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영조-광선-재엽-시헌등의 금메달과 이규혁과 싸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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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234회 작성일 2014-02-17 07:20본문
빅토르 안 --안현수는 다소 고난의 시간도 엄청 많았지만 하여튼 그는 겨울올림픽에서 모두 4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었다.
그는 행운아인 동시에 이젠 풍운아 까지 되었다.
심석희는 각종 월드컵 대회에서 그녀의 주종목에서 금메달을 엄청 많이 획득햇으나
정작 최전성기인 지금 레이스에서 단 1초의 방심 순간에 역습 추월당해 통한의 눈물을 흘렀다.
그녀가 만일 실력대로 금 메달을 무난히 땄다면?
그녀의 운석들어간 금메달은 엄청난 보존 가치를 누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녀는 부상없이 잘 체력 관 리하면 그녀는 필히 평창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개연성은 아주 농후하다고 저는 봅니다.
봉달이 이봉주는 1996년 전성기 시절 아틀란타 올림픽에서 남아공의 투과니 선수에게 단 3초 늦어 올림픽 금메달 딸 기회를
놓쳤는 데 그는 그이후 다시 심기일전하여 각종 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재도전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우연히 넘어지는
불운속에(그 당시 그는 트레이드 마크인 머리에 태극기 이마에 단 머리띠를 안매서 불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입상권에서 멀어졌고
그 다음에도 불운해서 그는 올림픽 금메달은 영원히 멀어져 간 불운 선수이지만 그는 하여튼 최고 역사의 보스톤 에마라톤에서
우승하여 서윤복 선수등을 이은 마라톤 강국의 이미지를 전세계에 한국의 이미지를 제고한 공훈도 있다.
황영조는 그에 비해 92년 올림픽에서 우승하여 천부적 마라톤 신체와 유능한 코치덕에 그리고 당일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일본 선수를 거뜬히 따돌리고 우승햇는 데 김완기가 조력자가 되었다.
그당시 모리시타와 함께 선수와 함께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다니구찌선수는 레이스 초중반 하필 신발이 벗겨지는 바람에
선두 레이스에서 밀려 결국 몬주익 언덕 한일 전 승부에 결정적으로 한국측의 승리로 연결지어진 기억이 22년 지난
지금도 저는 생생합니다
1992년 저는 한여름의 밤 12시에 텔레비젼 보며 약 2시간 10여분 동안 숨죽이고 자리 안뜨고 지켜본 스포츠팬중의 한 명으로서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같은 밤을 즐겁게 황영조 실황중계와 함께 보낸게 지금도 새록새록 기억나고 기분이 너무 지금 이순긴에도
너무 좋습니다.
하여튼, 올림픽은 실력과 행운이 필히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는 엄청 많습니다
아마복싱의 스타 김광선은 84년 L.A올림픽에서 강력 우승 후보 였으나 초반 미국의 우승 후보와 만나
하필 헤드기어가 커서 그 선수를 코너에 몰면 심판이 헤드기어 핑계대고 중단 여러번 시키는 바람에
초반 탈락의 불운을 삼켰으나 그는 4년간 절치부심하여 88서울 올림픽에서 머리에 맞는 헤드기어를 준비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드디어 올림픽 88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유도의 김재엽도 84년 올림픽에서 일본의 호소가와 선수에 36초만에 이상하게 힘 한 번 못쓰고 누르기 당해 한판패 준우승하였으나
4년간 절치 부심하여 88올림픽에서 준결인가 8강에서 패한 호소가와 를 피해 어렵지 않게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88올림픽의 박시헌 선수는 초반 한국 어느 선수-아마도 변정일 선수의 심판 판정 억울함 호소로 인한 보상 판정으로 인해
결슬전에서 미국 로이 존스선수에게 많이 유효타 허락하고서도 금메달을 목에 거는 뜻밖의 행운아도 있습니다.
500미터 쇼트 트랙의 중국 선수 금메달도 그런 케이스(행운의 신이 미소짓는 경우0가 아닌가 합니다
*************
그러니 심석희 선수는 분명 평창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거의 확실합니다 힘내세요!
그런 한국의 선수들은 몇 몇 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스포츠 이야기는 많으나 후일을 도모합니다.
********************************
성화 불꽃 보며 茶 마시니 좋아 …
예전엔 확 끄고 싶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4.02.15 00:29 / 수정 2014.02.15 00:40
정신없이 달린 마지막 레이스
꼭 내 인생 닮은 것 같아
서장훈·싸이 형은 늘 내 편
가*방**끈 중요, 박사학위까지 생각
꼭 내 인생 닮은 것 같아
서장훈·싸이 형은 늘 내 편
가*방**끈 중요, 박사학위까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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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혁(36·서울시청)이 만나자고 한 곳은 소치 올림픽파크 안의 아들레르 아레나 노천카페였다. 그의 마지막 레이스가 펼쳐진 장소다. 옆에선 올림픽 성화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성화 옆에서 이렇게 차를 마시니 참 좋다. 예전 올림픽 땐 성화를 확 꺼버리고 싶었는데”라며 웃었다.
소치 대회를 끝으로 이규혁은 은퇴를 선언했다. 여섯 번이나 올림픽을 향해 달렸지만 올림픽 메달 없이 긴 질주를 멈췄다. 13일 밤(현지시간)은 그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은퇴를 선언한 지 딱 하루가 지났을 때다. 23년간의 국가대표 레이스를 마친 이규혁은 중앙일보와 만나 조촐한 ‘올림픽 쫑파티’를 열었다. 그는 매우 편안해 보였고, 또 편안하게 말을 했다.
- 이규혁의 올림픽이 진짜 끝났다.
“기자들은 더 해야지. 만날 우리보고 열심히 하라면서 말이지. 기자들은 폐막까지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 결혼하셔야 할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나, 더 즐길 거다. 운동만 하지 않았나. 지금까지 여자친구 없었다는 거 집에서도 다 안다.”
- 은퇴 후 딱 하루가 지났는데.
“어젯밤부터 문자메시지 답장을 200통쯤 한 것 같다. 해방감이 느껴진다. 시즌 중 6개월 동안은 이런 거(도넛) 금기 식품이다. 케이크나 초콜릿 같은 거 좋아하는데 비시즌 때만 먹었다. 못 먹을 땐 진짜 맛있어 보인다. 이젠 마음껏 먹을 수 있지. 근데 참 이상하다. 지금은 별로 안 당긴다. 원래 큰 경기 끝나면 술 한잔했는데 이젠 안 그렇다. 한국 가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니까. 마치 군사훈련소에서 초코파이에 미치다가 휴가 나오면 안 먹는 것처럼.”
- 은퇴와 함께 경쟁에서 벗어났다.
“후, 20년이 넘었다. 1등을 하려면 내가 잘해야 하고 또 상대가 나보다 못해야 한다. 심지어 (대표팀 후배) 모태범이 뛴다고 해도 ‘나보다 잘해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게 경쟁이다. 물론 태범이가 금메달 따면 축하해주지. 그러나 지기 전까지는 지고 싶지 않은 거다. 그런 마음을 오랫동안 갖고 있으니 내가 너무 싫어지더라. 앞으로 내가 뭘 하더라도 스케이팅할 때처럼 (기록이나 순위로) 평가받진 않을 것이다. 경쟁하게 되더라도 져주고 싶은 마음이다.”
- 멋진 말이다. 아무래도 준비한 은퇴사 같은데.
“난 한 번도 인터뷰를 준비해본 적이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속에 있는 말을 꺼내야 재미있다. 어제 경기 후 방송 인터뷰할 때 가장 슬펐던 순간과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아달라고 하더라. 마지막 올림픽에 참가한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앞으로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게 가장 슬프다고 했다. 캬, 내 말에 내가 감동했다.”
- 그건 좀 느끼하다.
“아니다, 듣는 사람의 감정이 메말라서 그렇다.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드라마 ‘가을동화’ 같은 걸 좋아하는 감성이 있다. 그게 내 진심이고.”
- 스케이팅 후배들이 부담을 많이 느꼈다.
“모태범과 이승훈이 메달 따지 못하고 (공동취재구역을) 말없이 빠져나가는 거, 나도 다 해봤다. 어떤 심정인지 안다. 올림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도 이제야 알겠더라. 태범이가 500m에서 4등 한 게 뭘 못한 건가. 메달을 따줄 거라는 기대를 혼자 짊어지게 해서 미안하더라. 우리나라는 (부담을 주는 게) 심하다. 태범이가 2010 밴쿠버 올림픽 때 금메달을 딴 뒤 ‘아무도 날 주목하지 않아서 오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땐 속으로 ‘미친 놈’이라고 했다. 사실 그래야 올림픽을 편하게 잘 준비할 수 있다. 난 항상 메달 후보여서 맨 앞에 섰다. 그게 힘들었는데 이번엔 태범이가 그랬다.”
- 이상화도 그런 압박감을 느꼈다.
“스프린터는 어쩔 수 없다. 상화도 사실 위험했다. 경기일 아침에 보니 긴장했더라. (여자 500m) 1차 레이스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차이가 크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흔들리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잘 이겨냈다.”
- 4년을 준비해 1분의 승부를 벌인다. 참 가혹하다.
“레이스 자체가 가혹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2006 토리노 올림픽 1000m에서 0.04초 차이로 4등을 했다. 내가 0.04초 더 빨라서 동메달을 땄으면 그게 엄청난 차이인 거다. 0.04초 느려서 졌다면 아쉬울 거 없다. 그보다 더 작은 차이로 이긴 적이 더 많으니까. 1000m를 타는 시간이 1분 조금 넘지만 레이스를 위해 먹고 자고 훈련하는 시간은 1시간, 24시간, 길게는 1년이다. 짧지만은 않은 승부다.”
- 마지막 1000m 레이스를 회상하자면.
“처음 200m는 너무 재밌었다. 선수들 표현으로 ‘킥이 먹는다’는 느낌. 온몸에 엔도르핀이 도는 느낌. 혹시 메달을 따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600m를 지나면서 스피드가 떨어졌다. ‘나이 탓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경기력이 안 되긴 했지만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다 느꼈다. 마지막 레이스가 좋아서 이렇게 웃는 거다. 정신없이 레이스를 끝내고 돌아보니 마지막 레이스는 꼭 내 인생을 닮은 것 같다.”
이날 12일 1000m 경기에서 이규혁은 1분10초04의 기록으로 40명 중 21위에 올랐다.
- 주변에 사람이 참 많다.
“(농구선수) 서장훈 형은 성질이 더러워도 정이 많다.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다. 몇 년씩 날 서운하게 해도 내 경기가 끝나면 울어주는 사람이다. 싸이 형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다. 생일이 나보다 석 달 빠르지만 형이라고 한다. 형다운 면이 많으니까. 또 이제 월드 스타도 됐고. 내가 만든 자리에서 싸이 형이 지금의 형수를 만났다. 또 지금 내 일을 봐주고 있는 브리온컴퍼니 임우택 대표도 그런 분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을 들어줄 사람들이다.”
“어젯밤부터 문자메시지 답장을 200통쯤 한 것 같다. 해방감이 느껴진다. 시즌 중 6개월 동안은 이런 거(도넛) 금기 식품이다. 케이크나 초콜릿 같은 거 좋아하는데 비시즌 때만 먹었다. 못 먹을 땐 진짜 맛있어 보인다. 이젠 마음껏 먹을 수 있지. 근데 참 이상하다. 지금은 별로 안 당긴다. 원래 큰 경기 끝나면 술 한잔했는데 이젠 안 그렇다. 한국 가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니까. 마치 군사훈련소에서 초코파이에 미치다가 휴가 나오면 안 먹는 것처럼.”
- 은퇴와 함께 경쟁에서 벗어났다.
“후, 20년이 넘었다. 1등을 하려면 내가 잘해야 하고 또 상대가 나보다 못해야 한다. 심지어 (대표팀 후배) 모태범이 뛴다고 해도 ‘나보다 잘해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게 경쟁이다. 물론 태범이가 금메달 따면 축하해주지. 그러나 지기 전까지는 지고 싶지 않은 거다. 그런 마음을 오랫동안 갖고 있으니 내가 너무 싫어지더라. 앞으로 내가 뭘 하더라도 스케이팅할 때처럼 (기록이나 순위로) 평가받진 않을 것이다. 경쟁하게 되더라도 져주고 싶은 마음이다.”
- 멋진 말이다. 아무래도 준비한 은퇴사 같은데.
“난 한 번도 인터뷰를 준비해본 적이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속에 있는 말을 꺼내야 재미있다. 어제 경기 후 방송 인터뷰할 때 가장 슬펐던 순간과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아달라고 하더라. 마지막 올림픽에 참가한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앞으로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게 가장 슬프다고 했다. 캬, 내 말에 내가 감동했다.”
- 그건 좀 느끼하다.
“아니다, 듣는 사람의 감정이 메말라서 그렇다.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드라마 ‘가을동화’ 같은 걸 좋아하는 감성이 있다. 그게 내 진심이고.”
- 스케이팅 후배들이 부담을 많이 느꼈다.
“모태범과 이승훈이 메달 따지 못하고 (공동취재구역을) 말없이 빠져나가는 거, 나도 다 해봤다. 어떤 심정인지 안다. 올림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도 이제야 알겠더라. 태범이가 500m에서 4등 한 게 뭘 못한 건가. 메달을 따줄 거라는 기대를 혼자 짊어지게 해서 미안하더라. 우리나라는 (부담을 주는 게) 심하다. 태범이가 2010 밴쿠버 올림픽 때 금메달을 딴 뒤 ‘아무도 날 주목하지 않아서 오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땐 속으로 ‘미친 놈’이라고 했다. 사실 그래야 올림픽을 편하게 잘 준비할 수 있다. 난 항상 메달 후보여서 맨 앞에 섰다. 그게 힘들었는데 이번엔 태범이가 그랬다.”
- 이상화도 그런 압박감을 느꼈다.
“스프린터는 어쩔 수 없다. 상화도 사실 위험했다. 경기일 아침에 보니 긴장했더라. (여자 500m) 1차 레이스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차이가 크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흔들리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잘 이겨냈다.”
- 4년을 준비해 1분의 승부를 벌인다. 참 가혹하다.
“레이스 자체가 가혹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2006 토리노 올림픽 1000m에서 0.04초 차이로 4등을 했다. 내가 0.04초 더 빨라서 동메달을 땄으면 그게 엄청난 차이인 거다. 0.04초 느려서 졌다면 아쉬울 거 없다. 그보다 더 작은 차이로 이긴 적이 더 많으니까. 1000m를 타는 시간이 1분 조금 넘지만 레이스를 위해 먹고 자고 훈련하는 시간은 1시간, 24시간, 길게는 1년이다. 짧지만은 않은 승부다.”
- 마지막 1000m 레이스를 회상하자면.
“처음 200m는 너무 재밌었다. 선수들 표현으로 ‘킥이 먹는다’는 느낌. 온몸에 엔도르핀이 도는 느낌. 혹시 메달을 따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600m를 지나면서 스피드가 떨어졌다. ‘나이 탓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경기력이 안 되긴 했지만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다 느꼈다. 마지막 레이스가 좋아서 이렇게 웃는 거다. 정신없이 레이스를 끝내고 돌아보니 마지막 레이스는 꼭 내 인생을 닮은 것 같다.”
이날 12일 1000m 경기에서 이규혁은 1분10초04의 기록으로 40명 중 21위에 올랐다.
- 주변에 사람이 참 많다.
“(농구선수) 서장훈 형은 성질이 더러워도 정이 많다.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다. 몇 년씩 날 서운하게 해도 내 경기가 끝나면 울어주는 사람이다. 싸이 형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다. 생일이 나보다 석 달 빠르지만 형이라고 한다. 형다운 면이 많으니까. 또 이제 월드 스타도 됐고. 내가 만든 자리에서 싸이 형이 지금의 형수를 만났다. 또 지금 내 일을 봐주고 있는 브리온컴퍼니 임우택 대표도 그런 분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을 들어줄 사람들이다.”
- 앞으로 뭘 할 건가.
“난 스피드 스케이팅을 너무 사랑한다. 후배들을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당장 코치를 하겠다는 건 아니다. 일단 선수촌을 떠나고 싶다. 멀쩡한 내 집 놔두고 20년 넘게 원룸(선수촌)에서 살았다. 자기계발을 더 하고, (고려대 체육교육대학원) 석사를 마친 뒤 박사과정도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선 가**방--끈이 중요하니까. 하하.”
- 몇 점짜리 스케이터로 은퇴하는 것 같나.
“난 스피드 스케이팅을 너무 사랑한다. 후배들을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당장 코치를 하겠다는 건 아니다. 일단 선수촌을 떠나고 싶다. 멀쩡한 내 집 놔두고 20년 넘게 원룸(선수촌)에서 살았다. 자기계발을 더 하고, (고려대 체육교육대학원) 석사를 마친 뒤 박사과정도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선 가**방--끈이 중요하니까. 하하.”
- 몇 점짜리 스케이터로 은퇴하는 것 같나.
“은퇴했는데 또 점수를 매기나. 100점은 아니다. 올림픽 메달이 없으니까. 그러나 올림픽 메달이 없어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 같다.”
소치=김지한 기자
소치=김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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