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전문-양욱--국방개혁은?-방위산업부터 개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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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4,021회 작성일 2017-12-10 17:40본문
[양욱의 Wide & Wise 군사] 멈춰선 국방개혁, 시작은 방위산업부터
입력 : 2017.11.26 00:47:13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
생각해보면 어려운 길이었다. 1950년대 최빈국 수준의 대한민국에는 별다른 산업이 없었다. 반면 북한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부터 차분히 중공업 기반이 구축돼 있었다. 일제는 제철·전기·화학 등 군수 관련 공업을 북한지역에 건설해 만주국 무장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던 영향이다.
오죽하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일본이 설치한 공업시설을 떼어 자국으로 옮기기까지 했겠는가. 일제가 쌓아둔 원자재와 부품 재고는 그대로 북한의 6.25 전쟁 준비에 활용됐다. 심지어 북한은 전쟁 전까지 800명쯤의 일본인 기술자를 억류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은 말만 앞섰다. 무능의 상징으로 알려진 신성모 전 국방장관은 6.25 전쟁 발발 전 "북한이 침략하면 아침은 개성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으며,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허세를 부렸다.
물론 이런 북진통일론은 미군철수 상황을 맞아 북한의 남침의도를 저지하고 미국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억제전략이었다. 하지만 억제전략이 의미를 가지려면 실제 전력이 바탕이 돼야한다. 당시 우리 군에는 전차 1대 조차 없없다. 북진은 커녕 북한의 남침조차 막을 수 없었다. 북진통일론은 '비현실적 공갈'이었던 셈이다.
북한이 남침하자 소위 육탄돌격으로 북한 기갑부대를 막아야 했던 한국은 미국의 개입으로 나라를 겨우 지켰고, 이후 미국의 군사원조에 기대 건군의 과정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휴전 후 2개의 보병사단이 중심이 된 지상군과 1개 비행단으로 구성된 공군, 그리고 해군부대를 한국 내에 주둔시켰다. 휴전선을 미국이 직접 막아서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1955년부터는 미국의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10개의 예비사단을 창설해 63만명의 병력규모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원조는 1954년 5억300만달러(5465억원)에서 꾸준히 감소해 1967년에는 최저치인 1억5400만달러(1673억원)까지 줄었다.
◆자주국방의 시작
미국 의존도가 높은 국방은 부작용을 낳았다. 미국이 조금이라도 전력을 덜어내면 국방이 그만큼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닉슨 독트린이다. 베트남전에 질려버린 닉슨 행정부는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가 스스로 해야한다는 새 안보정책을 발표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7사단 철수를 막기 위해 베트남 파병을 했지만 미국은 1970년 초반 기어이 7사단을 철수했고, 1971년 3월 10일부로 휴전선에 배치한 미 제2사단 주력을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우리 군이 휴전선 모든 전선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행위는 일종의 배신과 같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방위산업이다. 나가는 미군을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미국에게 읍소해야했다. 이에 미국으로부터 한국군 현대화계획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M16소총 제조를 위해 부산에 건설한 국방부 '조병창'이다. 스스로 무기체계를 개발하기 위해 국방과학연구소를 만들었고, 국산 방산시범사업으로 번개사업도 시작됐다. 전반적인 준비가 끝나자 1974년부터는 본격적인 자주국방력 건설을 위한 율곡사업이 시작됐다.
정부는 국내 기업의 방위산업 참가를 독려했다. '방위산업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시행된 후 창원기계공업단지는 방위산업의 집결지가 됐다. 1972년에는 29개의 방위사업체가 지정되면서 그 수가 점점 늘었다. 한국화약주식회사(한화), 금성정밀공업(現 LIG넥스원), 삼성정밀산업(現 한화지상방산), 현대중공업, 삼성항공(現 한화시스템), 한국기계공업(現 한화디펜스), 현대조선중공업 철도차량사업부(現 현대로템), 한국중공업(現 한화지상방산), 풍산 등 유수의 대기업이 방위산업체를 출범시켰고, 현재까지 이어지며 한국 방위산업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국가주도의 급격한 성장
1970년대 방위산업의 목표는 국산무기 만들기였다. 능력이 부족하면 과감히 해외기술을 도입해 면허 생산했다. 1980년대에 들어 제2차 율곡사업이 추진되면서 세계 방산트렌드에 뒤떨어지지 않는 '쓸만한 국산 무기체계'를 속속 구성했다. K1·K2 소총이나 K200 장갑차 등 우리의 전술적 상황을 반영한 독창적 무기체계가 나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술이 부족했던 K1 한국형 전차(ROKIT)는 해외업체(미 클라이슬러 디펜스)에 세부설계를 맡기고 생산은 국내에서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K-55 자주포도 미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생산했다.
비록 기술소유권은 미국이 통제하는 형식이었지만 구체적인 설계 및 통합경험이 부족한 가운데 이런 과감한 접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제3차 율곡사업이 진행된 1987년부터 1992년 사이에는 첨단산업 육성과 기술축적이 더욱 가속화됐다. 국내 독자 모델인 K9 자주포와 K2 전차가 설계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하지만 제3차 율곡사업은 부패의 상징이기도 했다. 1993년 5월 창군 이래 최초 실시된 감사원의 특별감사를 통해 수많은 지적사항이 도출됐고, 여론에 의해 '비리사업'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또 국방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혼란스러운 시기가 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민주적 정권이양 이후 세계적으로 독일 통일, 소련의 약화 및 붕괴라는 커다란 사건이 잇달았다. 특히 1993년 시작된 '하나회 숙청' 등 굵직한 사건은 군에도 영향을 끼쳤다. 자주국방의 의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전력증강의 비전·목표·전략이 모호해지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율곡사업은 북한군에 대한 재래전력 열세를 극복하는 성과를 거뒀다. 애초 경제력 자체가 비교될 수 없었다. 방위사업은 든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력정비사업(1992년~1996년), 방위력개선사업(1997년~1998년), 획득사업(1999년~2001년)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꾸준히 추진됐다.
특히 이 시기는 재래식 기본병기의 수요가 감소하면서 해외수출은 부진한 가운데, 고도의 첨단무기를 필요로 하는 삼중고를 극복해야했다. 이 과정에서 1993년 '방위산업 물자와 방위산업체의 전문화 및 계열화 규정'이 제정됐다. 이에 전문화 2개, 계열화 1개 업체를 지정해 제한적 경쟁체제를 유지하게 했다.
게다가 1997년 초유의 IMF 사태를 맞으면서 방위사업 규모자체가 줄었다. 방산업계 전체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방위사업청의 순작용과 부작용
이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 방위사업청이다. 2000년대에 들어 군납비리 등이 문제가 되자 정부는 2004년 민관합동위원회를 구성해 방위사업구조를 재점검하고 국방획득제도 개선방안을 제시했다. 더 이상 조달본부 시절의 부조리와 부패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후 방위사업법이 2006년 1월 제정되면서 방위사업청이 출범했다.
방위사업청 개청으로 부패의 고리를 잘라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많은 부작용을 낳았던 것도 사실이다. 청렴성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업무의 비효율성이 문제다.
공무원의 존재의미는 효율성 때문이 아니다. 다만 방산업계는 비리집단이라는 투의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 아무런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구조가 돼 버렸다. 결국 방사청의 정책결정 과정은 법과 규정에 따른 기계적인 것이 됐다.
최근 뉴스에는 방위사업청의 부당한 판단에 대한 업체의 소송이 줄을 잇고 법원에서 인용하는 경우가 반복된다. 법원은 방사청이 부당제재를 했다며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 373억원을 지급하라고 권고했다. 수리온 개발과정에서 업체들이 선투자를 한 후 회수를 위해 KAI가 물품대금에 이를 포함시킨 것을 방사청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결정에 대해서도 인정하기 어려워 졌다. 일단 처분을 내린 공무부서로서는 이를 되돌린다는 것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러다보니 법원이 잘못된 판단으로 돌려주라는 결정을 내려도 반환하지 않고 버티는 행태까지 있다.
최근에는 더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원가검증과정에서 방위사업청이 검증에 실패한 내용을 체계통합업체가 스스로 찾아내 신고했으나 이것이 독이 됐다. 방사청은 협력업체 잘못을 두고 체계 전체의 부정으로 판단하고 부당업체 제재에 나섰다. 방사청은 협력업체 실수와 잘못까지 체계통합업체가 짊어지게 했다. 이렇게 되면 업체는 추후사업에서 무려 474억원의 불이익을 받게 될 예정이다.
애초 문제가 됐던 부당이득금 1400만원을 환수하고, 가산금 700만원 제재를 가했지만 실제로는 제재 금액 700만원의 6700배에 해당하는 474억원을 부담하게 된 것이다. 현재 해당업체는 행정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 입찰 자격을 유지한 상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현 방위산업의 문제는 방위사업청의 개청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구조적 문제다. 애초 대한민국에서 방위산업이 시작될 당시 대기업과 정부사이 합의가 있었다.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방위산업에 기업이 투자하는 대신, 정부는 다른 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가 탱크를 만들겠다고 결심하자 정부는 열차 생산 독점권을 줬다. 특히 1970년대 방위산업 탄생 후에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국가차원의 계획경제와 정치지도자의 직접적인 관심이 컸다. 애초 제2경제수석실이 청와대에 생기면서 국가 수뇌부가 직접 관심을 가지고 챙긴 일이다.
물론 당시 시대상은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생각하기 어렵고, 개혁적 성향이 존재했다. 전력건설 과정에서 이미 1970년대 후반에 무인포탑전차나 항공모함까지 검토되기도 했다. 국방개혁을 이끌 수 있는 브레인과 개혁적 성향, 또 미군이 철수할 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의한 개혁동력이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추동력이 요구된다.
다음은 인식의 문제다. '방산비리' 프레임은 큰 문제다. 애초 군과 관련된 사고만 발생하면 방산비리가 문제라거나 '똥별'이 문제라는 등 여론은 손쉬운 프레임 속에서 해결책을 찾는다.
이명박 정부는 방위산업에 대해 기이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은 '리베이트만 없애도 국방예산의 20%가 절감된다'며 방위산업 전반을 압박했다.
방위산업 전문화·계열화를 폐지시켜 보호육성에서 완전경쟁체제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방산비리를 뿌리뽑는다면서 감사와 수사의 강도는 높였다. 심지어 나사값 하나까지 통제하겠다며 원가산정까지 방사청에 맡겼다. 게다가 지난 정권에서 '방산비리는 이적행위'라는 단순명확한 명제 속에 마녀사냥에 가까울 정도로 여론에 휘둘렸다.
하지만 실제 방위사업의 부정은 상당 수 외국계 방산업체의 국내에이전트나 대리점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방위산업은 위축됐다. 2014년 36억달러(3조9100억원)을 넘어섰던 방산수출총액은 2016년에는 25억달러(2조7200억원)으로 무려 3분의 1이나 줄었다. 정치적 이슈 싸움 속에 우리 국방이 희생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방개혁을 주요 안보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서울에어쇼 축사에서 평화를 지켜내고 만들기 위한 힘을 키워내겠다고 밝혔다. 국방개혁 성공은 방위산업을 어떻게 살려내느냐에 달렸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은 서울대 법대와 국방대학교 국방관리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방부·방사청·합참 정책자문위원을 겸하고 있는 군사컨설팅기업 AWIC(주)의 대표이사입니다.
오죽하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일본이 설치한 공업시설을 떼어 자국으로 옮기기까지 했겠는가. 일제가 쌓아둔 원자재와 부품 재고는 그대로 북한의 6.25 전쟁 준비에 활용됐다. 심지어 북한은 전쟁 전까지 800명쯤의 일본인 기술자를 억류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은 말만 앞섰다. 무능의 상징으로 알려진 신성모 전 국방장관은 6.25 전쟁 발발 전 "북한이 침략하면 아침은 개성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으며,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허세를 부렸다.
물론 이런 북진통일론은 미군철수 상황을 맞아 북한의 남침의도를 저지하고 미국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억제전략이었다. 하지만 억제전략이 의미를 가지려면 실제 전력이 바탕이 돼야한다. 당시 우리 군에는 전차 1대 조차 없없다. 북진은 커녕 북한의 남침조차 막을 수 없었다. 북진통일론은 '비현실적 공갈'이었던 셈이다.
미국은 휴전 후 2개의 보병사단이 중심이 된 지상군과 1개 비행단으로 구성된 공군, 그리고 해군부대를 한국 내에 주둔시켰다. 휴전선을 미국이 직접 막아서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1955년부터는 미국의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10개의 예비사단을 창설해 63만명의 병력규모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원조는 1954년 5억300만달러(5465억원)에서 꾸준히 감소해 1967년에는 최저치인 1억5400만달러(1673억원)까지 줄었다.
◆자주국방의 시작
미국 의존도가 높은 국방은 부작용을 낳았다. 미국이 조금이라도 전력을 덜어내면 국방이 그만큼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닉슨 독트린이다. 베트남전에 질려버린 닉슨 행정부는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가 스스로 해야한다는 새 안보정책을 발표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7사단 철수를 막기 위해 베트남 파병을 했지만 미국은 1970년 초반 기어이 7사단을 철수했고, 1971년 3월 10일부로 휴전선에 배치한 미 제2사단 주력을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우리 군이 휴전선 모든 전선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행위는 일종의 배신과 같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M16소총 제조를 위해 부산에 건설한 국방부 '조병창'이다. 스스로 무기체계를 개발하기 위해 국방과학연구소를 만들었고, 국산 방산시범사업으로 번개사업도 시작됐다. 전반적인 준비가 끝나자 1974년부터는 본격적인 자주국방력 건설을 위한 율곡사업이 시작됐다.
정부는 국내 기업의 방위산업 참가를 독려했다. '방위산업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시행된 후 창원기계공업단지는 방위산업의 집결지가 됐다. 1972년에는 29개의 방위사업체가 지정되면서 그 수가 점점 늘었다. 한국화약주식회사(한화), 금성정밀공업(現 LIG넥스원), 삼성정밀산업(現 한화지상방산), 현대중공업, 삼성항공(現 한화시스템), 한국기계공업(現 한화디펜스), 현대조선중공업 철도차량사업부(現 현대로템), 한국중공업(現 한화지상방산), 풍산 등 유수의 대기업이 방위산업체를 출범시켰고, 현재까지 이어지며 한국 방위산업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국가주도의 급격한 성장
1970년대 방위산업의 목표는 국산무기 만들기였다. 능력이 부족하면 과감히 해외기술을 도입해 면허 생산했다. 1980년대에 들어 제2차 율곡사업이 추진되면서 세계 방산트렌드에 뒤떨어지지 않는 '쓸만한 국산 무기체계'를 속속 구성했다. K1·K2 소총이나 K200 장갑차 등 우리의 전술적 상황을 반영한 독창적 무기체계가 나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술이 부족했던 K1 한국형 전차(ROKIT)는 해외업체(미 클라이슬러 디펜스)에 세부설계를 맡기고 생산은 국내에서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K-55 자주포도 미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생산했다.
비록 기술소유권은 미국이 통제하는 형식이었지만 구체적인 설계 및 통합경험이 부족한 가운데 이런 과감한 접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제3차 율곡사업은 부패의 상징이기도 했다. 1993년 5월 창군 이래 최초 실시된 감사원의 특별감사를 통해 수많은 지적사항이 도출됐고, 여론에 의해 '비리사업'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또 국방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혼란스러운 시기가 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민주적 정권이양 이후 세계적으로 독일 통일, 소련의 약화 및 붕괴라는 커다란 사건이 잇달았다. 특히 1993년 시작된 '하나회 숙청' 등 굵직한 사건은 군에도 영향을 끼쳤다. 자주국방의 의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전력증강의 비전·목표·전략이 모호해지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율곡사업은 북한군에 대한 재래전력 열세를 극복하는 성과를 거뒀다. 애초 경제력 자체가 비교될 수 없었다. 방위사업은 든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력정비사업(1992년~1996년), 방위력개선사업(1997년~1998년), 획득사업(1999년~2001년)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꾸준히 추진됐다.
특히 이 시기는 재래식 기본병기의 수요가 감소하면서 해외수출은 부진한 가운데, 고도의 첨단무기를 필요로 하는 삼중고를 극복해야했다. 이 과정에서 1993년 '방위산업 물자와 방위산업체의 전문화 및 계열화 규정'이 제정됐다. 이에 전문화 2개, 계열화 1개 업체를 지정해 제한적 경쟁체제를 유지하게 했다.
게다가 1997년 초유의 IMF 사태를 맞으면서 방위사업 규모자체가 줄었다. 방산업계 전체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방위사업청의 순작용과 부작용
이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 방위사업청이다. 2000년대에 들어 군납비리 등이 문제가 되자 정부는 2004년 민관합동위원회를 구성해 방위사업구조를 재점검하고 국방획득제도 개선방안을 제시했다. 더 이상 조달본부 시절의 부조리와 부패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후 방위사업법이 2006년 1월 제정되면서 방위사업청이 출범했다.
공무원의 존재의미는 효율성 때문이 아니다. 다만 방산업계는 비리집단이라는 투의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 아무런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구조가 돼 버렸다. 결국 방사청의 정책결정 과정은 법과 규정에 따른 기계적인 것이 됐다.
최근 뉴스에는 방위사업청의 부당한 판단에 대한 업체의 소송이 줄을 잇고 법원에서 인용하는 경우가 반복된다. 법원은 방사청이 부당제재를 했다며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 373억원을 지급하라고 권고했다. 수리온 개발과정에서 업체들이 선투자를 한 후 회수를 위해 KAI가 물품대금에 이를 포함시킨 것을 방사청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결정에 대해서도 인정하기 어려워 졌다. 일단 처분을 내린 공무부서로서는 이를 되돌린다는 것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러다보니 법원이 잘못된 판단으로 돌려주라는 결정을 내려도 반환하지 않고 버티는 행태까지 있다.
최근에는 더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원가검증과정에서 방위사업청이 검증에 실패한 내용을 체계통합업체가 스스로 찾아내 신고했으나 이것이 독이 됐다. 방사청은 협력업체 잘못을 두고 체계 전체의 부정으로 판단하고 부당업체 제재에 나섰다. 방사청은 협력업체 실수와 잘못까지 체계통합업체가 짊어지게 했다. 이렇게 되면 업체는 추후사업에서 무려 474억원의 불이익을 받게 될 예정이다.
애초 문제가 됐던 부당이득금 1400만원을 환수하고, 가산금 700만원 제재를 가했지만 실제로는 제재 금액 700만원의 6700배에 해당하는 474억원을 부담하게 된 것이다. 현재 해당업체는 행정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 입찰 자격을 유지한 상태다.
현 방위산업의 문제는 방위사업청의 개청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구조적 문제다. 애초 대한민국에서 방위산업이 시작될 당시 대기업과 정부사이 합의가 있었다.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방위산업에 기업이 투자하는 대신, 정부는 다른 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가 탱크를 만들겠다고 결심하자 정부는 열차 생산 독점권을 줬다. 특히 1970년대 방위산업 탄생 후에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국가차원의 계획경제와 정치지도자의 직접적인 관심이 컸다. 애초 제2경제수석실이 청와대에 생기면서 국가 수뇌부가 직접 관심을 가지고 챙긴 일이다.
물론 당시 시대상은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생각하기 어렵고, 개혁적 성향이 존재했다. 전력건설 과정에서 이미 1970년대 후반에 무인포탑전차나 항공모함까지 검토되기도 했다. 국방개혁을 이끌 수 있는 브레인과 개혁적 성향, 또 미군이 철수할 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의한 개혁동력이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추동력이 요구된다.
이명박 정부는 방위산업에 대해 기이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은 '리베이트만 없애도 국방예산의 20%가 절감된다'며 방위산업 전반을 압박했다.
방위산업 전문화·계열화를 폐지시켜 보호육성에서 완전경쟁체제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방산비리를 뿌리뽑는다면서 감사와 수사의 강도는 높였다. 심지어 나사값 하나까지 통제하겠다며 원가산정까지 방사청에 맡겼다. 게다가 지난 정권에서 '방산비리는 이적행위'라는 단순명확한 명제 속에 마녀사냥에 가까울 정도로 여론에 휘둘렸다.
하지만 실제 방위사업의 부정은 상당 수 외국계 방산업체의 국내에이전트나 대리점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방위산업은 위축됐다. 2014년 36억달러(3조9100억원)을 넘어섰던 방산수출총액은 2016년에는 25억달러(2조7200억원)으로 무려 3분의 1이나 줄었다. 정치적 이슈 싸움 속에 우리 국방이 희생되고 있는 셈이다.
현재 청와대에는 방위산업을 통괄하고 리더쉽을 발휘할 조직이나 보직조차 없다. 물론 과거 정부도 그랬다. 그간 방위산업계는 나라를 지킬 무기체계를 만들어 우리 군에 제공하고 힘겹게 수출했다. 성과만 요구하고 관심과 지원은 없는 리더십이야말로 적폐다. 국방리더십의 개혁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은 서울대 법대와 국방대학교 국방관리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방부·방사청·합참 정책자문위원을 겸하고 있는 군사컨설팅기업 AWIC(주)의 대표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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