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21일 아시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 결승리그 첫 경기인 한일전에서 한국팀의 승리를 보도한 <경향신문>. 경향신문 갈무리 |
[토요판] 내 가슴 속 명승부
⑤ 1979년 아시아 남자배구대회 한-일전
1979년 12월12일 한강대교에서의 총격전으로 전두환 정권의 출발을 알린 그날. 나는 김포공항을 출발해 바레인으로 첫 해외출장길에 올랐다. 동양방송(TBC)의 아나운서였던 나는 ‘관민영합동방송단’의 일원으로 한국방송(KBS)의 정기채 아나운서와 함께 입사 10년 만에 해외출장에 나서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71년 고교야구 중계방송을 시작해 입사 10년이 됐으나 그때까지 나는 전국체전 각 종목 이외에는 야구 중계 하나에만 몰두할 때였다. 배구 중계는 생소했고 그것도 국내 경기가 아닌 해외 국제경기로 첫 중계방송을 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나의 첫 중계방송인 제2회 아시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 4강리그전 일본과의 경기는 극적으로 3 대 2 역전승하며 나와 배구와의 인연이 숙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게 된다. 맹활약 청소년 대표팀과 달리
1962년부터 일본에 9전9패 당한
성인 배구팀 숙원은 ‘타도 일본’
1979년 12월21일 운명의 날에도
1·2세트 연속으로 지고 있었다
3·4세트 승리뒤 맞이한 5세트
일본 몰아붙여 15 대 7로 승리
새벽까지 라디오 듣던 사람들
우승이라도 한듯 기뻐했고
해설자도 엉엉 울고만 있었다
아시아 만년 3위를 하던 시절 1970년대 후반 우리나라 남자배구는 청소년 대표팀의 맹활약으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뒤, 1979년 스물세 나라가 참가한 멕시코 청소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일본과 쿠바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며 성인 배구의 밝은 앞날을 기대하게 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는 성인배구에서는 일본에 9전 9패를 당해 ‘타도 일본’이 숙원이었다. 운명의 날인 1979년 12월21일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시 외곽 뉴스포츠홀에서 우리나라는 숙적 일본과의 결승리그 첫 경기를 치르기 시작했다. 예선을 거쳐 결승리그에 올라온 팀은 중공(중국), 일본, 호주, 한국의 4강이었고 한국은 아시아에서 만년 3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나라는 박진관 감독과 유석철 코치 아래 이인, 강만수, 강두태, 차주현, 김호철, 세터 엄한주, 장윤창 주축에 김화선, 정강섭, 이희완, 박관덕, 정의탁 등 12명의 선수로 구성되었고 일본은 노장 오코를 비롯해 신구 조화를 이루며 세대교체 중이었다. 중공은 지난 국제대회에서 이긴 적이 있었기에 은근히 우승을 노리고 있었으나 난적 일본이 문제였다. 일본에는 1962년 4회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3 대 1로 패한 이래 올림픽 등에서 9연패를 당해 우리나라는 일본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다. 심지어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우리는 4위를 차지했으나 당시 11위였던 일본에 3 대 1로 패했고,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하긴 했지만 일본에 3 대 2로 패해 동률이 된 다음 세트득실차에 의해 금메달을 차지했을 뿐이었다. 현지시각 오후 4시. 우리나라 시각 밤 12시. 제2회 아시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경기가 시작됐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바레인 교민회장 구연묵씨가 해설을 했고 나는 한국방송 정기채 선배와 함께 한 세트씩 나누어 중계를 시작했다. 1세트 15-11, 2세트 15-8로 패해 ‘아! 역시 일본에는 안 되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3세트부터 우리나라는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4세트까지는 서브권을 갖고 있을 때 공격이 성공해야만 득점이 가능한 사이드아웃제도였고 5세트는 지금과 같은 ‘랠리포인트 시스템’이었는데 3세트 초반 강만수의 강타와 이인, 장윤창의 블로킹으로 순식간에 7 대 0으로 달아났다. 결국 15 대 9로 승리해 우리가 세트 스코어 1 대 2로 일본을 쫓기 시작했다. 4세트는 정말 숨막히는 열전이었다 우리는 이 세트에서 지면 10번 연속 한번도 일본을 이기지 못하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될 예정이었고, 이기면 마지막 세트까지 몰고가 역전승을 노릴 수 있기에 사력을 다한 경기가 펼쳐졌다. 4세트 다섯번의 동점, 네번의 역전이 오가는 등 숨가쁜 고비를 넘긴 끝에 드디어 15 대 11로 승리했다. 중동 건설노동자 500명의 함성 결국 운명의 5세트를 맞이했다. 국내에서는 새벽 2시이긴 해도 모처럼의 국제경기에다가 한일전이었기에 국민들이 잠 못 이루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고 들었다. 5세트 초반 사기가 떨어진 일본을 몰아붙이며 초반 10 대 1까지 리드해 끝내 15 대 7로 승리했다. 2시간30분의 열전은 해피엔딩으로 끝났고 우리나라는 9전 10기를 달성했다. 드디어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승리를 거두는 순간 우리나라는 우승을 한 듯 기뻐했고 2000명을 수용하는 마나마 뉴스포츠홀은 500명 건설역군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소리 높여 부르는 애국가와 태극기의 물결로 장관을 이루었다. 당시 중동은 50도의 더위와 사막밖에 없다고 알려진 극한의 현장이었다. 이날의 승리는 해외 동포들의 모든 고난을 한방에 날려보내는 청량제였다. 승리의 순간 해설자인 구연묵 회장은 일본을 이겨 자기의 한과 소원을 풀었다며 해설은 안 하고 엉엉 울고만 있었기에 그 순간은 더욱 값진 모습이었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명승부로 기억한다. 스포츠아나운서로 활약한 지 어느새 44년이 되었다. 지금까지 중계방송한 경기도 4000건을 넘겼고 올림픽 현지 중계 6번, 아시안게임 5번 등 우리나라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는 감격적인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중계했다. 국민과 함께한 이 많은 시간들은 나에게는 행운이었고 보람이었으며 나는 너무나도 운좋고 행복한 스포츠캐스터였다.
유수호 전 한국방송 아나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