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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상, 백석과 친한 사이로 지금도 살아있는 전설-박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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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620회 작성일 2014-03-01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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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4년 02월 28일(金)
“문화와 경제가 선의의 파워게임 해야 나라 든든해져”
원로 음악평론가 박용구옹 미투데이공감페이스북트위터구글
▲ 원로 음악평론가 박용구 옹이 지난 13일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에서 장르의 벽을 부순 ‘한반도 르네상스’의 예술형식인 심포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연수 선임기자 nyskim@munhwa.com
박용구 옹의 삶은 20세기 한국문화계의 타임캡슐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중등 음악교과서를 만들었고 근대 이후 최초의 음악평론집 ‘음악과 현실’을 저술했다. 해방 전 그는 일본에서 음악평론 기자를 지냈고, 활발한 연극 활동도 했다. 그는 1967년 초연된 한국 최초의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의 기획자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그는 개·폐막식의 시나리오를 썼다. 1980년대 후반에는 MBC방송문화진흥원 이사장을 지냈으니, 문화행정가이기도 하다.

박 옹의 삶은 굴곡이 심했다. 그 삶이 그를 ‘르네상스맨’으로 성장시킨 것일까. 해방 이후 그의 책은 시내 서점에서 수거 당했고, 원고 청탁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으며, 국민보도연맹 행사에 나오라는 압박 등이 계속 가해졌다. 그는 마침내 일본으로 밀항했다. 한국전 직전이다. 그 시절 사연이 한 편의 소설 같다. 낙화암에서 자살했다는 위장 편지를 가족들에게 보내놓고 통통배에 몸을 실었다. 이후 1950년대를 그는 일본의 발레극단과 연극계에서 보냈다.

박 옹은 1914년생이다. 올해 나이 101세지만 정정하다. 박 옹은 한 세기 동안 음악평론가로, 무용평론가로, 작가로, 예술행정가로 문화계를 종횡무진 누빈 ‘살아있는 전설’이다. 천재시인 이상, 작곡가 김순남, 시인 정지용, 백석, 설정식 등과 교유했으며, 이미 1930년대에 뮤지컬 연출에 참여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영원한 현역이란 사실이다. 그는 지난해 몸으로 겪은 격동의 100년 역사를 녹여 ‘심포카 시놉시스’인 ‘먼동이 틀 무렵’을 내놓았다.

지난 13일 충무아트홀에서 만났을 때 그의 눈빛은 맑으면서도 형형했다. 그는 3시간 동안 인생론과 예술론을 거침없이 말했는데, 발음은 또렷했고 논리도 정연했다. 그가 해방 전에 일본고등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기 때문에 목소리가 지금까지 건강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일본에 밀항하던 때부터 운동을 했다고 한다. 무적자로서 큰 병에 걸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는 것. 물구나무서기와 철봉 매달리기로 몸을 단련하고 욕심을 비움으로써 건강을 지켰다. 그는 지금도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다. 박 옹이 인터뷰 때 갖고 나온 노트에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빼곡했다. 이 노트는 박 옹의 삶에 대한 입체적인 구술작업을 하고 있는 출판사 수류산방에 의해 ‘행복한 자유독본’이라는 책으로 연내 출간될 예정이다. 101세의 출간이라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서울올림픽 개·폐막식 공연의 시나리오를 쓰셨는데요. 주요 올림픽 개막공연을 비교해보실 기회가 있으셨나요.

“처음 내가 맡으면서 외국의 올림픽 개막식 비디오를 볼 수 있는 것은 다 봤어요. 1984년 모스크바올림픽 때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았어요. 그런 모스크바 개막식까지도 구해다가 봤어요. 인상적이었던 것이 모스크바 올림픽 폐막식 때 곰이 하늘로 뜨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어요. 아주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그것과 비교하면서 이번 소치올림픽 개막식을 봤는데 ‘아, 푸틴은 고독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옆에 재능이 뛰어난 재사가 없어요. 그 때문에 돈만 들였지 저렇게 엉망진창인 거예요. 돈들인 장면은 나와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뿌리와 통일성이 없어요. 차라리 검은 눈동자의 흰 곰 수천 마리가 빽빽이 늘어서 춤을 추도록 했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볼거리가 됩니다. 원래 러시아는 발레 전통이 있는 나라니까. 흰 곰의 발레를 선보이면 되는 거예요. 그처럼 뛰어난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공연기획자가 없었다고 봐요.”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막식 때 잘된 부분을 소개해주십시오.

“‘천지인의 조화’와 ‘벽을 넘어서’가 내가 제안한 테마입니다. 서울올림픽 공연 때 상상보다 좋았던 것이 고싸움이에요. 다른 나라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거고, 그게 포인트입니다. 양쪽이 부딪쳐서 올라가고 서로 겨루지만 마지막에는 공중에서 둘이 악수하는 게 그림이 돼요. 내가 구상한 것 중 가장 성공한 것이 그 장면인 것 같아요. 내가 1999년 MBC 이사로 동유럽을 방문했을 때 내가 참여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개·폐막식이 아주 좋았다고 한마디씩 하는 것을 들었어요.”

―지금의 정치권이나 사회 지도층에게 필요한 철학은 무엇일까요.

“내가 최근에 가장 쇼크를 받은 사건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감청실태를 폭로한 뒤 러시아로 망명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사례입니다. 미국의 펜타곤은 거대한 정보망을 가지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했지요. 일개 직원이 망명함으로써 그 거대한 공룡 같은 정보기구가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에 대해 대단한 충격을 받았어요. 다시 말하면 21세기 정보기술(IT) 문명이 바로 투명성으로 가고 있다는 얘기예요. 지금까지 세계를 주도한 정치권력은 남자들이 장악했고, 부정부패와 음모 정치로 흘러왔어요. 지금은 우리나라의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외국 4∼5개 나라에서 여성이 정치권력의 제일 윗자리에 앉게 됐어요. 바로 이런 현실에서도 볼 수 있듯 투명화시대가 앞으로 정치기구까지도 달라지게 할 것이라고 봅니다.”

―여성 대통령 시대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십니까.

“물론 아주 오래전 청동기 시대 이전도 여성 상위 시대였지요.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여성 상위 시대에 세계 시민들이 여성의 투명성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단지 여성이 대통령이 됐다고 정치지형이 바뀔까요.

“나는 역사적 필연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IT 문명의 핵심도 결국 투명성이고 지구촌 어느 나라든 결국 국민들이 투명성을 기대하는데 여성 정치인이 여기에 잘 맞는다고 봅니다. 그렇게 때문에 박 대통령도 여성으로서 지지를 받고 당선된 것이라는 필연성을 보고 있어요.”

―한국 정치도 굴곡이 많지만 선생님께서도 격동의 삶의 살아오셨는데요.

“내가 태어난 해는 제1차 대전이 일어나던 해입니다. 그 100년 동안에 20세기의 격동처럼 나도 많은 격동을 겪었다고 볼 수 있어요. 8t짜리 어선을 타고 풍랑이 거센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밀항도 했어요. 10년이나 일본에서 무국적자로 살면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회관이 어딘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왔을 때 조총련의 간첩 혐의로 투옥을 당했으니 웃기는 거지요. 죽음에 가까운 고문도 받아 봤고 결국 무죄로 풀려났어요. 그런가하면 MBC방송문화진흥원의 이사장이라는 감투도 써봤지요. 많은 걸 겪었어요. 그러는 동안에 내가 정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거나 정치에 참여한 일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야 바람직하겠다는 나름대로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합니까.

“나는 ‘국기 오칙’(國基 五則)을 확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국기 오칙’이라는 것은 나라의 기본 기둥이 되는 정책 다섯 가지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는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의 강대국들에 싸여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 같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 때문에 정치를 이끄는 사람이 아주 지혜로워야 합니다. 어찌 보면 줄타기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둘째가 경제와 문화가 균형을 갖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처럼 문화가 경제에 들러리를 서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대통령 밑에 경제기획원과 문화기획원을 만들고 양대 부통령 체제를 두는 것이지요. 이 같은 이원제를 통해 경제가 먼저냐, 문화가 먼저냐를 놓고 두 명의 부통령이 선의의 파워게임을 해야 국가가 든든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문화에 방점을 둔 국가 전략이군요. 국기를 튼튼히 하는 데는 교육도 중요하겠지요.

“국기 오칙 중 셋째가 교육제도입니다. 진정한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지금도 소를 팔아서 자식 공부 시키는 우골탑 교육입니다. 구체적 예로 북한 핵을 개발한 학자들은 해방 직후 서울대 교수로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실을 우리 국민들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교육은 잘못됐어요. 교육의 기본은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며, 세계 시민으로 성장하게 하는 바탕입니다. 우리 교육에서 관습화된 잘못은 한자를 가르치지 않고 한글 전용을 채택한 것입니다. 한자는 단군족 때부터 쓰던 갑골문에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중국 문자라고 봐서는 안 됩니다. 역사 왜곡의 식민사관과 함께 고대사 이후 2000년을 잘라낸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토대로 한 역사관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지금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인재가 모두 유학파라는 문제에 대한 반성도 필요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놀지를 못합니다. 체험을 토대로 한 교육이 더욱 활성화돼야 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라에서 해외 견학을 시켜 주는 등 견문을 넓힐 기회를 빈부 격차 없이 고르게 줘야 인재가 나올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넷째는 노·장년들의 에너지를 살리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인생 이모작 운동의 일환으로 노·장년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는 구체적 플랜을 세워야 합니다. 다섯째는 해외 교포청을 신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교포들의 에너지를 정말 돌보지 않고 있거든요. 이들의 에너지를 제대로 보듬어줘야 합니다. 지금 일본이 우경화되면서 한국 교포들을 내쫓으려고 하잖아요. 일본 우익과 옥신각신하게 됐을 때 교포들을 제대로 대변하고 감싸주는 울타리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이모작을 사회 운동으로 승화시킨다는 발상이 신선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예로 들 수 있습니까.

“새마을운동처럼 60세 이상의 은퇴한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에 따라 예술활동을 하도록 정부(보건복지부)가 돕는 것입니다. 목각을 만들기도 하고 노래나 무용도 배우는 등 노후의 에너지를 그런 식으로 쏟아 붓는 것입니다. 마을단위 조직을 만들 수 있지요. 노인들로 이뤄진 민요합창단이 뛰어나다면 해외공연도 하게 될 것입니다. ‘난타’ 공연만 봐도 식기를 두들겨 세계적으로 성공했지요. 아이디어 하나만 갖고 되잖아요. 엉뚱하고 기발한 것들이 각 지역에서 나올 거예요. 이 같은 활기로 한반도의 에너지 자체가 바뀔 거라고 봐요. 나는 우리나라의 국민성이 원래 신명 나는 익살이라고 봅니다. 외국 사람들이 볼 때 한국인의 신명은 놀랍다고 해요.”

―100세 건강 비결을 말씀해 주십시오.

“노자의 도덕경에 상선약수라는 말이 있잖아요. 최고로 좋은 선은 바로 물처럼 흘러가는 겁니다. 노자는 삶이 모가 나지 않고 물처럼 흘러가는 것을 선한 것으로 봤어요. 그 말을 늘 생각하곤 합니다. 나는 이제껏 100년 동안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한 일이 없어요. 물처럼 살려고 했지요. 각자 신체리듬이 다르니까 자기가 발견한 건강법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2년 전부터 자기 전에 족욕을 합니다. 잠이 잘 와서 좋더라고요. 담배는 하루 서너 대 태우지만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한약을 많이 드신 것 아니신지요.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가 7남매인데 아버지가 날 총애했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나에게 산삼을 구해다 먹여서 건강하게 100살까지 사는가 보다’라는 생각을 가끔 해요. 우리 집이 소백산 밑 풍기에서 한약국을 했어요. 소백산에서 산삼을 캐온 사람들이 집에 와서 감정을 받았어요. 아버지가 ‘진짜다, 가짜다, 50년 된거다, 20년 된거다’라고 말씀하시면 그걸로 산삼 값이 매겨졌어요. 그런 산삼이 우리 집에 많이 왔어요.”

―음식은 소식을 하시죠. 어떤 운동을 하시나요.

“소식이에요. 난 아침을 안 먹어요. 새벽 1시가 다 돼서 자고, 낮 12시가 다 돼 일어납니다. 밤 시간은 내 에너지를 활용하는 시간이에요. 예전에는 물구나무서기도 꾸준히 했어요. 평창동에 살 때는 작은 공원에서 철봉을 했지요. 지금 이사 온 우리 집은 10층이고 바로 11층이 공원이에요. 옥상공원에 인도어 골프가 있어서 틈틈이 합니다. 그저 한 7개나 10개 정도 때리고 내려오는 거지.”

―원래 골프를 치셨는지요.

“1960년대니까 오래전 일이지만 친구가 운동구점을 차려서 골프채를 하나 샀어요. 골프장에 한번 나가 보니까 깡패들만 득실거리더라고요. 그들과 어울리기 싫어서 그 뒤로 골프장은 아예 안 갔어요.”

―지금까지 줄기차게 창작 활동을 하고 계신데, 선생님의 평생 예술테마는 무엇인가요.

“‘나는 누구냐’ ‘너는 누구냐’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게 내 평생의 테마에요. 이런 질문을 계속하다 100세가 돼서 ‘먼동이 틀 무렵’ 즉 ‘여명기’의 시나리오에 도달한 것입니다.”

―지난해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가 47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한국 최초의 창작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 제작자로서 이 작품을 관통하는 정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우리말을 말살하던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의 주필을 지낸 설의식 선생이 악극단을 만들었어요. 바로 라미라 가극단으로 이 악극단에서 무대에 올린 것이 우리말 공연 ‘콩쥐팥쥐’하고 ‘견우직녀’였어요. 나는 ‘향토가극’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 바탕에 ‘향토의 뿌리를 지키자’는 정신이 있었어요. 내가 설 선생 밑에서 향토 가극을 했기 때문에 1960년대 극단 예그린이 ‘살짜기 옵서예’를 제작할 때도 향토성을 뿌리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나라 뮤지컬의 뿌리가 향토애라는 것을 알아야 될 거예요. 해외진출을 할 때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 뮤지컬은 빈 주머니입니다. 조선시대의 마당극에도 양반 사회에 대한 풍자가 있었잖아요. 하지만 풍자만으로 뮤지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뮤지컬은 그 풍자 정신을 음악과 무용에 일체를 시키고, 중산 계층의 바이탈리티를 살릴 수 있도록 흥겹게 해야 한다구요. 그런 점에서 요즘 성공한 몇몇 뮤지컬은 아쉽게도 차라리 오페라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는 여주인공 애랑의 역할이 강렬한 것 같습니다.

“애랑은 강한 생명력과 에로티시즘을 동시에 구현한 인물이라 관객들이 좋아했어요. 애랑이 제주도를 떠나는 정비장을 홀랑 벗기는 장면에서 패티 김과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환상적 콤비에 관객들은 환호했지요. 이 작품에서는 제주도가 섬이므로 본토에 대한 저항의식 같은 것을 애랑이란 인물을 통해 나타낸 거지요. 이 뮤지컬을 제대로 하려면 그런 저항의식을 살려야 합니다. 1967년 시민회관에서 ‘살짜기 옵서예’를 올릴 때는 마이크를 무대 앞에 세워놓고 배우들이 마이크에 다가가서 노래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반도 르네상스를 일으키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같이 이 주제로 깊이 얘기한 적은 없지만 나의 생각은 백남준의 촌락 개념과 서로 통해요. 나이가 많이 들어 만났지만 그 친구와 나는 세계를 보는 눈이 비슷한 데가 많아요. 나는 21세기에는 민족 개념을 떠나야 한다고 봅니다. 촌락 개념을 살려야 지구촌이 평화롭게 됩니다. 예술에서도 우리나라가 한반도 르네상스를 성취하고 성숙기를 맞아야 제구실을 한다고 봅니다. 아직은 경제와 문화가 차이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경제처럼 문화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새롭고 21세기다운 양식이 탄생해야 합니다. 마치 메디치라는 경제 재벌이 르네상스라는 예술 양식을 낳은 것처럼, 또 산업혁명 이후에 시네마라는 장르가 탄생한 것처럼, 경제가 정말 뛰어나면 새로운 문화 형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단순히 서구 문화의 뛰어난 예술 양식을 잘 따라잡는 데서 이제는 벗어나서 우리가 먼저 주도해 새로운 문화 양식을 만들어야 인류 역사에 제대로 남을 게 있지 않을까요. 나는 그 양식에 심포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마침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백남준이 서울올림픽 때 인공위성을 연결해서 퍼포먼스를 했잖아요.”

―선생님이 만드신 심포카 양식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것 같습니다.

“심포카란 심포니가 종합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IT 문명이나 인공위성 기술까지 결합한 종합적인 예술 양식입니다. 연극이라는 실상과 영상이라는 허상이 결합되고 극장이라는 닫힌 공간과 위성 방송이라는 열린 공간이 공존하고 거기에 음악, 무용, 연극과 같은 기존 예술 장르가 다 뭉친 그런 종합적인 예술입니다. 언젠가는 이윤 추구로 전락해 버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대신해서 예술로 서로를 겨루는, 심포카들의 문화 올림픽도 한반도에서 열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들려주십시오.

“만 100세가 된 시점에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유엔이 만들어준 나라라는 것을 이제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동안 정치권력들이 무능했고, 머리를 안 썼다고 생각합니다. 유엔이 투표해서 대한민국이 생겼고, 정전협정을 맺게 한 것도 유엔이에요. 이렇게 만들어준 나라가 제구실을 하고,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됐지 않습니까. 이제 남북통일이 되도록 혹은 두 연방체를 만들도록 어떻게든 해결해주는 것이 유엔의 역할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유엔은 책임을 느낄 위치에 있다고 봅니다.”

―유엔에 어떤 점을 촉구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스위스가 중립국이 된 것처럼 제2차 대전 후에 유엔도 중립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그런 노력을 한 사람이 없어요. 비로소 박 대통령이 최근 유엔에 가서 비무장지대(DMZ)에 중립적인 세계평화 공원을 만들자는 제안을 처음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유엔에 보채기 시작한 것은 이게 역사적으로 처음이에요. 진작부터 그랬어야 했어요.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신경을 쓰겠어요. 유엔에 나라 전체를 중립국으로 만들자고 해야 합니다. 남북 두 개의 연방체로 제도가 각기 달라도 괜찮다고. 싸움만 안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중국도 오케이할 거예요. 중국도 북한이 골치 아픈 존재거든요. 핵을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내가 일부러 정치개입을 안 하고 살아왔는데 처음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유엔에 보채야 유엔 쪽에서 ‘그래봅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박 옹은 지난해 백수를 맞아 ‘검은 수첩’이라는 시놉시스도 썼다. 북한풍자코미디다. 무대는 가상독재국가인 북변공화국이다. 누군가 이 공화국의 권위 있는 수령을 몰래 죽이고 자기가 수령이라고 사칭한다는 내용이다. 그 가짜 또한 족벌 체계 안에서 장군님의 조카라는 자에게 죽음을 당하고, 그 조카의 비리도 발각된다. 족벌 체제의 서로 물고 물리는 권력 비리를 희극적으로 그리고 매우 섹슈얼하게 풍자했다. 중간중간에 옛 민요, 북한 노래, 김소월 시, 근대 가요, ‘잘살아보세’ 등의 노래가 울려퍼진다.

인터뷰=예진수 문화부장 jinye@munhwa.com
e-mail 예진수 기자 / 문화부 / 부장 예진수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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