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島^참사랑-천리안-독도사랑동호회 지금은 현지-울릉도,독도 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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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428회 작성일 2014-05-20 01:53본문
그때 내가 알던 건 '독도는 우리 땅'
노래뿐
… 日 망언 때도 그저 시위만"
- 최보식
- 편집국
- E-mail : congchi@chosun.com
- 선임기자
- 선임기자
- 미국 조지워싱턴대 객원연구원
[PC통신 천리안 '독도사랑동호회' 만들었던…
김윤배 '울릉도 독도 해양 연구기지' 연구팀장]
"1900년대 초엔 강치가 독도에 수만 마리나 서식했죠
수온 상승 인한 먹이 감소 탓인지
"독도에 세울 '무인 해양 관측탑'
다 만들었으니 옮기면 되죠
하지만 외교부가 난색, 문화재청도 나서서 반대해"
2005년 일본 시마네현(縣)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했을 때 이에 경상북도가 '울릉도 독도 해양 연구기지' 건립 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 김윤배 박사는“옛날 울릉도에는 멀리 떨어진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았다”고 말했다. /울릉도=최보식 기자
"들끓는 여론으로 처음에는
각광을 받았지요.
하지만 다 그렇듯이 세월이 지나면
흐지부지해집니다.
예산 문제로 좌초 위기까지 갔어요.
공사업체는 부도가 났고…."
2년 전에도 낡은 구두에 점퍼 차림인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울릉도 도동읍의 여관에서 혼자 숙식하며 고투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짓다가 멈춰버린 연구기지 현장을 내게 안내했다.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연구기지의 존재를 기억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건축 현장 용어로 '타절준공'이라는데 미완성 상태에서 공사를 마쳤어요. 그 뒤에도 운영비를 어디서 대느냐로 진통을 겪다가 지난 3월 29일 현판식을 했어요. 해양 연구기지이지만 아직 연구선(船)도 없어요."
―김 박사가 기지대장을 맡을 줄 알았는데.
"해양과학기술원 안에서는 제게 기지대장을 맡으라는 말도 나왔어요. 하지만 제가 양보하면 그만큼 좋은 분을 모셔올 수가 있어요. 자녀 교육이나 의료 문제 때문에 울릉도에 안 들어오려고 하거든요. 울릉도 전체에 박사(博士)가 딱 3명 있어요. 모두 우리 연구기지에 있어요."
대학원 시절 PC통신 천리안에 '독도사랑동호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맡은 게 그였다.
장터목 산장에서 일본 대학생을 만났어요. 한국말을 제법 했어요. 경기도 광주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에 가봤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내가 일본인을 대표하지 않지만 정말 사죄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 그가 독도 문제가 나오자 전혀
달랐어요. 독도가 왜 일본 영토인지를 설명하는 겁니다. 저는 반박 논리가 없었어요."
그는 장터목 산장에서의 일화를 PC통신 천리안에 올렸다. 처음 다섯 명이 댓글을 달고 '독도 공부 모임을 만들자'며 의기투합했다. 그 일본인 학생이 가봤다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1998년 1월 창립 모임을 했다. 여기서 만난 여성 회원이 지금 그의 부인이 됐다.
"한·일 양국이 마주 보는 동해와 남해의 폭은 모두 400해리 미만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점은 울릉도가 됐다. 독도 인근 해상은 '중간수역(공동관리수역)'으로 정하고, 이 수역 안에서는 한·일간 협의에 의해 어업 쿼터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이는 명백하게 독도의 배타적 주권을 훼손했다'는 쪽과 '중간수역은 배타적 경제수역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독도와 12해리 영해(領海)는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니다. 따라서 독도 주권을 훼손한 게 아니다'는 쪽으로 갈렸어요."
―협상 대표들이 '독도를 팔아먹겠다'는 마음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고.
"IMF가 터지고 난 직후에 협정이 체결됐어요. 일본에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협상 준비 과정이 너무 아쉬웠어요. 테이블에 앉았던 우리 협상 대표들은 그쪽 수역에서 우리 어선들이 얼마나 조업하는지 몰랐고, 해도(海圖)도 제대로 이해 못 했다는 말이 나왔으니까요."
―'중간수역' 개념을 도입하지 않고 양국 간에 타결이 가능했을까요?
"글쎄요. 당시 김대중 정부를 옹호한 한 특정 신문은 '더 이상 협정을 미루면 양국 어업 질서에 혼란이 온다. 조속히 체결해야 한다'고 했어요.
ㄴ.독도박물관에 대한 지원 촉구,
ㄷ.독도 사진전시회 등을 벌였다.
그런 그에게 이듬해인 2000년 1월 1일 정부가 '새 천년 해맞이 행사 장소'에서 독도를 뺀 것은 참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전국 대학생들의 독도 탐사를 진행했어요, 당시 울릉도~독도를 운항하는 정기 여객선이 없었어요. 울릉도에서 대학생 4명과 사회단체 회원들이 어선을 타고 들어갔어요. 하지만 입도(入島) 승인을 사전에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도경비대에 의해 쫓겨났어요."
- 신 한일어업협정 뒤 수역도.
"물리적 충돌 상황으로 가지 않으려면 국제사회에서 우리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을 더 많이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분은 '내가 이렇게 동해 명칭 관련 자료와 독도 지도를 모으는 것은 일본과 물리적 전쟁을 막고 세계만방에 우리 입장을 지지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해양 연구기지를 설치하고 독도 인근 수역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하고 좋은 논문을 쓰는 것도 그런 활동이지요."
"1900년대 초에는 수만 마리의 독도 강치가 서식했던 걸로 봅니다. 일본의 한 수산 회사가 1904년부터 8년 동안 약 1만4000마리의 강치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그런 남획 때문인지, 수온 상승 등에 따른 먹이의 감소 때문인지 지금은 사실상 멸종 상태입니다. 간헐적으로 물개·물범 등은 관측되기는 합니다. "
―'강치 복원 프로젝트'를 하는 걸로 들었는데.
"해양수산부에서 올해 대통령 업무 보고에서 '독도 물개 복원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지요. 국내 동물원에서 있는 캘리포니아 바다사자를 이곳으로 옮겨오거나 유사 해양동물들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소규모 바다 목장을 조성하는 계획이 포함돼 있지요."
- 조선일보 1963년 8월 11일자.
"독도 인근의 해양·기상·환경·지진해일 정보를 수집할 목적으로 지난 2009년부터 추진됐지요. 이미 다 만들어놓았고 옮기면 됐습니다.
"강진에 유배온 다산 정약용의 '탐진어가'에도
"1882년 이규원 감찰사 일행이 울릉도에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 간에 마찰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와 고종의 명을 받고 감찰하러 온 적이 있었지요.
세월호 참사로 미뤄뒀다가 영토 분쟁을 촉발해온 아베 총리의 '집단 자위권' 선언을 보고 이 글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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