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 |
북 ‘도발’ 대개는 약속이행 압박 전술
미 중유제공 지체때 핵동결도 지연
북 도발 사이클선 한·미 책임 탈각돼
북, 제네바합의 빈틈 활용 HEU 추구
그래도 신중하게 협상 추진했어야
하지만 부시정부는 ‘처벌’에만 집중
최근 ‘두개의 한국’ 증보판 출간
‘대북협상 시간낭비’ 환상깨기 주력
남북관계에 ‘기다리는 전략’은 잘못
-당신은 <두개의 한국>에서 북-미 관계를 설명하며 북한의 ‘도발-보상
사이클’로 진단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른바 ‘사이클’이 북한의 중요 정책을 설명하는 것처럼 집착하는데, 사실은
이것은 일련의 사건을 만든 책임에서 우리를 빠져나가게 한다. 우리(한·미)는 사건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 같다. 예컨대,
북한의 어떤 행동들(‘도발’)은 실제로 한·미가 협상 이행을 지체할 때 압력을 가하려는 전술적 움직임이다. 언젠가 북한 외교관은 자기들도 절벽
끝까지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때때로 한·미가 상황을 방치하기보다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사태 해결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려고, 그걸
해야 한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북한의 모든 행동이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의 동기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문제를 북한 사이클보다는 양쪽이 서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자양분을
제공하는 악순환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지 모른다. 나는 남쪽과 북쪽 강경파들이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최고의 친구가 되었다고 종종
생각해왔다.”
-그런 사례를 들어줄 수 있는가?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 이행 기간에 북한은 영변 폐연료봉의 봉인을
지연·중단하거나 관련 미국 전문가들의 비자 승인을 지연시키곤 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문제를 일으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중유 제공 지연 등
미국의 의무 이행이 지체됐기 때문이었다. 북한 쪽의 이런 행동들은 훗날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지만, 사건 당시에는 그 중요성이
확대되고 도발적이라거나 부정직한 사례라는 딱지가 붙게 된다.”
-한·미 정부는 대북 협상 무용론의 주요 사례로 제네바합의의 실패를 꼽는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네바합의는 문서상 나오는 단어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의미했다. 이 우산 아래서
북한과 광범위한 회의와 활동이 시작됐다. 미사일을 포함한 다양한 중요 현안을 논의했다.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주로 비확산 협정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으나 나는 좀더 광범위한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봤다. 북한한테 이것은 중국·러시아의 영향력에 대한 방어책으로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한다는
김일성의 전략적 결정을 실행할 방책이었다. 그것은 중유나 경수로 획득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성취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북한은 제네바합의의 좀더 광범위한 정치적 의미에 중요성을 두지 않은 미국보다 제네바합의에 더 충실했다.
그런 이유로 제네바합의를 초기 4~5년에 지속시키는 것은 도전이었다. 1998년 북한이
로켓 발사를 하고 금창리 소동이 벌어질 때쯤 제네바합의가 흔들거렸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는 이것을 폐기하지 않고 페리 프로세스에서 재평가했다.
임기 마지막 18개월간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합의를 더욱 강한 토대 위에 세워놓으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2000년 10월 북-미 공동
코뮤니케는 그런 새 지평을 상징했다.
제네바합의가 “실패했다”는 생각은 부시 행정부가 고농축 우라늄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그리고 북한이 “사기를 쳤다”는 비판을 둘러싸고 소용돌이 친 사건에서 나온 것이다. 두가지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부시 행정부 고위
관료들이 처음부터 제네바합의에 반대했고 이것을 폐기처분할 의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2001년 1월 취임 때부터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방북 때까지 ‘뉴욕 채널’을 통한 무의미한 접촉 외에는 아무런 북-미 대화가 없었다. 즉, 켈리가 방북할 때쯤 제네바합의는
거의 질식 상태였다. 둘째는 켈리 방문이 끝나고 북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인정했다는 생각에 깜짝 놀란 워싱턴 고위
관료들은 고농축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가 아니라 북한에 대한 처벌에만 집중했다.
나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추구가 중요한 오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협정의 약한 고리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게 북한의 전형적인 관점이었다. 이는 북한을 다룰 때 늘 전제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다른 모든 진지한
협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것이 신중해야 할 이유이긴 하지만, 정책 마비의 변명거리는 아니다.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중단시키는
것은 절대 명제였고, 우리는 신중한 전략과 그런 목표 성취를 위한 최선의 전술적 환경을 필요로 했다. 결국 우리(클린턴 행정부)의 접근법이
작동했을지 모르지만, 제네바합의를 파괴한 (부시 행정부에 의해) 선택된 길이 실패했다는 점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제네바합의 파기의 책임은 북한과 미국 어느 쪽에 더 많다고
보는가?
“네오콘들은 제네바합의를 제거하기를 원했고, 북한은 확실히 그들의 손에 놀아났다.
미국이 제네바합의를 유지·개선하기를 원했다면, 그건 가능했고 확실히 더 현명한 길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두개의 한국>에서 2002년 켈리 차관보 일행과 강석주 제1부상의
회담과 관련해 “수년 뒤 돌이켜볼 때, 대표단의 여러 명은 자신들의 첫 반응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알았다”고 밝혔다. 그들이 강석주의
발언을 잘못 해석했다고 인정했는가?
“(일행 중) 여럿은 강석주의 발언이 그들이 처음 결론냈던 것보다 더 모호했다고 결국
인정했다. 회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석주 발언록을 보고서 나는 그가 어떤 것을 “인정”도 하지 않았고 분명히 부인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추진했다는 증거를 우리가 가졌다면, 그것은 문제이니 해결해야 했다. 그들이 인정했는지 부인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2005년 9·19공동성명과 6자회담이 실패한 책임은 어느 쪽에 더 있다고
보는가?
“이 질문은 9·19공동성명이 처음부터 탄탄한 합의였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내
생각엔, 그것은 결코 강한 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 약한 기반도 당시 회의 말미에 크리스토퍼 힐 수석대표가 발표한 미국의 마지막 성명, 그
다음날 방코델타아시아(BDA)에 관한 미국 재무부의 발표로 곧바로 파괴됐다. 방코델타아시아 문제가 해결된 뒤-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뒤에 곧바로 이뤄졌다-다시 상황이 급하게 수습됐다. 그러나 이것도 미봉책에 불과했다.”
-당신은 책에서 2012년 북-미 2·29합의에서 양쪽의 차이가 작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양쪽이 이를 합의했다고 발표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 경험으로 보면, 협상장에 실제로 앉아있지 않는 한 협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가 매우 어렵고, 게다가 참석자 중 많은 이들도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다. 합의된 문구가 있을 때 그런 종류의 차이는
덜 중요할지 모른다. 이 경우에는 합의된 문구가 없었다. 합의 문구를 만들 시간이 없었다거나 너무 어려웠으리라는 주장이라면, 그것은 처음부터
“딜”이 정말로 있었다는 생각을 약화시킬 것 같다.”
-이 책에서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추었는가?
“북한을 다루는 데 어떤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지난 13년간 자라온 신화를 없애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북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가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상황이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왜곡됐다면, 우리가
목표를 성취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북한과 협상이 불가능하거나 그들이 합의를 깰 것이니 그들과 합의는 시간 낭비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역사를 잘못 읽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시안적인 정책을 채택할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수십년동안 북-미관계가 풀리지 않는 근본원인은 뭐라고
보는가?
“북한은 더 작고 약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취약점을 노출할 것이라는 우려로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게 드물다. 이것은 북한이 여러 옵션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 그들의 마음속엔, 미국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고위 북한 외교관이 중요한 시점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를 기억한다. 미국은 먼저 나서서 접촉하는 것을 주저했고,
시간은 다 돼 가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 외교관을 접촉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그는 이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몇달 뒤
나는 그 외교관을 우연히 만나 그때 회담이 진행됐으면 유익했을 것이라고 얘기했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회담이 열렸다면 제기할 몇가지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왜 우리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문제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내가 먼저 나설
수는 없다. 내가 받은 지시는 당신 쪽에서 나를 접촉하기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남북관계를 전망해줄 수 있는가?
“기회 같은 것이 나타날 때 그것을 시험해보고 가능하면 그걸 기반으로 진전을 만들어
가야 한다. 더 나은 것이 오리라 기다리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는 게 증명됐다. 한반도 상황을 다룰 때는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옛
격언은 잘못됐다. 상황이 어디로 갈지 예측하고 싶지 않다.”
워싱턴/박현 특파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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