천황제 폐지를 뜻한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통일이다. 다만 통일은 민주적으로 해야지 무력으로 하면 안 된다. 재일교포는 사실상 분단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통일이고, 그것은 일본과 한국, 북한 그리고 재일사회의 민주화에서 시작된다.”
―천황제와 조선 문제를 일본의 과제로 제시하는 것은 새로운 시각이다.
“천황제와 조선은 일본사회의 사상적 과제다. 자이니치 입장에서 볼 때 천황제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부터 본격화한 것인데 서구열강들이 들어오니 식민지화를 피하려고 천황을 데려와 거기에 정치, 경제 모든 것을 집중시키고 충성하게 하려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뭉쳐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천황을 핵심으로 한 민족공동체를 이뤄 서구 열강에 대해 저항한다는 논리인데 그것이 순식간에 침략의 방향으로 나갔다. 조선과 중국 등을 침략한 것이다. 천황은 일본이 주변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일본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됐다. 천황이 직접 한 것이라기보다 주변에 있는 정치인들이 천황을 이용한 것인데 그게 일본사회의 특징이 된 것이다. 패전 때 일본인 병사와 민간인이 350만 명, 중국 등 아시아인이 2000만 명 죽었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천황제가 2차대전 이후에도 존속된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는가.
“2차대전 전범 아돌프 히틀러 등은 다 죽은 반면, 천황은 천수를 누렸다. 미군이 들어왔을 때
미국에서는 천황 퇴위론이 제기됐는데 미 군정은 그렇게 하려면 100만 명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인 마음속에 천황이 들어 있기에 그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바로 미국과 소련이 대결하는 냉전 시대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천황을 이용해 일본을 종속시키고 동맹군을 만드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천황을 살린 것이다. 그러니 원수가 아니라 상징으로 존속시킨 것이다.”
―존재하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상징으로서 천황을 규정한게 평화헌법인데.
“일본 헌법 1조에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라고
기술돼 있다. 그리고 9조에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군대를 두지 않겠다고 돼 있다. 천황을 살리되 전쟁은 못하게 한 게 일본의 평화헌법이다. 그런데 천황제는 정치
시스템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공무원 조직이나 군대, 회사에 모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에서 지시하면 복종해야 하고 자기주장을 하면 안 되고, 저항해도 안 된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은 항상 싸우며 이견을 제시하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게 불가능하다. 천황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사람들은 이런 관념을 옛날부터 계승해왔다는 점에서 저항하지 않는다.”
―일본사회에서 일본이 민주화하려면 천황제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소수지만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학자들인가.
“학자라기보다 시민운동가, 글을 쓰면서 활동하는 지식인 운동가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정치인들은 어떤가.
“야당조차도 그런 얘기는 안 한다. 옛날 일본 공산당이 그렇게 주장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천황제 얘기를 안 한다. 일본인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천황제를 부정하면 의회에 들어갈 수 없으니 얘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럼 소수의 사람이 천황제 폐지를 얘기하는 셈인데 천황제를 신줏단지처럼 여기는 극우세력은 어떤 집단인가.
“극우는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경제가 힘들어질 때 피해의식을 갖고 제일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 그것이 바로 재일 조선인이다. 일본사회에서 눈에 보이는 제일 약한 사람들은 조선인밖에 없다. 외국인노동자가 있긴 하지만 고정된 집단이 아니고, 장애인이 있지만 신체적인 약자에 대해선 공격하기 어려우니 사회적 존재로서 약자는 조선인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건드리는 것이다. 극우파들의 주장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안 하니 자꾸 목소리가 커지고 언론에서 이들의 주장을 받아주니 영향이 커 보이는 것이다.”
―아베 정부가 워낙 우경화로 치달으니 극우파들의 목소리도 커지는 것 같다. 한·일 문제를 고민해온 분으로서 아베 정권을 어떻게 보는가.
“아베 정권에 대해선 말하기가 어렵다.”
아베 정권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고 선을 긋는 그에게 “아베시대 한·일관계에 대해선 어떻게 보느냐”고 바꿔 물었더니 “아베 같은 사람과는
대화하거나 교류할 필요가 없다”며 이렇게 얘기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도 일본이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도 일본이다. 그런데 아베는 침략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과는 사귈 수 없다. 2000만 명을 죽인 나라의 정치책임자가 그런 침략 사실을 모른다고 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직접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데도 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모른다고 한다. 또 한·일 간의 모든 것은 한일협정으로 해결됐다고 한다. 그런 주장은 역사에 대해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 말아야 한다.”
그는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과는 사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얘기하는 것은 들어줘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너무 톤이 센 주장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곧 “다만 우리도 살아야 하니, 정치적 교류는 하지 않는 대신 경제적 교류나 무역만 하고 지내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청년 시절
경험을 쏟아냈다.
“물론 내 얘기가 극단적으로 들릴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제일 중요한 것을 부정하는 사람과는 얘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부부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며 지낼 수 없듯 국가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베 같은 사람들에게 맞춰가며 살 필요는 없다는 거다. 재일교포는 그런 역사를 겪어왔다. 지금은 취직할 수 있게 됐지만,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되지 않아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온 존재다. 그러니 지금 좀 끊어져도 살 수 있다. 내가 대통령 같으면 주한일본대사관을 폐쇄하고, 항공편도 폐쇄하자고 말하고 싶다. 침략 사실을, 남북분단의 책임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얘기를 하나. 그들 때문에 전쟁을 했고 그들 때문에 몇백만 명이 죽고 희생됐는데… 그런 역사를 모른다고 하면 안 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2기 정권은 민주당 정권 뒤에 들어섰는데, 민주당 정권이 다시 권력을 잡을 것으로 보는가.
“그럴 가능성은 없는 것 같다. 일본정치는 나빠질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이 없다.”
―당분간 그렇다는 얘기인가.
“당분간이 아니라 쭉 나빠질 것으로 본다.”
―향후 아베 집권 동안 그렇다는 얘기인가.
“아니 계속 더 나빠지고 사회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본다.”
―엔저 효과로 경제가 살아난다는 얘기가 많은데.
“그건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 일본경제는 어려워지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얘기가 지배적이다.”
―야스쿠니(靖國)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보는가.
“우리는 야스쿠니 분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 요구를 계속하면 된다. 위패가 그곳에 있다 없다 해서 뭐가 달라지지는 않지만 정신적인 문제이니 요구를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내년은 한일협정 50주년이자 해방 70주년인 해인데 한·일 양국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나.
“현 상태는 뭐가 잘 될 수 없는 구조다. 50주년, 나아가 70주년 기념
사업을 안 해도 된다. 다만 우리가 일본 측에 뭔가 문제 제기를 하고 그런 것을 역사로 남기고 가면 된다.”
―한국정부나 사회가 자이니치에 대해 뭘 해야 할까.
“남북분단, 남북대립 상태이니 한국정부가 북한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제한돼 있지만 재일교포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그는 “이것은 반드시 써달라”면서 재일교포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요즘엔 한국 국적자가 대부분이지만 조선 국적인 사람들, 말하자면 무국적자들도 여전히 몇만 명이 있다면서 한국정부가 큰 틀에서 이들을 포용해 줄 것을 당부하며 이같이 말했다.
“김대중·노무현정부 때에는 그런 무국적자들도 모두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모두 다 입국 증명서를 냈다. 동포니까. 재일교포는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양쪽 다 갈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뭐 때문에 조국에 못 가느냐. 어떤 사람은 북을, 어떤 사람은 남을 조국으로 볼 수 있다. 양쪽에 다 친척이 있다면 다 갈 권리가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한국정부가 조선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며 적대시하고 한국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한국정부가 그래서는 안된다.”
―이명박정부에 이어 박근혜정부도 그렇게 한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간첩사건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간첩활동을 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는 거듭 “한국정부가 그런 사람도 포용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면서 “김대중·노무현정부 때 그 사람들에게 입국증명서를 줬는데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하나, 재일교포 자녀들이
공부하는 학교, 예컨대 오사카(大阪)의 국제코리아 학원처럼 중립적인 학교에 대해서는 지원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제언했다.
―조총련계 학교에 대해선 정부가 공식 지원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물론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조총련계 학교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교육이 진행될 수 있는 정도는 도와줬으면 한다. 한국정부가 하기 힘들다면 민간에서라도 나서서 교육을 지원해야 한다.
―재일 조선인, 즉 자이니치들이 냉전 시대 틀에서는 핍박을 받고 남한·북한·일본 사이에서 고생하며 살아온 것은 사실인데,
글로벌 시대에는 자이니치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지는 것 아닌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글로벌 노마드 개념을 제시하며 “글로벌 시대에는 이민자처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자이니치는 글로벌 시대를 준비해온 냉전 시대의 노마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이니치는 옛날에 취직도 못 할 정도로 차별을 당했다. 요즘에는 대학교수도 되고 다른 분야에서도 대부분 잘 되지만 여전히 은행 취업은 제한된다. 자이니치는 일본 이름을 쓸 것을 요구당하고 의식도 그렇게 강요된다. 탈냉전 시대 들어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자이니치 3세, 4세들은 대부분 가족이나 출생 문제로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일본인과 똑같지 않다는 데서 오는 고민, 일본의 머저리티 집단과 다르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마이너리티라고 해서는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뭔가 정체성 문제를
분석하려면 자이니치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자이니치는 다른 말로 하면 민족이다. 그러니까 민족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요즘 세대는 민족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래도 제1 정체성은 민족, 자기 출생의 내력이나 이력, 뿌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일본이든 북한이든 미국이든 자기의 역사를 자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역사의식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어떻게 나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글로벌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 문제는 남아 있다는 얘기인데.
“정체성 문제는 남아 있다. 재일교포 1세는 조국이라는 고향이 있다. 자기가 자라난 곳이 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조국과 고향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나는 2세로서 그런 감정은 없다. 그렇다고 내가 태어난 교토를 고향으로 얘기할 수 있나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내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얘기하나.
“할 수 없이 고향을 말할 때엔 아버지 고향인 경북 예천을 얘기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주 옛날 한 번밖에 가보지 못했다. 그러니 상상의 고향이다.”
―예천에서 왔는데 교토(京都)에서 태어났다고 얘기한다는 건가.
“교토도 그렇게 고정된 고향은 아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강상중 세이가쿠인(聖學院)대 학장 덕분에 일본사회에서 자이니치에 대한 관심이 일본사회에서 높아졌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강상중은 일본사회에서 인기 있는 학자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이니치를 버린 사람이다. 천황제와 조선 문제가 일본의 문제라는 얘기를 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얘기를 하면 일본 언론이 상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일본 언론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려는 사람이다. 제 경우 8, 9년 전만 해도 아사히(朝日)
신문에서 글을 써달라고 했는데 요즘에는 더 이상 그런 요청이 오지 않는다. 천황제 폐지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청탁을 하겠나.”
―자이니치 지식인 중에서는 선생님이 제일 적극적으로 일본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 같다.
“재일 조선인 문제를 얘기하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이제 마지막 단계다.”
―요즘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자이니치 정신사를 쓰고 있다. 80% 정도 썼다.”
―자이니치 정신사에 대해 정리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동기는.
“우리는 재일 조선인으로서 남한·북한·일본 등 3개의 나라 사이에서 살고 있다. 그런 상황을 정확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년이 한일기본협정 50주년이고 해방 70주년이니 한 시대가 마감되는 상황이다. 내가 쓰지 않으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으로 재일교포 1세대가 거의 없어지는 상황인데 2세로서 1세를 잘 알고, 1세대를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정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내가 마음먹고 쓰지 않으면 자이니치 역사를 남기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책이나 자료로는 전체상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니 예부터 들어온 얘기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자료는 언제부터 모았나.
“언젠가 쓸 것이라 생각해서 10년 전부터 모았다. 벌써 100명 이상 구술을 했다. 밀항한 사람을 찾아내 구술을 하는 게 어려운 일인데 그런 일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소설가의 경우 작품은 결과물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활을 했고, 어떤 배경에서 그런 작품을 썼는지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것을 정리해왔다. 물론 여러 사람이 부분적으로 해온 것은 많다. 이번에 내가 종합적으로 하려는 것이다 .”
―혼자 하기는 어려운 방대한 작업인데.
“물론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제자가 없다. 그래서 혼자 한다. 하나의 모토를 갖고 지속적으로 자료를 발굴하고 구술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 연구도 혼자 했는가.
“그렇다. 그 책을 집필할 때 3명 정도가 도와줬지만 책임은 혼자 져야 하는 것이니까 혼자 했다고 볼 수 있다.”
―100명을 인터뷰 했으면 기초 구술작업은 끝난 것 같은데.
“아직 남아 있다.”
―얼마나 더 할 건가.
“재일 정치범을 더 해야 한다. 1970년대 많은 재일 유학생이 (한국 정부기관에) 붙잡혀갔다. 그 유학생들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를 쓰려고 한다. 자이니치 사상사, 자이니치 고뇌사, 자이니치 고투사가 될 것 같은데 그런 투쟁은 본국과의 권력관계에서 나온 거니까 유학생들을 체포했던 한국의 기관 소속인사들의 얘기도 듣고 싶은데 관련자들이 말을 하려 하지 않아 참으로 어렵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 씨도 포함되나.
“문 씨에 대해서는 쓸 수가 없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써야 하는데 배경이나 역사적 사실을 알 길이 없다. 오사카에 살고 있다는 그의 가족과 형제들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그 사람들에게 물어봤자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게 뻔해 쓸데없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본 명문 교토대와 도쿄(東京)대를 졸업한 뒤 37세 때 가나가와대에 채용돼 교수가 됐다. 이 대학에서 33년 동안 가르쳤고 내년에 정년퇴직을 한다. 일본의 주류지식인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이니치 지식인으로서 독보적인 세계를 만들어왔다는 게 경이롭다고 했더니 “나는 자이니치의 중심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럼 누가 중심이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없다”고 단답형으로 답했다. 과거의 힘들었던 시절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가나가와대에서는 어떻게 견디셨나.
“학교에서는 수업만 했고 쓸데없는 얘기는 바깥에서 했다.”(웃음)
―어떤 것을 가르쳤나.
“한국 문제와 역사 문제를 가르쳤다.”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만의 지적인 세계를 만들며 살기가 어려웠을 텐데.
“나는 가만히 혼자서 일을 해왔다. 그러니 다른 일은 못 했다. 사람이란 혼자 일을 할 때 제일 어렵다.”
인터뷰 = 이미숙 국제부장 musel@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