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32년의 숨은 비화 --KBO 이상국 前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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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961회 작성일 2014-01-31 22:37본문
"SK·KIA 프로야구에 참여시키려
청와대로, 문체부로 엄청 뛰었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1.31 00:01
이상국 전 KBO 사무총장,
한국프로야구 32년을 말하다
1975년 해태제과 입사, 1982년 프로 출범 후 야구와 인연… KBO 사무총장 시절 방송중계권·타이틀스폰서 독점계약
이상국(62)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에게 야구는 중독성 강한 그 무엇이다. 천생 애주가인 이 전 사무총장에게 야구와 술 둘 중 하나만 택하라면 주저 없이 술을 팽개칠 것이다. 이 전 사무총장은 “야구계에 투신한 게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 전 사무총장은 해태 타이거즈 야구단 직원과 단장으로 14년, KBO 사무총장 6년5개월, KBO 총재 특별보좌역만 3차례 지냈다. 인생의 절반인 30년을 야구에 바친 그를 만나 가슴속 깊이 묻어뒀던 이야기를 끄집어내 들어봤다.
이상국 전 사무총장은 인터뷰 요청에 “나처럼 말주변도 없는 사람에게, 그것도 현직을 떠난 사람에게 들을 이야기가 뭐냐?”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마침내 승낙을 얻어내 1월 3일 서울 성동구에 있는, 그가 운영하는 작은 사업체의 사무실에서 이 전 총장을 만났다.
이 전 사무총장은 2011년 8월 21일 KBO 총재 특별보좌역을 사퇴하면서 30년 동안 몸담았던 야구계를 떠났다. 자신이 모시던 유영구 전 KBO 총재가 같은 해 5월 물러난 지 석 달여 만이었다. 하지만 야구계를 떠난 지 2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준(準)야구인’이라 할 만하다. 아직도 만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야구인인 까닭이다. 지난 연말에는 김응용 한화 감독·김인식 전 대표팀 감독과 만나 조촐한 송년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1월 1일에는 이순철 SBS 해설위원과 신년회를 겸해 소주잔을 부딪쳤다.
이 전 사무총장의 이력은 특이하다. 그는 ‘아시아의 스프린터’ 장재근을 배출한 광주 살레시오고 출신으로 한국육상선수권대회 단거리 부문을 3연패한 육상인이었다. 성균관대 졸업 후 스파이크를 벗은 이 전 사무총장은 1975년 해태제과에 입사한 뒤로는 ‘판매왕’으로 이름을 떨쳤다. 남들에 앞서 매일 오전 6시에 일과를 시작해 일찌감치 대리점들을 돌았으니 다른 사람들과 경쟁이 될 리 없었다. 저녁에도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야 하는 날엔 아예 회사에서 잠을 자면서 일했다.
세계 최초로 헬멧에 광고 도입한 주인공
그러던 그가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원년에 해태 타이거즈의 홍보과장으로 발탁된 것이다. 야구단 프런트로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 그는 1991년에는 최연소(39세)로 해태 야구단 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야구인으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해태를 떠난 것은 1996년 선동열(KIA 감독)의 일본프로 야구 주니치 진출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박건배 구단주의 뜻을 거스르고 선동열을 일본 최고명문구단인 요미우리가 아닌 주니치로 보낸 데 대한 ‘문책성’으로 사직서를 낸 것이다.
하지만 해태 퇴사는 전화위복이었다. 이 전 사무총장은 1998년 정대철 KBO 총재 특보 자격으로 야구계에 복귀했고, 1999년에는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고(故) 신상우 총재 취임 직후인 2006년 4월 야구계를 떠난 이 사무총장은 2009년 8월 유영구 총재 특보로 임명돼 야구계와 끈을 다시 이었다.
KBO 재직 시절 이 전 사무총장은 한국프로야구의 발전을 위해 굵직한 현안들을 해결해냈다. ▷국내프로스포츠 최초 타이틀스폰서 도입 ▷방송중계권 독점 계약 ▷프로야구 마케팅회사(KBOP) 설립 ▷경찰청 야구단 창단 ▷SK·KIA 야구단 창단 등이다. 이 전 사무총장은 “야구는 선택이 아닌 운명이었다. 야구계에 들어온 뒤로 하고 싶었던 일은 거의 다 했던 것 같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흑자를 낼 수 있는 구단을 운영해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엔 야구선수들의 헬멧에 광고가 붙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구단의 현장 직원들은 모기업의 신제품이 나올때마다 선수 헬멧에 새로운 스티커를 붙이곤 한다. 하지만 프로야구 초창기인 1980년대만 해도 헬멧광고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프로페셔널·마케팅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한 시절이었다.
“헬멧광고는 아마도 제가 세계 최초로 한 일일 겁니다. 이래봬도 해태제과 광고부 출신이잖아요. 야구를 보는데 문득 ‘광고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저만한 곳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TV 카메라에 다 노출되잖아. 그래서 1983년 MBC와 한국시리즈 때 아무도 모르게 헬멧에 ‘써니텐’을 넣었지요. 그런데 난리가 났어요. 이듬해부터 다른 구단도 이를 따라 했고 KBO가 광고문구 크기를 제한했지요. 나중에는 일본·대만에서도 따라 하더라고요.” 이 전 사무총장의 깜짝 아이디어가 한국을 넘어 세계 야구계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프로야구 단장과 KBO 사무총장을 하면서 이룬 일이 많다고 들었어요.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요?
“제가 야구단에 재직했던 14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만 7번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선수단에서 한 일이지 제 공은 아니지요. 해태 때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가 포스트시즌 제도 변경입니다. 1982년부터 1988년까지는 전기리그와 후기 리그로 나뉘어 리그가 운영됐지요.
하지만 1989년부터는 정규시즌 3·4위 간 대결인 준플레이오프, 준플레이오프 승자와 정규시즌 2위가 맞붙는 플레이오프, 여기서 이기는 팀이 정규시즌 1위와 패권을 다투는 한국시리즈 제도를 KBO에 제안해 관철시켰습니다. 이 제도는 이후 미국과 일본에서도 따라 하게 됐어요.”(미국과 일본도 한국의 준플레이오프와 비슷한 와일드카드,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김응용 감독과 야구 얘기는 일절 안 해
해태에서 프런트와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7회 합작한 김응용 감독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합니다. 당시 어떻게 김 감독을 영입할 수 있었습니까?
“프로야구 출범 원년이었던 1982년 해태는 감독 없이 대행체제로 거의 한 시즌을 보냈습니다. 창단감독이었던 고 김동엽 감독이 시즌 초반 일찌감치 사퇴하고 조창수 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앉혀 한 시즌을 보냈던 거죠. 해태는 어느 팀보다 감독이 절실했었습니다. 시즌 말미에 이용일 전 사무총장(전 KBO 총재 직무대행)에게 도움을 요청했죠. 그랬더니 이 전 사무총장이 재일교포인 이충남 씨를 추천하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 형편에 어떻게 일본프로야구 거물인 이충남 씨를 모셔올 수 있었겠어요? 결국 포기하고 박건배 구단주를 설득해서 당시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김응용 전 한일은행 감독을 모시고 온 겁니다. 이 전 사무총장에게 물론 양해를 구했고요. 만일 그때 해태가 김 감독을 영입하지 않았다면 다른 팀에서 모셔갔을 거예요. 사실 김 감독은 프로야구 원년에도 6개 구단의 유력한 감독 후보 중 한 명이었거든요.”(이충남 씨는 1983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한 시즌을 지휘했다)
김응용 감독과 해태에서 함께 보낸 시간만도 만 13년입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많을 것 같은데요?
“그 오랜 시간 김응용 감독과 함께 생활했지만 단 한 번도 야구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없어요. 이유가 뭐냐고요? 야구는 전문가가 하는 것 아닙니까? 감독이 전문가이지 프런트가 전문가는 아니잖아요. 전문가가 하는 일에 갤러리(관객)가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잡음만 낳을 뿐입니다. 야구계에서 30년을 살면서 수많은 기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감독의 작전·기술 같은 것에 대해서 일절 말하지 않았어요. 해태가 가난했지만 프런트와 선수단의 갈등이나 불화 같은 게 없었고 그 덕분에 좋은 성적도 낼 수 있었다고 봅니다. 김 감독도 프런트에 대해 다른 말은 없었어요. 이따금 ‘너무 짜다’는 말 빼고는요.”(웃음)
해태의 박한 연봉이 언론에 자주 거론됐습니다. 그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많았을 텐데요.
“원년부터 해태를 취재하던 한 기자가 어느 날 저에게 다가와서 기사를 쓰겠다고 해서 ‘무슨 기사냐’고 물었더니 ‘해태가 선동열 연봉 주려면 해태 껌을 길바닥에 깔아 잠실야구장에서 광주구장까지 두 번 왕복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씁쓸했죠. 그래도 어떡합니까? 말려야죠.
‘박 기자, 왜 그래요? 우리 형편 잘 아시는 분이.’ (김)응용이 형도 삼성 감독으로 옮긴 뒤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 총장, 해태에서 9번 우승하고 받은 보너스 다 합친 거랑 2002년 삼성에서 한 번 우승하고 받은 보너스랑 같더라고.’ 그때 해태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고요.”
해태 단장, KBO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여러 선수와 친분을 쌓았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를 꼽는다면요?
“많은 선수와 두루 친분이 있지요. 야구계에서 30년을 보냈는데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최고를 꼽으라면 투수 중에선 선동열과 최동원, 내야수로는 이종범, 외야수로는 이순철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이순철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기량도 기량이거니와 개성이 참 강했거든요. 요즘 말로 하면 까칠하다고 할까요? 나이를 먹었지만 요즘도 까칠하잖아요.
시즌 후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선수들과 술자리를 하곤 했는데 순철이는 늘 ‘동열이가 산 술은 안 먹겠다’고 버텼어요. 그만큼 자존심이 셌죠. 동열이와 순철이는 81학번 동기이자 라이벌이었어요. 동열이는 광주일고, 순철이는 광주상고를 나왔고 대학도 동열이는 고려대, 순철이는 연세대 출신이잖아요. 입단 첫해였던 1985년에는 신인왕 경쟁도 했고요. 순철이가 ‘동열이 술은 안 먹겠다’고 하는 바람에 술값은 주로 제가 냈죠. 지금은 물론 달라졌지만요.”
선동열 KIA 감독과는 선수 시절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동열이도 동열이지만(이 전 사무총장은 공식석상에서는 선동열 감독이라고 하지만 편한 자리에서는 동열이라고 부른다. 30년 전부터 그렇게 불렀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동열이 부친인 고 선판규 씨가 기억에 선합니다. 1985년에 입단한 동열이는 이듬해에 24승6패6세이브에 방어율 0.99의 걸출한 성적을 올렸어요.
대학생들 사이에서 ‘학점이 선동열 방어율’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 것도 이때부터일 겁니다. 동열이가 전무후무한 성적을 올린데다 팀도 한국시리즈에서 3년 만에 우승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연봉 협상이 큰 숙제였던거죠. 앞서 몇 차례 말했다시피 해태는 살림이 정말 넉넉지 못했어요. 아무리 잘한 선수라도 팍팍 올려줄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던 거죠. 동열이 부친은 아들의 대리인 자격으로 협상 테이블에 나와 7천만 원을 요구했고, 저는 5천만 원을 제시했죠.
1986년에 동열이 연봉은 2400만 원이었고요. 사실 다른 구단 같았으면 시원하게 올려줬을 테고, 다른 선수들 눈치가 보였다면 연봉이 아닌 보너스로라도 7천만 원을 채워줬을 겁니다. 하지만 해태는 그럴 수 없었기에 결국 6천만 원이 절충안이었는데 동열이 부친은 ‘선동열 등판하는 경기에 광주구장 무료입장’을 추가 조건으로 내걸었죠.
하는 수 없이 구단은 동열이를 KBO에 임의탈퇴선수로 등록하며 압박했고, 개막 직전인 4월 2일에야 간신히 계약이 이뤄져서 1987년에 동열이가 뛸 수 있게 된 겁니다. 52일간의 줄다리기였죠. 성적만큼 오르지는 못했지만 동열이는 1991년 재일교포를 제외하고 국내 프로야구선수 최초로 연봉 1억 원(1억500만 원) 시대를 열었습니다.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네요.”
연봉협상의 귀재요? 폭탄주 먹여 설득
요즘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게 되면 몸값이 어마어마하지요? 지난해 말에도 롯데 강민호·한화 정근우·이용규 선수가 4년 최대 70억 원 안팎의 초대형 계약에 성공했잖아요.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지 않습니까?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희한한 규정이 많았어요. 요즘 같으면 말이 안 되는 규정이지만 악법도 법이라고 그때는 중요한 원칙이었죠. 성적을 아무리 잘 내도 전년도 연봉의 25% 이상을 올려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이었습니다. 선수들의 연봉 부담을 덜기 위해 구단들이 이런 편법을 만들어냈겠지만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일반인들에게 위화감이 조성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일부 넉넉한 구단은 보너스 형태로 선수들의 주머니를 채워주기도 했죠. 물론 해태에는 먼 나라 이야기였지만요. 이런 인상폭 제한 규정 때문에 연봉 협상 중에 일부 구단에서는 직원과 선수 간에 멱살잡이를 하기도 했죠. 이런 시절에 해태가 우승을 자주 하면서 나머지 구단 선수에게 연봉 협상의 모델이 된 겁니다.
그런데 우승팀 선수들이 너무 초라한 연봉으로 덜컥 계약을 해버리니 다른 팀 선수들이 대놓고 원망을 하기도 했었죠. 인상폭 상한선이 정해져 있으니 협상 테이블이 마련돼도 대다수 선수는 큰 의욕을 갖기 어려웠어요. 이를테면 연봉 1200만 원을 받고 입단한 신인이 다섯 시즌 연속 25% 인상돼도 3천만 원에 불과한 거죠.
더 기막힌 건 지방 구단의 경우 사무실이 대부분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연봉 협상을 하려면 서울로 올라가야 했죠. 그나마 인상 대상자는 즐거운 마음에 비행기를 탔겠지만 삭감 대상자는 죽을 맛이었겠죠. 왜냐면 교통비까지 오롯이 선수가 부담해야 했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2년 차 징크스라는 게 유행이었는데 연봉 협상에서 진을 뺀 신인들이 회의감을 느끼다 보니 이듬해에 부진에 빠진 경우도 있다고 봐요.”
이 전 사무총장은 연봉 협상의 귀재로 불리지 않았나요? 특별한 노하우나 원칙 같은 게 있었습니까?
“해태 단장 때 선수들과 잘 어울렸죠. 술도 엄청나게 먹었죠. 특히 연봉 계약 때는 음주계약이 불문율이 됐을 정도예요. 대낮 폭탄주 협상도 마다하지 않았죠. 김성한·선동열·이순철 같은 스타들을 술집으로 불러낸 뒤 빈속에 일단 폭탄주 몇 잔 먹이는 겁니다. 잔이 몇 잔 오가면 취기가 돌면서 정신도 느슨해지게 마련이죠. 그러다 보면 결국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됐고요. 폭탄주 협상에 번번이 당하던 동열이가 “앞으로는 술 먹고 절대 협상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놓고도 또다시 ‘음주계약’을 하더라고요.
해태는 성적은 최고였지만 연봉은 전체 구단 중 중하위권밖에 안 됐잖아요? 선수들한테는 지금까지도 미안하죠. 정말 고마웠던 것은 협상 때 선수 대부분이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와줬다는 겁니다. 그래서 1991년 단장으로 승진한 뒤로는 한 선수도 예외 없이 제가 직접 연봉 협상에 나섰습니다. 단 한 명도 구단 직원에게 협상을 맡기지 않았어요. 가뜩이나 연봉도 박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았겠어요?”
프로야구 출범 당시 평균연봉은 1200만 원 정도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작은 금액이 아니었겠지만 어떤 근거로 그 금액이 책정됐습니까?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만 해도 직업의 안정성과 흥행을 보장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프로야구가 시작되긴 했지만 1, 2년 후 문을 닫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죠. 실업야구 스타들 중 상당수가 프로야구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래서였죠. 프로야구 원년 선수들(141명)의 평균연봉은 1215만 원이었는데 셈법은 이랬습니다.
1981년 한국화장품에서 활약한 ‘홈런왕’ 김봉연(해태)의 연봉과 상여금이 총 480만 원이었습니다. 당시 김봉연은 실업선수 중 최고연봉을 받는 선수였죠. 그런데 정년을 보장할 수 없는 직업 특성상 몇 년간 벌 돈을 1년에 챙겨줘야 한다는 결론을 KBO가 얻은 거죠.
이에 따라 미국프로야구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박철순(OB)과 아마야구 스타 김재박(MBC)이 최고연봉인 2400만 원을 받게 됐어요. 둘뿐이었죠. 김봉연의 연봉도 1800만 원이었으니까요. 당시 2400만 원이면 서울 강남의 99.1㎡(30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어요.”
건국대 시절부터 초대형 스타였던 이종범을 1993년에 계약금 7천만 원에 영입했을 때도 아파트 한 채 값 얘기가 나왔었죠?
“광주일고 졸업 후 건국대에 진학한 이종범은 1학년 때부터 군계일학의 기량을 뽐냈습니다. 이종범을 보면서 ‘앞으로 우리 팀 유격수 자리는 10년간 걱정이 없겠다’고 생각했죠. 윤동균 OB 감독은 이종범을 보더니 ‘당장 일본에 가도 통할 재목’이라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지요. 이종범이 건대 4학년이던 1992년 10월 초, 해태 스카우트 실무자와 이종범 측이 협상 테이블을 차렸습니다. 이종범과 함께 집안 어른도 동석했고요. 이종범 측은 우회적으로 큰 것 한 장(1억 원)을 바라더군요.
스카우트 실무자는 한동안 뜸을 들이다 ‘젊은 나이에 집 한 채 장만하면 성공한 것 아닙니까? 아파트 한 채로 하시죠’라고 제안했어요. 설명을 들은 뒤 이종범 측도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 일사천리로 계약이 진행됐죠. 그런데 이종범의 계약금은 1억 원이 아닌 7천만 원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시내 99.1㎡짜리 아파트 한 채 값이 7천만 원 안팎이었거든요.
사실 구단에서도 이종범 정도 되는 선수를 스카우트하려면 1억 원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종범 측이 ‘아파트 한 채라면 그래도 괜찮다’고 해서 7천만 원에 도장을 찍어준 겁니다.”(이종범과 입단동기이자 라이벌이었던 이상훈은 계약금 1억8800만 원에 LG 유니폼을 입었다)
신인 스카우트 욕심부려 동문회에서 제명될 뻔
1984년 해태는 광주일고 투수 문희수에게 호랑이 유니폼을 입혀 말들이 많았죠? 이른바 프로야구 최초의 고졸신인이었는데요.
“고등학교 때 문희수(동강대 감독)가 야구를 정말 잘했잖아요. 3학년이던 1983년 광주일고를 전국대회 3관왕에 올리지 않았나요? 그래서 ‘저 친구를 해태에 입단시켜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죠. 그런데 문희수는 동국대 입학 예정자였어요. 당시만 해도 고등학생이 대학을 거치지 않고 바로 프로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죠. 선수도 생각 못했고, 다른 구단도 생각 못했지만 저는 문희수에게 해태 유니폼을 입혔어요.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요. 문희수에게 공을 들이던 김인식 동국대 감독이 단단히 화가 난 겁니다. 아시다시피 해태와 동국대의 인연이 보통입니까? 동국대 출신인 김성한은 이미 해태 선수이지만 이건열·백인호·박철우 같은 2~3년 내 입단 예정자가 재학 중이었거든요. (김)인식이 형의 마음을 상하게 해선 곤란하죠. 그래서 찾아 뵙고 ‘죄송하게 됐다’고 머리를 숙였더니 노여움을 조금 누그러뜨리더라고요.
그 일이 인연이 돼서 1986년에 인식이 형을 해태 수석코치로 모셔왔고, 인식이 형이 온 뒤로 내리 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어요. 지금 KIA 코치인 신동수를 데려올 때는 동문회에서 제명될 뻔하기도 했죠. 광주상고 왼손투수 신동수는 1986년에 제 모교인 성균관대에 입학하기로 돼 있었고, 1985년 가을에 성대 야구부 전지훈련까지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구단 스카우트를 강원도 설악산으로 보내 신동수를 납치해오게 한 거죠. 그랬더니 성대체육회에서 ‘이상국을 제명하겠다’는 말까지 나오더라고요.”
야구계에서는 SK와 KIA 창단을 이 전 사무총장의 가장 큰 공으로 꼽습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로 프로야구단을 새로 창단하기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죠?
“1999시즌을 끝으로 전북을 연고로 하는 쌍방울이 문을 닫았죠. 외환위기 후유증을 이기지 못한 거죠. 쌍방울 해체가 기정사실화되자 정동영 민주당 의원 등 전북을 연고로 하는 주요 인사들도 다른 기업을 유치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어요. 정 의원은 저한테 몇 차례 전화를 걸어 ‘전북 연고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IMF 한파 직후라 경기가 워낙 안 좋았잖아요. 누구도 선뜻 프로야구단을 운영하지 않으려 했어요.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면 연간 적자가 100억 원은 기본 아닙니까? 더구나 전북을 근간으로 하는 기업 중 프로야구단을 운영할 만한 곳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어요. 쌍방울이 무너지면 8개 구단체제가 붕괴되고 그렇게 되면 프로야구가 크게 위축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죠. 그래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손길승 SK텔레콤 회장 이런 분들에게 도움을 청했지요.
KIA가 탄생하기까지는 정몽구 회장의 통 큰 결단이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SK 야구단이나 KIA 야구단은 없었을 겁니다. 8개 구단 체제만은 지키기 위해 제가 청와대에도 들어가고 문화관광부도 여러 번 찾아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열심히 뛰어다녔던 것 같아요.”
SK와 KIA는 2000년과 2001년 잇달아 프로야구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SK는 창단이었던 반면 KIA는 인수였습니다. 어떤 차이점 때문이었습니까?
“모기업의 부도로 살림이 궁핍해졌다는 점은 같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쌍방울과 해태는 많이 달랐습니다. 쌍방울은 야구단 연명을 위해 김기태·조규제·박경완·김현욱 등 주축선수들을 거의 다 팔았습니다. SK가 창단이 아닌 인수를 택했다면 선수를 특별 수급해줄 방법이 없었고, 그랬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바닥을 헤매고 있을지 모릅니다.
저 역시 SK가 전북 연고를 승계해주길 내심 원했지만 SK에서는 수원이나 인천을 강력히 희망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인천을 연고로 하던 현대가 서울 입성의 전 단계로 임시거처인 수원으로 홈을 옮기면서 SK가 자연스럽게 인천에 둥지를 틀 수 있었습니다. 해태는 쌍방울과 많이 달랐죠.
마무리투수 임창용이 1998년 말 양준혁과 트레이드돼 삼성으로 가긴 했지만 나머지 선수는 거의 다 자리를 지키고 있었죠. 또 KIA는 SK와 달리 연고를 옮기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KIA는 정확히 표현하면 새로 창단한 것이 아니라 해태를 인수한 거죠. 해태 멤버가 고스란히 유지됐기 때문에 KIA가 출범 이듬해인 2002년 정규시즌에서 2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2011년 8월 KBO 총재 특보를 끝으로 공식적으로 야구계를 떠났는데, 그 뒤로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조그마한 사업체를 하나 운영하면서 밥은 먹고 삽니다. 시간이 날 때면 야구인들과 자주 만나요. 지난 연말에 김응용 감독·김인식 감독과 만나 송년회를 가졌고, 선동열 감독·이순철 SBS 해설위원과도 저녁식사를 함께했어요. 김광철 전 KBO 심판위원장도 연배를 떠나 술친구고요. 이종범 한화 코치도 참 좋아하는 후배인데 나이 차이(18년)가 많이 나서 그런지 술자리는 별로 없었던 것 같네요. 이따금 연락은 주고받지요. 야구계를 떠나긴 했지만 제 주변에는 여전히 동열이도 있고, 종범이도 있지요.”
동열이도 있고, 종범이도 있고
아직 야구계에 미련이 있을 텐데 만일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으세요?
“지방구장 가운데 열악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 대구·광주·대전구장입니다. 그 셋 중 광주는 숙원을 마침내 이뤘죠. 올해부터는 새 구장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에서 야구를 하지않습니까? 새 구장은 좌석이 2만2000석, 최대 수용인원이 2만7천 명입니다. 초현대식 구장이 들어섰는데 평균 관중이 1만6천~1만7천 명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태는 1994년 그 낡은 무등경기장을 홈으로 사용하고도 경기당 평균 7700명의 관중을 유치했어요. 1만 명이 최대 수용인원이었으니까 사실상 매 경기 만원이었던 셈이죠. 관중이 많이 와야 구장 내 매점·식당·펜스광고·주차장 등 부대사업도 잘될 수 있습니다.
매 경기 1만6천 명 이상 들어오고, 펜스광고 등 부대사업을 잘하고 여기에 KBOP의 마케팅 수익 배분, KBO의 중계료 할당 등을 더하면 연간 200억 원의 매출은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이건 제가 KBO에 있을 때부터 구상했던 것으로 이렇게만 되면 우리 프로야구단도 흑자, 아무리 못해도 수입과 지출을 맞추는 구조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야구단은 모기업의 홍보 수단이니 적자가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이제 고쳐야죠.”
글·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사진·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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