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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더글러스 맥아더(왼쪽) 연합군 총사령관과 회동을 가진
히로히토 일왕(쇼와 천황).
작고 초라한 천황의 모습에
일본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후 신격자가 아닌 인격자로서의 천황,
즉 새로운 ‘인품 신화’가 펼쳐졌고,
천황제는 여전히 친화와 폭력의 이중 장치로서
국민통합을 이뤄내고 있다. 소명출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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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 한달여 뒤인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일왕(쇼와(昭和) 천황, 1926∼1989)이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연합군 총사령관을 방문했을 때
작은 체구의 천황은
사진 속에서 정장 차림으로 차렷 자세를 하고 있는 반면,
큰 체구의 맥아더는 노타이 셔츠 차림에,
사람들은 참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천황의 모습에
‘패전 국민’인 자신을 투영시켰다.
동시에 천황은
성스러운 아우라를 잃은 채 국민 앞에 벌거벗겨졌다.
(당시 일왕의 목숨은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손짓에
달려있었다고 합니다)
패전 이후 천황의 신체(神體)는 신성함을 잃었다.
그러나 ‘자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가
전후 일본
국민의 재통합을 진행했고,
일본을 반공 요새로 삼기 위해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면책시키면서
‘상징 천황제’로서 존속시켰기 때문이다.
구리하라 아키라(栗原彬) 릿쿄(立敎)대 명예교수는
이때부터 이른바 ‘인품(人品)신화’가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최근 국내 번역·발간된 일본 이와나미(岩波)문고의
근대 일본의 문화사 시리즈 10권
‘역사와 주체를 묻다’(소명출판)에서
구리하라 교수는
1955년 이후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가 어떻게 변용돼 가는지를 추적한다.
그는 ‘쇼와의 종언’이라는 글에서
“전후 천황이 신성함을 잃었지만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퍼포먼스를 통해
생태주의자,
문화인,
과학자,
가부장
등의 상이 만들어졌다.
戰後 새로운 국체로서의 ^^천황은
여전히
친화와 폭력의 이중장치로 작동하는
천황제를 비판했다.
구리하라 교수에 따르면
전후 국민통합 기능을 위해
천황은 어느 정도 아우라를 회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메이지(明治·1867∼1912) 천황의
순행(巡幸·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는 일) 전,
길조나 기적을 전하는 기사가 나가던 것처럼의 신격화는 어려웠다.
신성함을 부여하려는 퍼포먼스는 계속됐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신격자’ 대신 ‘인격자’를 찾았고,
천황의 신체는 ‘청정·순수·무구한 사람’
또는 경우에 따라
‘온화한’ ‘평화주의자’
구리하라 교수는 이에 대해
이 ^^스크린에
국가 목표,
GHQ의 의도,
가족의 위기의식,
국민자아의 그림자
등이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혹은 자의적으로 그려 넣어졌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생태주의자 천황,
문화인 천황,
과학자 천황,
가부장 천황
등의
상(像)이다.
이는
‘일본의 자연’
‘일본의 전통문화’
‘과학’
‘가족’
등의 가치를 생산하는 구심점이 됐고,
다시
^^내셔널리즘(국가주의)을
불러일으켰다.
TV 속 천황은
모내기를 하거나
자연 속에서 산책을 했고,
연초에 와카(和歌·일본 고유의 시) 낭독 행사를 주재했다.
또 생물학 연구소를 설립해
해양생물 표본채집과
분류연구를 했다.
^^구리하라 교수는
이는 ‘평화주의자 천황’상을 보강했고
천황을
근대 과학 질서의 상징으로 연출시켰다”
고
지적했다.
한편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도쿄(東京)대 대학원 교수의
‘전쟁주체로서의 국가·국민’은
야스쿠니(靖國)신사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고찰했다.
다카하시 교수는
일반적으로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를 가리키는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
“국가 그 자체가 가진 ‘종교성’의 문제,
전쟁 수행주체인 국가가 가진 ‘희생’ 논리 자체에
물음을 던져야 한다”며
“A급 전범 합사만을 과도하게 문제 삼으면
자칫 일본의 전쟁 책임을 A급 전범에게만 지우게 되는 위험이 있다”
고
경고했다.
또 “정교분리의 관점에서 문제 삼는다면
결국엔 국가가 전몰자를 기념하는 다른 방식을 탐색하게 된다.
이는
전쟁에서
국가가
국민의 충성과 희생적 헌신을
확보하는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층 ^^문제적이다”고 주장했다.
@+문화일보사측 및 ^^박동미 기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