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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未完의 혁명-+김주열 열사 가족이 ^빨갱이-金九와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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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976회 작성일 2014-04-20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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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학생-시민-혁명 50돐을 기억합시다!
1.지금부터 50년전인 1960년 4월19일, 꽃다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제단에 숭고한 피를 뿌렸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질식해 가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되살아날 수 있었다.
2.이듬해인 61년 5.16군사 쿠데타로 인해 비록 미완의 혁명에 그쳤지만 그 정신만은 1980년의 5.18 광주 항쟁, 87년 6월 항쟁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3.위대한 4.19학생-시민 혁명은 이승만 독재 체제에 대한 총체적인 항거였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 관료와 경찰 세력이 정권의 핵심을 이룸으로써 출범 당시부터 비민주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4.이승만 정권이 48년 8월15일에 출발하여 적지않은 각종선거 부정 및 수많은 부패등으로 거의 11년 8개월 안팎이 지난 시점에서의 4월은 야당과 국민의 반대가 심해지자 경찰력을 동원한 강압통치를 강행하는 가 하면
5.소위'4,4오입' 개헌등으로 권위주의적 통치와 국민 압박을 강행해 나가던 차 이로 인한 국민 불만이 누적되어
1960년의 3.15부정 선거 및 마산의 김주열 학생의 주검의 참혹한 모습이 알려지자, 한꺼번에 폭발하여 이승만 독재 정권을 종식시켰던 것이다.
6.4.19혁명은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누릴 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음을 세계에 알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승만 정권 아래서 민주주의의 본질인 사상,언론,집회의 자유는 물론 삼권 분립 등 정치적 민주주의가 철저히 파괴됐다.
7.이렇게 유린된 민주주의는 저절로 회복되지는 않는 법이다. 외세나 위정자들이 나서서 되찾아주지도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학생과 시민들은 묵숨까지 바쳐가며 민주주의를 쟁휘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를 향유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8.하지만, 4.19학생-시민 혁명 50돐을 맞는 오늘, 우리는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퇴행에 직면해 있다. ]
이명박 정권의 출범 이후 자신들의 이익 챙기기에 혈안이 된 기득권층과 그 주변 세력이 우리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해 가고 있는 것이다.
9.정치 영역 뿐 아니라 사회,경제,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민주적 절차는 무시되고 '촛불 집회'등 반대 목소리는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억압받는다. 6월항쟁이후 자리를 잡아가던 민주주의적 규범과 절차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10.민주주의의 퇴행이 거론되는 이런 현실이 민주주의를 회생시킨 4.19혁명 정신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11.4.19혁명은 아무리 사회가 다양화하고 사회경제적 이해 관계가 복잡하더라도 결코 양보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가치가 민주주의임을 보여준다.
12.그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며 목숨까지 바쳐 민주주의를 지킨 4.19혁명 희생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위의 내용은 2010년4월19일자 한겨레 신문의 사설임을 밝힘니다.
@@@@
다음은 우리 시대의 양심적인 학자인 성공회대학교의
김동춘 교수의 4.19혁명 관련 기고문입니다.
1.위협공포를 쏘아도 될 것을 함부로 무차별 사격을 하고, 중학생이 총을 맞아 쓰러진 것을 뛰어 들어가 구하려는 사람에게까지 총을 쏘았다.
2.소방차를 정차시키지도 않고 일렬로 서서 일제 사격을 하였으며 마치 전쟁일선에서 공산군을 향해 쏘는 듯한 광경이었다.
3.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 국민은 '敵'이었고
진압 토벌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풍경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1948년 건국 이후 계속된 일이었고 그 선봉에는 언제나 일제 식민통치의 주구 노릇을 했던 경찰과 우익 폭력세력이 있었다.
4.제주 4.3사건-저 한준구의 바로 이전 글 참조요망!
그리고, 여수순천 사건-전쟁 발발 직후 국민보도연맹사건,부역자 희생사건등
가혹한 일제 식민통치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해방된 조국의 자유로운 공기를 맛보려 했던 백성들 수십만 명이 이승만 정권하에서 좌익, 빨치산 반정부인사로 몰려 살해되거나 고문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다.(그중에는 물론 진짜
빨갱이도 적지 않았겠지만 많은 수의 양민 즉 민간인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시켜주어야 하지 않을 까?-필자주)
5.국가보안법은 날치기로 통과되었고, 야당 국회의원은 수사사찰기관의 협박을 받았으며,
대통령 후보 였던 조봉암은 간첩 혐의를 받아 사법살인으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려졌고, 이런 사법부는 정권에 굴종했으며, 비판 신문은 강제 폐간되었으며, 선거 때마다 공무원이 정권의 수족(하수인)이 되었다.
양심과 정의감을 갖고 잇었던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은 일제 식민지하에서도 이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6.그런 암흑 천지에 어린 학생들이 일어나 김수영 시인이 노래했듯이,
"전국의 초등학교란 모든 초등학교에서, 그리고,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던" 대통령의 사진을 떼어 낸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7.이 혁명은 송건호 선생이 말하였듯
기성세대 즉, '利의 세대를 부끄럽게 만든 義의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거대한 신호탄이었다.'
8.이 혁명으로 우리 국민이 얻은 것은?
이승만 햐야가 아니라, 국민의 힘으로 독재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으며,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그리고, 직접 행동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를 얻을 수 없다는엄청난 교훈이었다.
그것은 국가를 진정한 민주국가, 국민의 국가, 인권국가로 만들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었다.
그래서, 4월혁명은 폭력국가, 불법국가,친일파 국가,경찰국가,속임수 국가를 자유와 민주주의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의 국가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9.그런데, 5.16군사 쿠데타 세력은 절차보다는 목적이,
정의보다는 빵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육법전서'를 달달 외운 사람들은 5.16자체의 탈법과 불법에 눈감고
'혁명재판소'의 요원으로 발탁되는 것을 영예롭게 여겼다.
10.이런 利의 세대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온 사회를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황금 만능주의와 친일잔존 세력의 후손이나 이들과 손잡은 근대화세력이 지배하는 등 한국정체성이 확립이 안된 사회에 먄연된 풍조로 인한 천민자본주의의 팽배-필자주)
11.그후 20년동안 한편으로는 군대가 시위대 진압을 하고 다른 편으로는 재벌 기업이 국민을 '매수'하면서 세상을 지배하였다.
12.4월혁명이 '未完의 革命' 이라는 말은?
'창자가 메마른'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나서지 못했다는 말일 것이다. 배고픈 국민들이 매수되기를 거부하고 진압에도 저항하면서 자유의 노래를 합창할 때 4월 혁명은 완수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나면 다른 아주 중요한 4.19논평들이 이어집니다 양해 요망함
한준구 올림
***************
이어집니다
@@제목: 다시보는 미완(未完)의 4.19 혁명(의거)!
1."데모하다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습니다.-- 중략--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2.지금부터 50년 전인 1960년 4.19혁명당시 미아리 시위
도중 총에 맞아 숨진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학생이 어머니에게
남긴 유서 내용이다.
3.이승만 정권은 시위대가 경무대까지 진출해 대통령의
하야(下野)를 요구하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에 발포했다.--당시 발포 명령을 내린 최인규 내무장관은 후일 이 책임을 물어 사형 언도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
4.이른바 '피의 화요일'이다.
그해 시위 도중 180여명이 숨지고 6,000 여명이 부상당했다 4.19 얼마전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참여하다 눈에 최루탄을 맞고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주검으로 떠올라 4.19혁명의 결정적 단초가 된
김주열 학생의 참혹한 얼굴 모습도 늘 이맘때면 떠올라 가슴을 저미게 하고
4.19와중의 수많은 부상자중 목발을 짚을 정도로 중상자였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 이후 국회에서 부상자 예우를 소홀히 한다고 단상에 올라가 시위를 한 사진이 지금도 옮긴이의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5.1948년 당시 74세로 정부수립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12년의 장기집권하던 86세의 노구의 이승만대통령은 일주일 뒤인 4월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도피성 망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시 상황에서의 망명 불가피성에 대한 미국의 설득과 주선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6.그 이후 이승만은 약 5년을 더 살다 90세안팎에 거의
천수를 누리고 유명을 달리한듯하다.
7.이제 4.19혁명의 50주년을 맞이한 요즈음, 각계에서
재조명 열기가 뜨겁다. 4.19혁명의 기폭제 역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묘비에는 이제야 '열사'라는 표현과 '민주화에 기여했다."내용이 최근 50년만에 새겨졌다.
8.이 미완의 혁명이라 불리기도 하는 4.19는 이듬해인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의거로 규정되었다가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됐다.
9.표면적으로는 가부장적 독재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저항이었다. 썩은 것을 도려내고 봄의 새싹이 돋는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10.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념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다.
11.시민으로서 개인을 발견한 것이다. 4.19직후 그의 소설 '광장' 및 그 소설의 주인공 이명준으로 50년간 유명해진 최인훈 작가는 말하길:
"4.19혁명은 최초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정신의 지각운동을 경험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2.같은 맥락에서 학계는 4.19혁명이 근대의식을 일깨워주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말하길:
"4.19혁명이 열어놓은 역사의 넓은 평원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람답게 되었다."고 단언한 바 있다.
13.흔히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공감할 만한 말도 아닌듯 하다.
14.'껍데기는 가라'의 그 유명한 故 신동엽시인
4.19 몇 달 뒤 발표한 '아사녀'에서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을 두고
젊음쳐 뒤를 이을 지어다." 라고 노래한 바 있다.
15.신동엽시인의 예감대로 4.19혁명의 동력은 그 후에도 우리 사회에 남아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16.4.19혁명은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혁명이다. 우리가 4.19정신을 가슴에 새겨둬야 하는 理由다
*** 위의 기고의 95%는 어느 신문 2010년4월19일자
박완규 논설위원의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다음은 4.19기폭제 김주열 열사의 친누나의 최근
소회(所懷)입니다.
@@제목: -- 4.19기폭제-- 김주열 열사의 가족은
빨갱이?
ㄱ.김주열 열사(1943년-60년)의 친누나인 김경자님(69세-서울 구로구 개봉동)은 2살 아래의 동생 故 김주열 열사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ㄴ.김주열 누님의 소회:
"주열이가 사망한 지 반백년 만인 지난 2010년4월11일 경남 마산시민 여러분이 범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러줘 올해 4.19혁명은 여느 해와 다르게 마음이 가볍고 기쁩니다.."
ㄷ.누님은 50년 前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이 떨린다고 한다. 부친 김재계님(사망), 어머니 권찬주님(사망)등 가족이 겪은 고통과 고충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ㄹ.누님은 아프디 아픈 기억을 말하길:
"1960년 3월15일 선거일은 마산상고 합격자 발표 날이
어서 주열이가 마산으로 갔는 데, 선거때문에 하루 연기되자 주열이는 兄 광열(사망)과 함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게 된 게 慘劇(참극)으로 연결됐다고 봅니다."
ㅁ.누님은 이어 말하길:
"광열 오빠가 다음 날 새벽까지 경찰에 쫓겨 산으로 도망갔다가 시위 도중 헤어진 동생 주열이를 찾지 못해 마산 이모할머니와 전북 남원 집에 알려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허사였습니다."
ㅂ."어머니가 20여 일간 '아들아! 아들아! 주열아 어디 잇는냐?'고 울부짖으며 병원과 거리 등을 헤매고 다녀 시민들도
주열이를 '마산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함께 찾아나섰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였다.
ㅅ.김주열 열사는 어머니가 고향 남원으로 돌아오던 날
인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屍身(시신)으로 떠올랐다.
ㅇ."경찰은 주열이의 시신이 안치된 마산도립병원에 가려는 부모님에게 '곧 남원으로 옮겨진다'며 막았는 데 사태가 악화되는 걸 차단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ㅈ.당시 경찰은 비가 쏟아지던 4월13일 밤
시민들과 야당 의원들이 지키고 있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다음날 새벽 남원에 도착해 장례를 치르게 했다.
ㅊ.김주열 열사의 부친께서는 6남매 중 4번째의 죽음에 심장병을 얻어 4년여 뒤인 1965년 고인이 되었다.
김주열의 모친께서는 아들과 남편까지 사망하자 집안을 정리하고는 서울로 이사했다.
ㅋ.김주열의 누님은 이어 말하길:
"동생 주열이의 죽음이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지만,
가족들은 빨갱이 소리도 들었습니다."라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였다.
"면장인 할아버지가 마을 주민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해 6.25전쟁 당시에도 소위 人共治下에서도 '타도'의 대상이 아니었고, 마을에서 오히려 공적비까지 세워줬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할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는 머슴을 3명이나 둘 정도로 부유한 편이었습니다."
"주열이가 머슴 일손을 종종 덜어준다고 한 번은 쇠죽을 쑤려고 가마솥 앞에 앉아 불을 때면서 책을 보다가 아버지한테 혼나기도 하였습니다."라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기특하였는 지!"하며 동생 자랑도 하였다.
ㅌ.부유했던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주열이는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은행에 취직해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하였는 데 김주열 학생은 마산 이모할머니 집에서 학교에 다닐 요량으로 마산상고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ㅍ.누님은 이어 말하길:
"민주화를 위해 산화하고도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는 분들의 멍예가 하루빨리 회복되고 숭고한 정신 또한 계승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인터뷰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위의 인터뷰 내용은 2010년 4월 19일자 세계일보
박찬준기자의 기고문임을 밝힙니다.
@@@다음은 故 김주열 열사 묘비석 제막식에 대한 내용입니다.(세계일보 2010년4월19일자 박종훈기자 보도 내용입니다)
ㄱ.전라북도 남원 즉, 김주열 열사(1943-1960)의 고향에서 50년 동안 없었던 '열사'라는 표현과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내용이 한글로 추가되었다.
ㄴ.2010년4월19일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묘역에서 누나 김경자씨를 비롯한 유족등이 참석한 가운데 남원시와 '남원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주관으로 기념식과 함께 새 묘비석 제막식이 열렸다.
ㄷ.김 열사의 묘비석에는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 집권으로 열사라는 표현을 쓰기가 어려웠고,
관심 부족, 예산 부족으로 '김주열지묘(金朱烈之墓)'라는 漢字만 새겨진 채 50년이 흘렀다.
ㄹ.남원시와 추모사업회는 2010년 3월부터 1억원을 들여 지름 2미터의 봉분을 5미터로 넓히는 등 묘역을 정비하고, 새 묘비석을 준비하였다. 봉분 옆 기존 자리에 놓이는 새 묘비석은 한글 '열사'가 추가돼 길이가 180센티로 30센티가 늘었다.
ㅁ.50년 前 장례 후 만든 木碑(목비)와 1964년 유진오 박사가 쓴 비석, 1994년 만든 비석 등 세 번의 묘비석에는 '열사'라는 글자가 없었다.
ㅂ.새 묘비석 정면에는 50년 동안 없었던 '열사'라는 표현을 추가해 한글로 '열사 김주열의 묘'라고 새겼고,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내용 등이 추가됐다.
ㅅ.나머지 3面에는 열사 이력과 3.15부정선거 항의 의거 상황, 훼손된 열사 시신 수습에 이은 4.19혁명 등이 900자 안팎 기술됐다.
ㅇ.특히, "1960년 4월11일 눈 부위에 최루탄이 박힌 열사의 시신 인양은 '열사 부활'이었고 그가 없었다면 4.19혁명이 없었을 것이다."는 등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짧은 논평: 결국 김주열 열사의 죽음도 이승만 장기 집권을 획책하던 이승만 측근에 1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승만도 90세에 하와이에서 죽어서 이승만 죽기 약 5년 전 당시 17세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김주열열사를 저 세상에서 만났다면 과연 사과를 하였을 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
이어집니다.

[왜냐면]

백범 김구의 ‘4·19북행’과 평화의 길 / 김삼웅

등록 : 2013.04.15 19:27수정 : 2013.04.15 19:27

우리 현대사에서 ‘4·19’는 두 차례의 아픈 사력을 간직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패러디하면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는 독재자 이승만을 타도한 4·19혁명은 접어두고, 1948년의 4·19를 생각한다. 아마 국민 다수는 1948년 4월19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 아침 백범 김구 선생은 아들 신과 비서 선우진을 대동하고 승용차 편으로 거처하던 경교장을 떠나 북행길에 올랐다. 400~500명의 군중이 길을 막자 백범은 간절히 호소했다. “내 나이 70이 넘었다.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분단될 것이고,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당시 평양에서는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와 남북요인 15인이 참석하는 정치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남북협상의 마지막 기회였다. 백범은 옛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김두봉의 집에서 열린, 남쪽의 김규식과 북쪽의 김일성, 집주인이 참여한 ‘4김회담’에 참석했다. 여기서는 △진정한 민주국가 건설 △사유재산제도의 인정 △통일중앙정부 수립 △외국군에 군사기지 불제공 △미·소 양군 철수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백범은 이 자리에서 뤼순에 있는 안중근 의사 유해 봉환, 소련군에 억류된 조만식 선생의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김일성은 항일투쟁의 대선배 백범을 깍듯이 모셨다. 당시 백범은 73살, 김일성은 37살이었다.
백범은 5월6일 서울로 돌아왔다. 마지막 남북협상은 남쪽의 극우세력과 미국, 북쪽의 극좌파세력과 소련에 의해 무산되고, 양쪽에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분단정권이 들어서면 반드시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던 백범의 ‘예언’은 어김없이 6·25전쟁으로 나타났다.
방북에 앞서 ‘3000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던 백범은 분단·친일세력에 의해 암살되고, 그의 노선은 긴 세월 색깔론과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정권은 남북 대결을 부추겼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으로 간신히 평화의 물꼬가 트이고 금강산과 개성공단이 열렸다. 그때부터 극우냉전세력은 ‘퍼주기’를 내세워 국민을 선동하고, 이명박 정권에서는 연평도 폭격 등 열전상태 그리고 박근혜 정권에서 전쟁 직전 사태를 맞게 되었다.
‘퍼주기’보다 몇백 배가 넘는 무기 수입과 ‘북한 고립’ 전략은 3차의 핵실험으로 나타나고, 남쪽 극우와 북쪽 극좌의 ‘적대공존’은 기득권을 확대하면서 전면전을 부추긴다.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정치인이 한다.”(클레망소) 정치인들이 남북 군인들의 전쟁 분위기를 막아야 한다. 아무려면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평양으로 달려가 동족상쟁을 막자고 설득하는 정치인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직업 국회의원’들의 작은 그릇을 개탄한다. 우세한 군사력과 국력으로 우리가 이긴다 쳐도 수백만이 죽고 국토가 파괴된 승전에 무슨 의미를 찾겠는가.
까치는 가장 바람이 세차게 불 때 집을 짓는다고 한다. 남북관계가 가장 어려울 때 평화의 길을 찾자. 65년 전 백범의 4·19 북행정신을 살리면서 6·15와 10·4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지켜나가면 한반도 ‘평화의 봄’이 가능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명박식의 몽매한 대북정책에서 뛰어넘길 기대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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