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특설대> 김효순 지음, 서해문집
펴냄 |
한 주를 여는 생각
간도
특설대 김효순 지음
서해문집 펴냄 ‘간도 특설대’의 항일 독립군 토벌 실상을 밝힌다 얼마 전 국군 첫 4성 장군에다 한국전쟁 때 평양에 가장 먼저 들어간 백선엽씨를 육군 명예원수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요란했다. 그 발목을 잡은 건 그가 간도 특설대 장교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간도 특설대가 뭐길래? 언론인 김효순의 <간도 특설대>는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든다. 간도 특설대가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세력을 ‘토벌·소탕’하던 일제의 특수부대가 아니냐는 질문에 특설대 출신자들은 흔히 “독립군은 구경도 하지 못했고, 토벌 대상은 ‘공비’나 ‘팔로군’이었을 뿐”이라고 얘기한단다. 이는 자가당착이다. 일제와 당시 친일신문 등이 ‘공비’, ‘비적’(도둑떼)으로 폄훼했던 이들이 바로 항일독립군이었다. 지은이는 중국에서 공인한 연변(옌볜) ‘항일 열사’ 3125명 가운데 조선인 비율이 98%나 됐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간도 특설대>는 특설대 장교와 만주군 연길(옌지)의 헌병분단 중위였던 백선엽씨의 창씨명이 백천의칙(白川義則)이었다는 사실도 당시의 일본인 연길 헌병분단장의 회고록을 인용해 밝히고 있다. 통상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읽히는 이 이름은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 숨진, 관동군사령관 및 육군대신을 역임하고 ‘상하이 사변’ 당시 파견군 사령관이던 바로 그 일본 육군대장 이름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간도 특설대 초기의 지휘부. 1930년대 초반 중국공산당 만주 전체 당원 중 거의 절반이 조선인이었고,
동만주 지구당원의 9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 특설대 창설은 이런 상황을 바꾸려는 일제 공작의 연장이었다.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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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 토벌’이라는 말이 항일 영령을 악귀처럼 내쫓아버리는 전능의 부적으로 사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이 책은 특정인, 특정 집단을 비난하거나 헐뜯으려고 쓴 것이 아니다.”
<간도 특설대>(서해문집 펴냄)의 지은이 김효순의 이 말은 이 책이 논쟁적이거나, 적어도
특정인들에게 매우 불편하거나 공세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얘기는 온건하고 합리적이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항일의 잣대를 일률적으로 들이밀어서는 안 된다. 항일 행위는 당사자의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집안의 파멸까지 초래했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 그런 고난의 길을 걷지 않았다고 모든 사람에게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니까 친일 문제는 덮어두자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는 게 현명하다는 얘기를 <간도
특설대>가 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항일운동의 반대쪽에 섰던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파렴치한 짓은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조선의용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김학철과 (일본 육군중장으로 출세했던) 홍사익을 같은 반열에 놓고 논할
수는 없다. 항일 무장부대와 간도 특설대도 마찬가지다. 간도 특설대가 민족의 자랑거리였느니, 민중의 편이었느니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공비 토벌’이라는 말이 항일 영령을 악귀처럼 내쫓아버리는 전능의 부적으로 사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
만주국 특수부대인 간도 특설대는
사병은 조선인, 부대장은 일본인으로
창설목적은 항일독립운동 ‘박멸’이다
사병들 상당수가 군관학교에 들어가
장교훈련을 받았다
백선엽, 박정희 등 수석졸업자에게
일본 육사 편입 기회가 주어졌다
1946년 미군 함정을 타고 귀국한
그들은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장, 총리, 국방장관이 된다 <간도 특설대>가 하고 싶은 얘기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기존 논쟁을 일단락짓겠다는 결기와 자신감이 엿보인다. 간도 특설대의 조선인 선임 지휘관이었던 김석범은 <만주국군지>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들 만주 군인 출신은 일제 탄압 하에서 조국 땅을 떠나 유서 깊은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한 혈맹의 동지들이다. 우리는 타향인 만주에서 철석같은 정신과 신념 밑에서 철석같은 훈련을 거듭하여 8·15 해방을 맞이했다.” 그들이 정말 독립정신과 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만주로 갔을까? 만주군은 일제가 1931년 만주를 침략한 다음해에 몰락한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꼭두각시로 앉혀 놓고 만든, 사실상 일본 관동군이 통치하던 만주괴뢰국의 군대다. 그 괴뢰국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일제는 2년제 펑톈 군관학교(중앙육군훈련처), 4년제 신징(신경) 육군군관학교를 만들었다. “일제는 많지 않은 병력으로 단시일 내에 만주를 제압하고 만주국을 세웠지만, 반일 무장세력의 끝없는 저항에 시달렸다. 그래서 각지에 관동군 수비대, 헌병대와 특무기관을 주둔시키고, 다양한 특무외곽조직, 경찰서, 분주소와 산림경찰대 등을 총동원해 치안숙정에 나섰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간도 특설대가 등장했다.” 간도 특설대는 하사관을 포함한 사병이 모두 조선인만으로 구성된, 이름 그대로 특별히 설치된 만주국 내 특수부대의 하나다. 장교(군관)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절반(1940년엔 각각 7명)씩 섞여 있었고 부대장은 일본인이었다. 본격적인 중국 본토 침략이 시작된 이듬해인 1938년 9월에 창설돼 일제 패망 때까지 7기에 걸쳐 약 690명 정도를 선발했다. 창설 목적은 치안숙정, 즉 반일 무장세력의 저항 분쇄, 항일독립운동 ‘박멸’ ‘토벌’이었다. 독립정신과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곳이 아니라 말살하는 곳이었다. 김석범은 “만주에 있던 많은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 가운데서 조선인 부대가 가장 강력했고 유명했다”고 했다. “일본군, 만주군이 못 해내는 작전을 간도 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던 것이다.” 일본인들도 간도 특설대를 ‘상승의 조선인 부대’라고 불렀단다. 독립운동세력을 그만큼 무자비하게 ‘소탕’했다는 얘기겠다. ‘철석같은 정신과 신념, 철석같은 훈련’은 김석범 얘기대로 8·15 해방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날려버릴 만주국 붕괴와 조선민족 해방은 그들에겐 실현돼선 안 될 악몽일 수 있었다. 펑톈·신징 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조선인들 중 다수가 간도 특설대 장교가 됐고, 간도 특설대 사병들 중에 상당수가 군관학교에 들어가 장교훈련을 받았다. 펑톈 군관학교 5기의 송석하, 9기 백선엽 그리고 신징 군관학교 1기의 박임항, 2기의 박정희, 4기 장은산, 5기 강문봉 등이 수석졸업자였으며 그들에겐 일본 육사 편입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의 ‘활약’ 덕인지 1940년대 중반 간도 등 만주 일대의 조선독립운동세력은 거의 궤멸된다. 거기에는 일제의 잔혹한 토벌·소탕 강화 외에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전술적 오류와 민족적 불신과 차별, 조선 민회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기득권세력 준동과 민생단 참변 등 여러 요소가 작용했다. 그럼에도 일제는 결국 패했다. 만주국은 해체됐으며, 간도 특설대 역시 해체됐다. 일본제국에 충성했던 만주군 출신들에게 그것은 악몽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1944년 8월 만주군 보병 8단으로 전속된 펑톈 군관학교 5기 신현준과 신장 군관학교 1기 이주일, 2기 박정희 중위는 그 1년 뒤 베이징으로 가서 일제 항복 뒤에 편성된 ‘해방 후 광복군’에 들어갔다. 이미 그 시절엔 간도 특설대 장교와 만주군의 다른 부서로 전속된 조선인 장교의 임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거의 예외 없이 팔로군 등 항일세력 토벌에 동원됐다. 따라서 박정희가 간도 특설대에 있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들은 1946년 5월 미군 함정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그런 식으로 속속 입국한 그들은 김석범이 자랑스레 얘기했듯이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초대 신현준부터 2대 김석범, 3대 김대식까지의 해병대 사령관이 모두 간도 특설대 출신), 군사령관,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가 돼 대한민국의 요직을 차지했다. 만주군 출신 친일 부역자들을 철저히 청산한 중국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을 ‘친일’의 악몽에서 구해 준 것은 한반도 분단과 미군의 점령, 그리고 전쟁과 냉전과 더불어 시작된 ‘반공주의’ 광풍이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그들의 토벌·소탕 대상이던 항일세력들 중에 많은 수가 북으로 간 것도 그들에겐 면죄부로 작용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