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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革命 100년-특집-흔적 無 기억 有-채인택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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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221회 작성일 2017-10-27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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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세상을 뒤흔든 혁명, 흔적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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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1917년 11월 7일 당시 페트로그라드로 불리며 러시아제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동계급 전위론, 민주집중제를 앞세운 볼셰비키(러시아공산당 및 소련공산당의 전신)가 10월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 인류 비극 야기한 거대한 실험
계급혁명과 일당독재 내세운 공산정권 탄생
사유재산 부정하고 국유화, 계획경제 시도해
평등과 완전고용 추구-물자부족, 희생만 불러
대량숙청과 처형-인권 무시한 감시사회,공포정치
중국, 베트남 민족해방혁명 지원-혁명의 세계화
냉전시대 공산세계 축 이루다 경제 실패 속 몰락



[출처: 중앙일보] [러시아 혁명 100주년]세상을 뒤흔든 혁명, 흔적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100년 전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공산정권을 탄생시킨 10월혁명의 현장을 찾았다. 러시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자랑하는 국립 에르미타시 미술관을 이루는 5개의 거물 중 하나인 겨울궁전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황궁으로 사용됐던 로코코 양식의 격조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 흔적은 사라지고 혁명의 기억만이 남았다. 

[출처: 중앙일보] [러시아 혁명 100주년]세상을 뒤흔든 혁명, 흔적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았다

소련 감독 세르게이 아이젠스타인 감독의 영화 '10월'에서 재현된 10월 혁명 당시 적위대가 겨울궁전을 급습하는 장면.

소련 감독 세르게이 아이젠스타인 감독의 영화 '10월'에서 재현된 10월 혁명 당시 적위대가 겨울궁전을 급습하는 장면.

 
볼셰비키, '성공한 쿠데타'로 혁명 권력 장악하다. 
러시아에선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그해 3월, 식량을 비롯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 민중이 봉기해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렸다. 2월혁명이다. 이후 들어선 임시정부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온건파인 멘셰비키가 주도했다. 중심인물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1881~1970)가 임정 수반을 맡았다. 사회민주노동당의 급진파인 볼세비키는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그해 4월 망명 중이던 스위스에서 독일제국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귀국하면서 세력을 불렸다. 결국 레닌은 귀국 6개월 만에 10월혁명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차지했다. 볼셰비키 군사위원장 레프 트로츠키(1879~1940)는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1000명의 적위대가 11월 7일 새벽 2시 임시정부 거점이던 겨울궁전을 점령했다. 이 성공한 '군사쿠데타'로 혁명 권력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며 급진 계급혁명을 주장하던 볼셰비키에 넘어갔다. 
11월 7일은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쓰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의 날짜이고 당시 러시아가 쓰던 구력(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일이라 10월 혁명으로 불린다. 2월혁명도 마찬가지로 구력 2월23일, 그레고리우스력 3월8일에 발생했다.  

[출처: 중앙일보] [러시아 혁명 100주년]세상을 뒤흔든 혁명, 흔적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았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당시 병사들이 거리를 순찰하고 있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당시 병사들이 거리를 순찰하고 있다.

 
자본주의 미성숙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다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역사발전의 단계에 따라 공산주의로 이행한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서 비교적 자본주의 발달이 느린 후발국가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은 이런 아이러니로 출발했지만 필연성도 담고 있다. 당시 러시아제국은 가난과 열악한 노동조건, 빈부격차로 사회통합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로마노프 왕조는 개혁을 거부하고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전제 군주제를 유지하려고 인권과 언론·사상·결사의 자유를 억압했다. 여기에 극심한 희생이 요구되는 세계대전이라는 국난을 겪는 과정에서 지도층의 탐욕과 무능함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 재위 1894~1917)는 국민의 불만을 제대로 어루만지지 못하고 권위와 종교, 그리고 무력에 의존한 가혹한 통치로 민심을 잃고 분노만 촉발했다. 독일 아이히슈타트-잉골슈타트 가톨릭대학의 중동유럽사 담당 레오니트 루크스 교수는 역사잡지인 차이트게시히테에 “2월혁명 당시 당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빵을 달라’ 외쳤다”라고 지적했다. 러시아혁명은 국민이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 정부의 무능과 전제체제의 모순이 빚은 필연적인 결과라는 평가다.  
 
1917년 4월16일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당시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하고 있다.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은 독일제국이 제공한 봉이열차를 타고 귀국했다.

1917년 4월16일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당시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하고 있다.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은 독일제국이 제공한 봉이열차를 타고 귀국했다.

 
피해의식과 강박관념의 '소비에트 제국' 탄생하다
볼셰비키는 10월혁명 이듬해인 1918년 3월3일 1차대전에서 이탈했다. 독일 등 동맹국에 상당한 서부 영토를 넘겨주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고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내전 결과 볼셰비키의 적군 121만 명, 백군 150만 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수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으며 일부는 해외로 망명했다. 내전 과정에서 벌어진 잔혹한 상호 살상극과 보복행위, 그리고 이산가족 발생은 러시아를 비극으로 이끌었다. 러시아 역사학자 드미트리 볼코고로프는 당시의 잔학상이 “제정 러시아 시대의 비극조차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했을 정도로 지극히 비인간적이었다”라고 기술했다.
 
내전은 소련 지도층으로 하여금 자국이 서구 국가에 포위당해 있다는 피해의식을 낳았다. 이는 경제는 물론 군사 분야에서도 서구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낳았다. 이에 따라 소련은 군수산업 중심의 중공업에 집중 투자하고 소비재는 뒷전으로 밀렸다. 아울러 군대를 앞세우는 군사국가의 특성도 갖게 됐다.  
 
1917년 11월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를 병사들이 장갑차를 타고 순찰하고 있다.

1917년 11월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를 병사들이 장갑차를 타고 순찰하고 있다.

그해 11월 1차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백군을 지원해 내전은 국제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미국, 영국(캐나다, 호주,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포함),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일본,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루마니아, 세르비아, 중화민국 등 연합국 지원군이 백군과 함께 볼셰비키와 싸웠다.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에 맞서 싸워 혁명을 수호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는 당시 식민지이거나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던 수많은 약소국가에 ‘민족해방’의 꿈을 심어줬다. 10월혁명은 러시아를 넘어 세계를 뒤흔들었다.  
 
볼셰비키는 1922년 내전에서 승리하고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소련·USSR)을 세웠다. 소련은 러시아 소비에트공화국을 주축으로 옛 러시아제국에서 일시 독립했던 유럽 지역의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와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통합했다. 옛 러시아제국 영역에서 발트3국과 폴란드·핀란드는 제외됐지만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이 나라들을 공격해 핀란드를 제외하고 모두 점령했다. 끊임없는 영토적 야욕을 드러내는 건 제국주의 국가나 나름없었다. 무력을 앞세운 소련의 대외정책은 혁명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를 두고 러시아제국의 팽창주의를 계승한 ‘소비에트 제국주의’로 평가하는 이유다. 
 
볼세비키를 이끌고 10월혁명에 성공해 세계 최초의 공산정권을 수립한 소련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

볼세비키를 이끌고 10월혁명에 성공해 세계 최초의 공산정권을 수립한 소련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

 
소련의 풍경이 된 상점 앞의 긴 줄-인간욕망과 경제원리 무시한 계획경제
볼셰비키는 10월혁명 직후 사회주의 경제의 실험에 들어갔다. 모든 토지와 은행을 국유화했으며 모든 공장의 운영은 노동자로 구성된 소비에트에 넘겼다. 개인 금융계좌와 교회 재산은 전액 국가가 몰수했다. 대외부채는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노동자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시간은 8시간으로 줄였다. 소련은 사적소유를 없애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한 뒤 중앙계획경제체제를 가동했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대신 모든 사람을 고용하고 평등 분배를 하겠다는 볼셰비키의 공약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자발성을 억눌러 경제를 망치는 요인이 됐다. 집중적인 투자와 노력동원 등으로 소련 경제는 1920년대 상당한 성장세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경제를 연구한 헝가리 경제학자 코르나이 야노스에 따르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경제원리를 무시하고 무리한 전시성 중공업 투자와 양적 팽창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과도한 군비 지출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소비재를 중심으로 하는 물자부족과 경제 파탄을 불러 74년 뒤인 1991년 소련이 무너진 핵심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한다. 코르나이는 가격통제, 공금자 중심의 경제 등 시장원리를 무시한 중앙계획경제라는 사회주의 경제방식은 그 구조적인 모순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상점 앞에 선 긴 줄은 소련을 상징하는 풍경이 됐다.  
 
미국과 대결한다던 소련이었지만 국내적으로는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옛 소련 시절 모스크바 한복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상점 앞의 긴 줄은 계획경제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수요가 공급이 지배하는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가격을 정부 통제에 맡기는 바람에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서슬 퍼런 소련의 통제사회도 시장을 이기지는 못했다.  

[출처: 중앙일보] [러시아 혁명 100주년]세상을 뒤흔든 혁명, 흔적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았다



10월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1920년 모스크바의 스베르틀로프 광장에서 대중 연설을 하고 있다. 연단 오른쪽 아래는 볼셰비키의 군사지도자 레프 트로츠키.

10월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1920년 모스크바의 스베르틀로프 광장에서 대중 연설을 하고 있다. 연단 오른쪽 아래는 볼셰비키의 군사지도자 레프 트로츠키.

 
 
소련, 잔혹과 동의어가 되다-전체주의적 인권 말살과 공포정치
소련은 공포정치와 동의어가 됐다. 혁명 직후인 1917년 12월 레닌은 체제수호를 위해 비밀경찰인 체카를 창설했다. 시민을 영장 없이 체포, 구금, 고문, 즉결처형 하는 공안통치와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이는 소련 통치의 특징으로 굳어졌다. 이 조직은 국가정치총국(GPU, 22~53)과 내무인민위원회(NKVD, 34~46)를 거쳐 국가보안위원회(KGB, 54~91)로 간판을 바꾸면서 공산체제 유지의 선봉을 맡았다.  
NKVD는 스탈린 시절인 37~38년의 대숙청 당시 일부 공산당원과 군대, 농민, 소수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적 탄압과 박해, 학살을 벌였다. 공식 통계는 68만 명을 총살한 것으로 기록됐지만 실제로는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까지 대거 숙청해 전력이 심각하게 약화했다. 39년 11월 겨울전쟁(소련군의 핀란드 침공) 당시 소련군은 148만 병력과 6500대의 전차를 동원하고도 33만 병력에 30여 대의 전차를 가동한 핀란드군에 12만 6000명의 병력을 잃는 대참사를 겪어야 했다.  
스탈린이 37년 10월 극동 지방에 거주하는 한인의 대부분인 17만1781명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켜 2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은 것도 대숙청의 일부다. 2000~2009년 레닌과 스탈린, 트로츠키의 전기를 연이어 출간한 로버트 서비스 영국 옥스퍼드대 명예교수는 “레닌은 공포정치의 잔혹상과 혁명의 비윤리성을 보여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소련 붕괴 뒤 KGB의 상당수 기능이 러시아연방보안국(FSB)으로 넘어갔다.  
 
 
소련, 민족해방 지원하다-의도적인 혁명수출과 대립의 냉전시대
중요한 건 10월혁명이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수출됐다는 점이다. 혁명 지도자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의 목적은 세계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라며 세계혁명·영구혁명을 주장했다. 10월혁명의 파장은 전 세계로 번졌다. 혁명 직후 독일과 헝가리 등에서 소비에트국가 건설이 시도됐지만 성공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독일에선 1919년 1월 공산주의자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스파르타쿠스단이란 조직을 이끌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헝가리에선 1919년 3월 볼셰비키를 모델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세운 헝가리 공산당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헝가리 민주공화국을 무너뜨리고 헝가리 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5개월 뒤 무너졌다. 
소련은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을 통해 조직적으로 10월혁명을 수출했다. 무엇보다 중국 혁명에 영향을 끼쳤다. 베이징대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회’란 단체가 결성돼 1919년 5월4일 일제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반정부,반일 운동인 5.4운동을 벌일 당시 참가했다. 그 뒤 1921년 7월 이 단체를 이끌던 베이징대의 문과장(학장) 첸두슈(陳独秀, 1879~1942), 도서관장 리다자오(李大釗, 1888~1927), 전 도서관 사서 마오쩌둥(毛澤東) 등이 코민테른의 지도로 제1차 당대회를 열고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소련의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이 혁명수출을 위해 운영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학생들 사진. 주세죽을 비롯한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뒷줄 맨왼쪽)의 모습이 보인다.

소련의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이 혁명수출을 위해 운영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학생들 사진. 주세죽을 비롯한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뒷줄 맨왼쪽)의 모습이 보인다.

 
소련,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양성하다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 1890~1969)은 1930년 2월3일 중국에서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당했으며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대학은 코민테른이 피지배국 혁명가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운영했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류사오치(劉少奇, 1898~1969)와 함께 조봉암(1898~1959), 주세죽(1901~1953), 허정숙(1902~1991) 등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을 양성했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 6사단장으로 남침해 호남과 진주마산까지 남하했던 방호산(1916~?)도 이 학교 출신이다. 박헌영(1900~1956)과 김단야(1899~1938)는 당시 국제레닌학교에서 혁명을 배웠다. 이 학교는 유고슬라비아의 공산 독재자 브로즈 티토(1892~1980),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1912~94)도 배출했다. 코민테른은 ‘중국 노력자를 위한 중산 공산당 대학(모스크바 손중산 대학)’을 운영하며 중국 혁명가를 양성했다. 보구(博古, 1907~46)를 비롯한 이 학교 유학파들은 30년대 초반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며 중국공산당을 이끌었다. 이 학교 총장인 소련인 파벨 미프(1901~1938)는 코민테른극동대표를 맡아 중국 공산당의 혁명노선을 좌지우지했다. 김일성은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서 대위 계급으로 교육과 훈련을 받다가 해방 뒤 귀국해 북한 정권을 세웠다.  

낫과 망치로 이뤄진 소련 공산당 휘장.

낫과 망치로 이뤄진 소련 공산당 휘장.

 
소련이 무너진 지금,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는 4개국 뿐이다  
10월혁명이 유럽에 수출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점령한 동유럽과 중유럽 지역에 공산위성정권을 강제로 수립하면서다. 이는 현지 민중의 반발을 불러 56년 폴란드 포즈난 봉기, 헝가리 반소반공 봉기, 68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 등이 벌어졌으며 소련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10월혁명은 중남미와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에도 수출됐다.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1926~2016)와 체 게바라(1928~1967) 등이 오랜 게릴라 활동 끝에 1959년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공산정권을 세웠다. 중동·아프리카·동남아의 민족해방운동가들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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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2차대전에서 나치의 침략을 물리친 뒤 승전국이자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그 뒤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대립하며 공산권을 대표하는 패권국가로 군림했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종주국인 러시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는 사라지고 현재 중국·쿠바·베트남·라오스 4개국만  헌법에 이를 명문화하고 있을 뿐이다. 일당독재에 세습독재까지 하고 있는 북한은 2009년 헌법에서 '공산주의'를 빼고 김일성·김정은의 사상을 강조해 '유사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로 분류된다.  
중국은 경제는 시장경제, 정치는 일당독재를 추구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이달 열린 19차 당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조해 주목받았다. 일본의 러시아 문학자 가네야마 이쿠오(龜山邦夫)는 현대사상 10월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허망한 최후를 고려하면 10월혁명으로 세계가 왜 그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지 알 수 없다”고 평가했다. 
 
 
서울=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상트페테르부르크=이기준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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