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건너와 다시 1000년의 시간 속으로… =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탑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이다. 신라의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로 알려진 백제의 무왕이 아내의 청으로 세운 거대한 탑.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전제할 것 한 가지. 여기서 미륵사지 석탑이라 함은 새 석조물처럼 멋대가리 없이
복원한 동탑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이겨 붙인 시멘트로 겨우 서 있던 서탑을 말하는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이 세워진 지 1370여 년 만인 2009년 1월 탑 해체과정에서 기단을 덮은 돌뚜껑 아래에서 백제시대의 사리가 나왔다. 지금껏 발견된 사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금으로 만든 항아리(사리호) 속에 작은 금항아리가 들어 있었고, 그 작은 항아리 속에 또
유리병이 있었다. 사리 13과는 유리병 안에 있었다. 성분
분석 결과 12과는 자수정이었고, 진짜 사리는 딱 하나. 그 하나의 사리를 담기 위해 백제는 거대한 절을 지었고 우람한 석탑을 세웠던 것이다.
웅장한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부흥의 꿈이었고, 석탑에서 나온 쌀알 크기의 진짜 사리는 그 꿈에 심은 하나의 씨앗이었다. 백제는 무왕의 왕위를 이은 의자왕 때 덧없이 망하고 말았지만, 그 씨앗은 발아하지 않은 채 시간을 건너와 지금 여기 눈앞에 실재한다. 과연 이 사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멀고 먼 서역의 땅에서 건너온 것일까, 아니면 평생 불법을 닦은 백제의 고승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것일까. 상상은 꼬리를 문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특별전’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사리였다. 전시관 한쪽 유리벽 안에 12과의 자수정 한가운데 작은 결정이 바로 석탑에 안치됐던 사리다. 사리가 전시된 유리 진열장에 코를 대고 오래도록 바라봤던 건 그 사리가 건너온 시간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제 다시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려 17년에 걸쳐 해체된 석탑을 다시 짜맞춰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되면서 백제의 사리는 다시 탑 안의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시 1000년 후에 세상에 나올 것인지, 아니면 영영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백제의 꿈으로, 무왕의 불국토의 기원으로 남게 될지 모를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사리가 복원이 끝나는 탑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적어도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는 그것으로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사리뿐만 아니다. 특별전에 전시된 30건 680여 점의 유물은 모두 환하게 빛난다. 사리를 담았던 금항아리의 섬세한 문양과 유려한 곡선에서 지금과 다를 것 없는 미감이 생생하다. 잘 다듬은 금제 구슬과 은제 장식, 유리 구슬들은 그게 지금의 것이었더라도 충분히 매혹적이다. 하나하나의 유물에서 깎고 다듬으며 정성껏 매만지던 백제 장인들의 지문이 묻어날 것 같다. 하나도 다치지 않은 채 시대를 관통하는 아름다움과 막막하고 덧없는 시간…. 사리장엄의 유물에서 만나는 건 이런 것들이다.
이번 특별전에서 공개되는 사리장엄은 발견되자마자 미륵사지를 떠나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여태 거기 있었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가 끝나고, 다시 석탑을 짜맞추는 복원작업이 시작되는 것을 계기로 이번 특별전이 기획됐다.
전시된 유물의 보험가는 175억 원. 익산시는 이 유물을 공개하느라 1500만 원이 넘는 보험금을 부담했다. 특별전이 끝나면 사리는 미륵사지 탑 속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유물들은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되돌아간다. 본래 제자리인 미륵사지전시관 대신 국립박물관이 유물보관청으로 지정된다면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셈이다. 다시 1000년이 넘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사리는 물론이거니와,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도 여기서 보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특별전은 오는 3월 말까지다. 그러니 여러모로 서두를 일이다.
# 백제 무왕이 꾸었던 불국토의 꿈을 찾아가다 = 백제 무왕이 미륵사지를 지은 내력은 삼국유사에 전한다. 백제 무왕이 누구던가. 마를 캐서 생활하던 몰락한 왕족 출신의 서동이 바로 무왕이다. 백제 법왕이 귀족과의 힘겨루기 끝에 재위 2년 만에 숨을 거두자 그 뒤를 이은 게 무왕이었다. 귀족들의 입김 속에서 기반세력 없이 왕위에 앉은 왕은 한시바삐 권위를 찾고 백성들의 염원을 모아야 했을 것이다. 미륵사지는 그래서 지어진 것이었으리라. 무왕은 거대한 탑을 품은 미륵사를 짓고 백성들에게 ‘미륵의 도래’라는 기대와 희망을 심어 주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삼국유사에 전하는 미륵사지 창건 내력을 들춰 보면 이렇다. “무왕이 어느 날 부인과 함께 미륵산의 절집 사자사에 향을 올리러 가다가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상을 발견한다. 가마를 멈추고 예를 올린 무왕은 ‘이곳에다 큰 절을 세우기 원한다’는 아내의 청을 허락한다. 사자사 주지인 지명법사에게 절 짓기를 청하자 신통력으로 하룻밤 만에 산을 깎아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 땅에다 불전과 탑, 회랑을 각각 3곳에 세웠다. 신라 진평왕이 여러 사람을 보내 절 짓기를 돕게 하니 그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은 그 절이 스러지고 탑만 남았지만 미륵사지 뒤편의 미륵산 8분능선에는 사자사의 자리가 여태 남아 있다. 내친 김에 그 자리까지 찾아가 보자. 미륵사지 석탑 자리 앞에 서서 뒤편의 산쪽을 올려다보면 까마득한 곳에 사자사 자리가 있다. 산길을 따라 40분이면 넉넉히 당도하는 자리. 가녀리게 솟은 이대 숲 사이로 누추한 요사채가 있고 그 위쪽에 숨은 듯 들어선 사자암이 있다. 지금의 사자암이 무왕 부부가 드나들던 사자사가 있던 자리라는 건 출토된 기왓장에서 ‘사자사’란 명문이 뚜렷하게 나오면서 확인됐다.
사자암에서는 해우소가 미륵사지를 굽어보는 가장 빼어난 자리다. 너른 절집 터에 우뚝 선 동탑과 복원작업이 이뤄지는 가건물의 서탑 자리가 솔숲 너머로 내려다보인다. 더 멋진 전망을 보겠다면 폭신한 흙길을 짚어 미륵산을 더 오르면 된다. 미륵산 정상에서는 미륵사지의 전경과 함께 나지막한 구릉으로 이뤄진 익산 땅의 장쾌한 전망이 펼쳐진다. 동탑과 서탑, 그리고 그 사이에 거대한 크기의 9층짜리 목탑이 서 있고, 탑의 구획이 회랑으로 이어져 거대한 하나의 절집을 이뤘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면 백제를 일으켜 세우려던 무왕의 꿈이 느껴지는 듯하다.
사자암과 함께 둘러볼 만한 곳이 미륵산 북쪽 자락에 들어선 미륵산성이다. 조선시대까지 모두 여섯 번 고쳐 쌓았다는
기록 외에는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아무런 단서도 없다. 다만 향토학자들은 백제시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한 익산을 방비하기 위해 산성을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무왕이 익산 땅에 미륵사를 세운 건 천도(遷都)의 목적이었다.
무왕은 세력기반이 없는 부여를 떠나 여기 익산으로 나라의 중심을 옮기려 했다. 그러자니 방비할 수 있는 성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래서 지어진 게 바로 미륵산성이란 추정이다. 성의 둘레는 1.8㎞ 남짓. 전체 성곽 중 3분 1 정도만 복원됐지만,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의 규모가 대단하다. 산성 들머리 아래쪽에는 구룡마을이 있는데, 한때 한강 이남에서 최대로 꼽히던 대숲이 마을 한가운데 있다. 지난 2005년 혹독했던 겨울 추위로 냉해를 입은 뒤에는 예전만 못하다지만, 자연스럽게 자라는 울창한 대나무에서 청량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 50여 년 만에 되돌아오는 왕궁리 석탑의 시간 = 위용은 미륵사지의 석탑만 못하지만 익산의 왕궁리에는 빼어난 비례와 힘찬
자세로 서 있는 석탑이 또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 만든 것이라는데, 균형과 비례는 물론이거니와 섬세한 선과 간결한 생김새가 한눈에도 ‘잘생겼다’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오층탑은 장쾌하게 도열한 거대한 벚나무숲 너머에 있다. 그러니 이 탑은 벚꽃이 만개했을 때 최고의 시간을 맞는다. 분홍빛 벚꽃잎이 꽃비로 분분하게 내릴 때 그 사이로 바라보는 먹빛 석탑의 자태가 가히 최고지만 벚꽃이 아직 한참 이른 이즈음에도 빈 나뭇가지 사이로 보는 석탑은 매혹적이다.
눈 밝은 이들이라면 혹 눈치 챌지 모르겠다. 왕궁리 석탑의 매력적인 자태는 주변을 정갈하게 다듬어낸 정성과 함께 석탑 뒤쪽 저 멀리 구릉에다 몇 그루의 운치 있는 소나무들을
그림처럼 남겨 두어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이건 저절로 만들어진 풍경은 아니다. 누군가 일부러 그림을 그리듯 석탑을 놓아 두고, 배경을 생각해 뒤편에 잘생긴 소나무들을 띄엄띄엄 그리 두었을 것이다. 제법 이름난 명소들도 석탑이면 석탑, 고택이면 고택, 눈앞의 것에만 눈을 두고
관*리하게 마련. 그럼에도 흙으로 돋워 놓은 구릉 위에 우뚝 선 오래된 왕궁리의 석탑을 두고 배려 깊고 세심하게 그 뒷배경까지 생각했던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절로 고마운 마음이다.
1965년부터 이듬해까지 보수작업을 하던 왕궁리 석탑에서도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사리를 담은 사리함과 사리병을 비롯해 금강경을 금판 위에 눌러 찍은 금강경판 등이 발견됐다. 연꽃과 당초 문양을 정밀하게 새긴 사리함도 그렇고, 매끈한 녹색의 기품 있는 사리병의 자태는 그것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런 유물들은 죄다 전주박물관에 가 있다. 유물이 발견된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왕궁리의 유물보관청이 국립박물관으로 지정됐기 때문. 익산에 국립박물관이 없으니 전주에서 가져간 것이다. 시간의 자취인 유물은 무릇 ‘공간’과 함께 있어야 그 감동이 배가되는 법. 문화재는 ‘존재’도 중요하지만 ‘누림’으로써 가치가 있을 텐데, 왕궁리 석탑에서, 또 전주박물관에서 그게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유적전시관에서 왕궁리 오층석탑을 비롯해 익산 일대에서 출토된 유물을 망라하는
‘익산전’이 오는 3월 18일부터 4월 13일까지 열린다.
왕궁리 석탑의 유물을 비롯해 100여 점이 전시되는데 모두 전주박물관에서 빌려 오는 것들이다. 금강경판을 비롯한 유물들이 익산 땅으로 오는 건 이번이 50여 년 만에 처음이다. 고대국가 너머의 시간을 그 유물이 깃든 공간에서 만나는 흔치 않은 기회다. 이제 바야흐로 봄이다. 고작 한 계절의 순환에 감동하는 시선으로 보는 1400년이란 시간은 얼마나 멀고 또 아득한가.
익산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