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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주기-청와대 김신조 일당 기습 불발 사건 및 김정일 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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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266회 작성일 2014-01-22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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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10여년간의 발표된 언론 보도 내용을 종합해 보면?
박정희 대통령 연임 시절이며 남,북한 박정희 vs.김일성 양 체제의 치열한 경쟁이 점점 고조되는 1967년은?
1966년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이라는 세계적인 뉴스 거리가 되었고 남한측에서는
북한 축구와의 아시아 각종 대회에서 맞붙는 것을 피할 정도였습니다. 한국축구는 8년 지난 1974년 불세츨의 스타 차범근과
진도개 별명의 허정무등이 국가대표로 자리 잡은 이후에는 북한과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그런데, 1966년 런던 월드컵 이후
북한측에서는 휴전선 넘어 적지않은 간첩을 남파하곤 하였는 데
그 당시 잡힌 간첩등을 전향시켜
1967년에 육사 15기의 육군 대위 이진삼--후일 육군 참모총장 역임(전두환 계열이 아니고 노태우 계열임)-은 그들의 데리고
휴전선 넘어 북한 군인들을 약 17명 안팎을 죽이고 원대 복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북한 김일성은 분노하게 되고
그의 측근들이 작당하여-후일 김일성은 이 점에 대해 자기네 극열세력들의 계획이었음을 남한측 인사에게 사과한 바 있는 데
김일성 자신이 작당한 일은 아니었다고 얼버무린 적이 있습니다.
하여튼, 지금 글을 쓰는 1월21일 의 46년전의 오늘 북한은
북한 특수 124군 부대에서 엄선한 31명의 무장공비를 서부 전선을 넘어 청와대 쪽으로 침투시킵니다.
그들은 청와대 직전의 세검정 검문소에서 마침 보고 받은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의 제지를 받았지만
최총경 및 일부 경찰을 죽이고 흩어지게 되고 그들중 수류탄 자폭 불발로 잡힌 김신조-후일 반공 강사및 목사가 됨-
를 제외하고 잔당을 모두 사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단 1명이 휴전선 넘어 도망갔고
이 박재경이란 무장공비는 후일 한국의 육군 대장에 해당되는 계급에 오르게 되고
남북한 평화 무드 시절 남한 고위층 주려는 송이버섯 3톤을 가지고 남한측을 방문하는 영화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밝힐 수 없는 중앙정보부의 공작도 일부 있었다고 하며 생포된 사람이 더 있었다가 전향하지않아 죽였다는 일부
풍문도 있고 하였지만 후속보도 불발로 모두 뜬소문으로 남았습니다.
이 68년 당시는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을 본격적으로 하던 시기와 맞물린 동시에
이 1.21청와대기습사건 직후 미군의 정보함 푸에블로 호가 동해안 북한 연안을 정찰하다가 북한측에 나포되는 수모을 당하고
승무원 1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미군은 북한측으로 부터 엄청난 수모을 당하게 됩니다.
그 배는 대동강 강변에 지금까지도 전시하여
구한말 미군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우리 조선군에 의해 대동강에서 불태워진 역사적인 사건을
김일성 조상의 업적으로 미화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이 푸에블로호 피납사건이 바로 청와대 기습사건
바로 며칠뒤에 벌어지는 운명의 68년이었습니다.
그 이후 북한측은 청와대 기습 불발로 북한 고위층이 숙청당하게 되고 이에 대한 후속 조처로
동해안 울진 삼척 지역에 100여명의 무장공비를 보내 한국군과 엄청난 쫓고 쫓기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데
이 와중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당시 이승복 어린이가 무장공비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불행한 일도 벌어집니다.
이 이승복어린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언론인 간에 오랜기간의 진실 공방으로 신문을 어지럽히게 됩니다 지금까지도!년ㅓ 4우
청와대 기습사건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공식 발언에서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입니다!"라는 말을 서슴치 않았고 미군측에서 남북한 일촉 즉발의 위기를 말릴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기습 사건 몇달후 1968년 4월1일 충남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게 되고
북한에 대한 보복책으로 소위 684부대를 창설하고 이들을 실미도에서 특수 훈련을 시키던중
영화 실미도 에서 보다시피 피끓는 젊은 청년들의 반란으로 집단 폭사로 나중에 불행하게 끝을 맺는
실미도 사건이 유한양행 앞에서 버스 저폭으로 마무리 됩니다. 남북 경쟁 시대에서의 불행한 수많은 사건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8년후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으로 미군 장교 보니파스 중위를 도끼를 참살하는 등
2명을 죽이고 도망간 사건이 벌어지는 데 이는 후일 알려지기로는 김일성 후계자인 김정일의 획책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당시 미군은 제 7함대를 동해안에 급파하면서 제2의 6.24전쟁 직전까지 갔으며 김일성이 유감표명선에서 마무리 진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 1983년 10월8일의 아웅산 폭파사건으로 우리 한국의 엘리트 장관급 인사 17명을 폭사시킨 것도 김정일 획책이라고 합니다.
당시 김정일은 후계자 논쟁에서 선점하고자 이런 엄청난 일들을 지속적으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1987년 11월29일의 KAL기 폭파사건도 결국은 김정일 결재하에 벌이는 일이라고 들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아직도 많으나 시간나면 기술하기로 합니다.
 
 
 
************************
 
 
 
‘실미도 사건’ 자폭 피한 훈련병 최후는…
“뼛조각만이라도 제발…” 유족의 눈물 ”원고의 항소를 기각한다.” 지난 17일 서울고법의 한 법정. 재판장의 이 세 마디에 방청석에 앉은 자매의 어깨가 푹 꺼졌다. 판결 선고 후 한참이 지나도록 자매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들은 42년 전 사망한 임성빈씨의 여동생들이었다. 임씨는 1968년 4월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의 부대원으로 선발됐다. 209파견대는 북파 특수임무를 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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