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1894-청일전쟁속의 공주 피의 언덕-우금치 전투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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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4,099회 작성일 2014-02-01 15:02본문
[1894 vs 2014, 갑오년의
동아시아]
(4) 1894년 11월
동학
2차 봉기·우금치 전투
신영우 | 충북대 교수·한국사
|
■ 아아! 우금치전투!
2014년 1월, 우금치에 몰아치는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지금 기념탑 왼쪽의 작은 고개는 깎아내려 만든 왕복 4차로 터널로 변했고, 양쪽 산줄기가 푹 꺼진 것처럼 보이는 터널 상판에는 넓은 광장이 생겼다. 노성과 이인 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이 광장을 향해 몰려왔다. 바람길은 120년 전 동학농민군이 북상하던 길 그대로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이 고개를 넘어오지 못하고 일본군과 경군에게 희생당했다.
우금치 일대를 화면에 담기 위해 남쪽 금학동 야산에 올랐으나 시야가 가렸다. 길을 더 내려가 봉정교차로 건너 건물 3층에 들어가니 우금치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동학사 기록과 관군보고서에는 갑오년 ‘논산에서 공주까지 산과 들에 사람이 꽉 들어찼다’거나 ‘벌떼처럼’ ‘밀물이 넘치는 것처럼’ 밀려왔다고 표현했다.
논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장군의 남접과 손병희 통령의 북접이 합세한 세력이었다. 남접은 노성과 효포 쪽으로 공격했고, 북접은 이인에서 봉황산과 하고개를 공격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패배를 당했다. 전봉준 장군은 공초에서 “2차 접전 후 1만여 군병을 점고한즉 불과 3000여명이요, 또 두 차례 더 싸운 뒤 점고한즉 500여명”이었다고 했다. 얼마나 희생되었을까.
낙엽이 떨어져 가릴 곳 없는 산등성이에서 고지를 막아선 일본군과 경군이 쏘는 대로 동학농민군이 쓰러졌다. 일본군이 쏜 탄환은 1차 보고에 500발, 2차 보고에 2000발이었다. 경군은 그보다 훨씬 많은 탄환을 쏘았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나 그 수를 알 수조차 없다. 일본의 한 자료는 당시 일본군이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했다고 적었다.
그런 비참한 상황은 우금치뿐 아니었다. 충청도의 홍주 서산 목천 문의 연산 논산 보은 괴산을 비롯해 전라도의 원평 태인 해남 강진 장흥 나주 순천 등지, 그리고 경상도의 상주 선산 예천 곤양 진주, 황해도의 재령 평산 해주 개성, 강원도의 영월 평창 정선 강릉 등지에서 대규모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장위영 지휘관 이두황은 논산에서 시신이 “눈에 걸리고 발에 차인다”고 했다. 왜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가.
1894년 11월 척양척왜를 기치로 내걸고 2차 봉기에 나선 동학농민군이 관군 및 일본의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충남 공주의 우금치.
농민군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해 더 이상 재기하지 못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 일본의 경복궁 점령 맞선 동학군의 전국적 2차 봉기
▲ 국제문제 비화 꺼렸던 일본, 신무기 무장한 3개 중대로
수만명 농민군 사실상 ‘학살’
▲ “1만 군병, 전투 뒤 점고하니 3000명, 500명으로 줄어”
전봉준 장군, 회한의 기록
■ 1894년 여름의 위기 상황
1894년 7월23일 새벽, 일본군 제5사단 혼성제9여단의 경복궁 기습사건은 조선 천지를 경악시켰다.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의 현손이 현 아베 신조 총리이다. 그의 딸의 딸의 손자가 아베인 것이다. 아베 총리에게 일본제국의 침략과 전쟁범죄의 반성은 집안의 가해 역사를 반성하는 일이 되지만 그런 생각은 없는 듯하다. 참으로 질긴 악연이다.
일본군 혼성제9여단 병력은 서울 장안을 장악해서 통제했다. 그리고 갑신정변 당시 망명한 친일개화파까지 복권시키고 내정간섭을 자행했다. 군대 주둔과 침략 명분으로 내세운 내정개혁은 그런 속에서 시작되었다.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주장을 받아들여 대경장을 하려던 정부는 갑자기 일본공사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갑오개혁은 정부체제와 사회제도 전반을 과감하게 일신시킨 획기적인 개혁이었으나 일본에 대한 분노로 커다란 반발을 받았다. 이건창 홍승헌 등 강직한 관리들은 벼슬을 내놓고 강화도로 들어가 칩거했다. “아닌 밤중에 일본 군대가 기습해 들어와서 서울의 요소와 궁궐의 안팎을 점령한 것이 무엇이 그리 경사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라 체모를 뜯어 고친다고 하니 이것이 욕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고종을 인질로 잡은 일본의 흉계는 성공했다. 우선 정부 관료와 관군이 반격에 나서지 못했다. 경군은 무장해제를 당했고 지방군은 명령 없이 움직일 수 없었다. 유생의 의병봉기는 관료들이 막았다. “호랑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 집 밖에 있는 사람들이 둘러싸서 잡으려 하면, 집 안에서 마음대로 하게 될 것”이라며 “종사가 보존되어 있고 임금도 탈이 없으니 오히려 소란을 야기하면 화를 입을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경복궁 기습은 첫 번째 전쟁이었다. 아산 풍도 앞바다에서 북양함대를 공격한 청일전쟁과 1904년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한 러일전쟁도 같았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한 태평양전쟁도 그러했다.
갑오년 조선에서 이런 기습에 저항하여 반일봉기에 나선 유일한 세력이 동학농민군이었다. 남접의 봉기령에 동학교단이 기포령을 내려 합세했고,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결집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동학비적’으로 3~4대에 걸쳐 핍박을 받아왔다.
충남 공주시 금학동에 위치한 동학혁명군 위령탑(사적 제387호). | 서성일 기자
■ 왕조 용어로는 전달 불가능한 의미
2004년 국회는 ‘동학농민혁명’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특별법을 제정했다. 법으로 역사적 사건을 재평가하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110년 만에 동학농민군에게 씌운 반역죄가 이 법으로 씻겨졌다.
동학농민군이 한국근대사에 기여한 것이 적지 않다. 신분제 폐지를 제기하고 직접 실천에 나서 사회질서를 근대화시켰고, 최대의 반침략 항쟁을 벌여서 역사에 떳떳하게 서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망국과 국권회복운동에서 더 절망했을 것이다. 한국의 광복에도 동학농민군의 대규모 희생이 찬란한 부활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 조선왕조가 동학과 동학농민군을 용납하지 않은 영향이 컸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사람 사이의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은 이단에 불과했다. 또 무장봉기한 동학농민군은 병란을 일으킨 반란세력에 불과했다.
지금도 가신, 주군, 등극, 하사 등 왕조사회의 시대착오적인 용어가 많이 사용된다. 주권이 국왕에게 있던 사회의 말이다. 그러니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전승된 왕조의 시각은 비판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2차 봉기 당시로 돌아가 보자. 폐정개혁을 주장한 동학농민군을 관군이 제압하지 못하자 청국 군대를 빌려 진압하려고 했다. 일본은 이때를 노렸다. 10년간 국력을 기울여 양성한 군대로 전쟁을 도발할 기회로 판단했다. 일본군의 불법파견과 경복궁 침범은 그런 와중에 벌어졌다.
일본에도 청일전쟁은 국가의 흥망과 관련된 대사건이었다. 동학농민군은 부산~한성간 설치된 일본군의 병참망과 전신망 차단을 시도했다. 그러자 히로시마대본영은 즉시 진압군을 증파했다. 그것이 후비보병 제19대대였다. 일본공사는 조선정부에 강요해서 경군의 지휘권을 빼앗고 일본군에 동행시켰다. 지방관아와 병영도 일본군에게 협조하도록 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전면 항쟁을 준비하면서 지주들에게 돈과 곡식을 강제로 헌납받았고 관청의 무기를 탈취했다. 도처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실이 동학농민군의 평가에 족쇄처럼 영향을 미쳤다.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 마루에서 신영우 교수가 동학농민군과 관군 및 일본 연합군의 전투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 전국서 전개된 2차 봉기… 우금치전투
2차 봉기의 특징은 전국성이다. 조선왕조의 병란과 농민항쟁은 군현이나 도의 경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전국으로 확대됐다. 함경도를 제외하고 거의 전국에 걸쳐 전개되었다.
10월에 들어와 전봉준 장군은 재봉기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전라도와 충청도 인접지역의 남접농민군은 삼례에 집결했다. 교주 최시형도 기포령을 내려 동학 조직을 봉기시켰다. 한 달 뒤인 11월, 충청도 북부와 경기도 그리고 강원도에서 모인 북접농민군은 손병희 통령의 지휘 아래 논산으로 행군해서 남접농민군과 합류했다.
일본군은 1개 중대씩 3대로 나누어 동로군은 충주에서 강원도로 들어가 순회했고, 중로군은 청주로 직행해서 옥천 보은 금산 일대로 남하했다. 서로군은 천안 홍주 공주로 내려갔다. 동학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완강히 저항했다.
전봉준 장군은 북상의 요지인 공주 점거를 당면 목표로 정했다. 그래서 우금치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주전장이 있었고, 보조전장이 있었다. 우금치는 최대 규모의 공격이 감행된 주전장이었다. 공주 이인과 효포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그와 함께 11월22일부터 12월5일까지 홍주와 문의 등지에서 6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모든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였다. 최대의 반일항쟁인 우금치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왕조의 존립은 불가능한 꿈이 되었다.
■ 무기의 격차, 전투는 일방적 학살
일본은 동학농민군이 강원도로 북상하여 국경을 넘어가 국제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꺼렸다. 그리하여 삼면에서 북상길을 막고 전라도 남단으로 몰았다. 히로시마대본영은 반일세력 제거를 위해 학살령을 내렸고, 전라도 장흥 보성 강진 해남 함평 등지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
남해안에 상륙한 해군 육전대와 병참 수비병, 그리고 서울과 인천 주둔병도 학살에 참여했으나 주력은 후비보병 제19대대였다. 이 3개 중대에게 수만명의 동학농민군이 격파되고 수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은 무기의 열세 때문이었다.
청과 전쟁을 벌인 일본군은 무라타총을 지급받았다. 일본에서 개발한 이 최신 소총은 생산이 뒤따르지 못해 후비보병에겐 스나이더 소총을 지급했다. 동학농민군은 관군에게 빼앗은 신식 소총을 일부 갖고 있었지만 탄환 공급이 없는 총은 무용지물이었다. 화승총이 활용 가능한 최상의 무기였고, 그것도 없으면 창과 칼로 무장했다.
겉으로 보기에 전투는 굉장했다. 화승총 소리는 매우 커서 산 위에서 쏘면 산야가 울렸다고 한다. 하지만 치명상을 입는 거리는 불과 수십보 이내였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심지에 불을 붙여서 쏘기도 어려웠다. 스나이더총은 최대 사정거리 1150m, 유효거리 900m. 동학농민군은 멀리서 쏘는 총을 맞아 쓰러졌고, 한 사람이 쓰러지면 도피에 급급했다. 그러면 일본군이 뒤쫓아 가서 쏘아죽이거나 체포해서 처형했다.
당시 일본이 보유한 7개 사단 중 청일전쟁에 5개 사단 이상이 참여했다. 인부까지 포함하면 무려 24만명이 동원되었다. 포병과 공병대 등으로 편성된 사단의 전투력은 막강했다. 겨우 2개 대대가 경복궁과 서울을 침범했고, 3개 중대가 동학농민군 주력을 제압했다.
2014년 동아시아의 군사력은 1894년의 구도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동아시아 3국이 보유한 군대의 역량을 언제나 대비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전의 핵심인 공군과 해군 전력은 살펴보기조차 끔찍하다. 유튜브에 떠다니는 일본의 첨단전투기와 함대는 전율할 정도이다. 유사시 대응전력은 육군만 상상하는지, 그러면 전쟁터는 어디가 될 것인가.
일본군은 스파이가 측량한 정밀지도를 가지고 다녔다. 조선정부의 주요 인물을 협조자로 포섭했고, 정부가 설치한 전신소는 일본군이 장악해 모든 정보를 속속 수집해갔다. 우리 현재의 정보력은 상상하기조차 싫다. 당시 가와카미 참모총장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그리고 서구 열강의 국력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정보력 위에 전략과 전술이 구상되었다.
지금 동아시아 국가들의 군사력 차이를 비교하지도 않고 마구 호언장담하는 유력 인사들이 있다. 마치 청일전쟁을 불러들인 전례를 보는 듯하다. 안타깝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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