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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 및 안견의 몽유도원도 생존 내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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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416회 작성일 2014-07-03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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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한준구는
몇년전,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 전시실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제독)의 실제 위엄용으로 갖고 있던
큰 칼의 위용에 놀라웠고
함께 전시되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를 한참동안 바라보면서
추사 선생의 그 예술가로서의 위대함에도 한동안 세한도 앞에서
그 작품의 품은 뜻을
숙연하게 생각해 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일본에 빼앗겼던 우리의 적지않은 문화재가
미국의 일본 공습 와중에 잿더미로 변했던 것도 적지 않았음을 생각하니
우리 조상들의 무능함에 백성이 이은 문화재의 피해도 이어짐에
마음이 지금도 매우 아픔니다.
**********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 그림도 저 한준구는
오래전 서울의 호암 미술관에서
그리고, 몇년전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일본의 덴리대학(천리대학)의 배려(?)로
우리가 구걸하다시피하여
빌려다가 잠시 보곤
그들이 가져가면서
앞으로는
한국 중앙국립박물관에
다시는 빌려주는 일이 없을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 귀중한 것을
함부로(?) 해외 반출을 하기 어렵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
그 안견의 몽유도원도 그 위대한 그림도
아래에 해설되는 세한도 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초의 적지않은 정난속에서도 살아남았고
긴 세월이 지나
해방(광복)이후
일본인 소유의 그 몽유도원도가
잠시 부산에 가져와
당시 돈으론 엄청난 금액인
5천달러에 매매가가 형성되었으나
당시 서울에 계시던 간송 전형필선생이 미처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만일 그 소식에 접했다면?
늘 高價에 적절한(?) 가격을 주시던
평소의 전형필선생이
그 몽유도원도를 필시
100% 사셨을 것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고
다시 세월이 흘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수십만명이 몇시간씩 줄을 서면서
그 그림을 몇초에서 몇십초보고
인파에 밀려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리던
몇년 전 그 당시의 수많은 인파를 지금 다시 떠 올리면서
다시 만감이 교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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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섭의 그림 보기] 세한도 권돈인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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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세한도 170년 만
국보 세한도 170년 만의 제주 귀환 '눈길'
제주일보 2014.05.26 (월) 오후 3:46
그린 세한도.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ㆍ1844년 작)가 170년... 준 세한도를 그려줬다. 세한이란 아주 추운 겨울날씨를 의미하며... 손씨는 2011년 세한도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했다. 기탁은 기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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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In&Out]
外勢에 빼앗겼다 돌아온 우리 문화재 ^^사연들!
조선 문인화 최고 걸작 ^^‘세한도’
서예가 손재형이 없었다면?
폭격 맞아 사라졌을 것?
일제가 패망을 앞둔 1944년,
도쿄는 계속된 공습으로 아수라장이었다.
41세의 중년 신사 손재형(1903~1981)
병석에 누워 있던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를 찾아
도쿄로 건너간 것도 이즈음이었다.
후지쓰카
‘추사 김정희에 미쳐 있다’고 할 만큼
추사의 금석학과 예술, 청나라 경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됐던 ‘세한도’. ">
‘서예’라는 용어를 만든 서예가 손재형은
첫 만남에서 후지쓰카에게 아무 말 없이 인사만 하고 돌아왔다.
하루에도 수차례 공습경보가 이어졌지만
문안은 계속됐고,
일주일 뒤 후지쓰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눈을 감기 전에 내놓을 수 없으나 세상을 뜰 때 아들에게 유언을 해 보내 줄 터이다.”
손재형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서화는
조선시대 문인화의 최고 걸작인
추사의 ‘세한도’.
소나무와 잣나무가 어울린 조촐한 집과 추사체를 담은 그림이다.
제주로 유배를 떠난 추사가
1844년
역관인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 줬다.
이상적은
청나라를 방문해
세한도에
16명의 학자로부터 글을 받아
두루마리로 표구했는데,
이렇게 엮인 글과 그림의 길이가 14m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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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한도는
기구한 운명을 지녔다.
이상적이 죽은 뒤
제자였던 김병선과 아들 김준학에게
차례로 넘겨진 작품은
이어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의 손에 들어갔다.
아들 민규식은
구한말 경성제대 교수였던 후지쓰카에게 양도했고,
후지쓰카는 퇴임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손재형이 이를 찾아왔으나 이후
큰 빚을 지고 사채업자에게 넘겼고,
돌고 돌아
지금은 미술품 소장가인 손창근이 갖고 있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찾아온 지 석 달쯤 지나
후지쓰카의 서재가 폭격을 맞아 소장품이 전소됐으니,
세한도는 기적적으로 질긴 삶을 이어 오고 있는 셈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현재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15만여점,
일본에 6만 6000여점이 남아 있다.
불법 반출된 문화재의 반환을 규정한
유네스코협약이나 국제박물관협의회의 윤리강령이 있으나
‘빛 좋은 개살구’일 따름이다.
우리가 1965년 6월 일본과 맺은 한일협정이 큰 걸림돌이다.
일본은 4개의 부속협정 중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1432점만 돌려준 뒤
공식적으로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오구라 컬렉션과 같이 도굴·도난당한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는 동안
20년간의 협상 끝에
외규장각 의궤 등이
민간의 도움을 받아 속속 돌아왔다.
안휘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교수부터 성직자, 교포, 외국인, 시민까지 수많은 사람이 힘을 보탰다”면서
“문화재 반환은 결과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재단은 최근 이 같은 이야기를 모아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란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예컨대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모은
1만 9000여점의 데라우치문고 중
1995점은 문고를 관리하는 야마구치현과
자매결연 관계인
경상남도의 노력으로
1996년 돌아왔다.
창덕궁 선정전 앞의 용모양 매화나무인 ‘와룡매’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센다이번 영주인
다테 마사무네에게 뽑혀
일본으로 갔으나
400여년 만인
1999년 접목해 얻은
후계목들이
서울 남산의 안중근기념관 앞으로 돌아왔다.

국가 주도의 문화재 환수와 활용이 어떻게 민간과
조화를 이뤄야 하는지는 여전히 큰 의문이자 과제다. 환수 이야기가 단순한 무용담에 그치지 않고 소중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선 보다 합리적인 토론과 공론화가 필요해 보인다.

@+서울신문사측 및 문화전문 ^^오상도 기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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