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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황제-영원한 國手-조훈현 vs. 포커 황제 올인^^차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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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029회 작성일 2014-01-14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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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간 1904승 9무 810패

 

 

         “내 바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사입력 2013-10-09
 
 
 
2000승 향해 전진하는 ‘반상의 황제’ 조훈현 9단
 
 
 
 
 
 
 


 
조훈현 9단이 어느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1900승 고지에 우뚝 올라섰다. 사상 최연소인 9세 7개월에 입단한 뒤 50년 11개월 만이다. 세계 바둑계를 호령하며 많은 기록을 양산한 그는 “가능하면 100승을 더 채우고 싶다”고 말 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바둑판 위에서 50년 11개월간 수많은 승부사들과 싸운 조훈현 9단(60),
그가 1900승을 넘어섰다.
세계 어느 기사도 가보지 못한 경지다.
2013.10.8일 현재
 
 
공식 전적은 1904승 9무 810패.
 
 
 
승률 70%
 
 
 
****************
 
 
일본 최다승인 조치훈 9단(1423승)
 
 
그를 따라잡을지 의문이고,
 
 
제자 이창호 9단(1646승)도 아직은 멀리 있다.
***********
전성기 때와 같은 갈채는 사라졌지만
조훈현은?
마라토너처럼 꾸준히 2000승을 향해 달리고 있다.
속도는 많이 더뎌졌지만…. 7일 서울 청계천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앞으로 5년 또는 10년, 아니면 아예 이루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100승을 더 채우고 싶다”고 말했다. 》

만 9세 7개월에 최연소 프로가 된 그는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
 
 
‘조 제비’
 
 
 
‘전신(戰神)’
 
 
 
‘바둑황제’
‘영원한 국수’
로 불리며 팬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올해 57기를 맞은 국수전에서 16차례나 우승했던
그는 여전히 ‘국수’로 불린다.

조 국수에게 기억나는 몇 장면을 꼽아 달라고 했다.
“1989년 초대 잉창치(應昌期) 배에서
중국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섭,접)衛平)을 누르고 우승한 것”이라고
먼저 꼽았다.
당시 그는 불리한 여건에서도 극적으로 우승해
바둑의 변방이던 한국을 일약 중앙으로 끌어올렸다.
바둑계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들썩인 사건이었다.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고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또 10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9단의 내제자로 들어간 일,
27세에 처음 전관왕을 해낸 일,
31세에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인 일,
49세에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에서
최고령 우승한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세고에
 
 
ㄱ.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와
 
 
ㄴ.우칭위안(吳淸源), 그리고
 
 
 
 
ㄷ.조훈현
 
 
 
단 세 명만 제자로 받았다.

조 국수의 바둑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두 기사
서봉수 9단과 이창호에 대해 물었다.
동갑 서봉수와는 15년간 300여 차례나 겨뤘다.
조훈현이 2 대 1 비율로 우세했지만
서봉수는 늘 그 앞에 다시 섰다.
서봉수에 대해서는 “승부 근성이 뛰어난 기사”,
이창호에 대해선
“처음에는 둔하게 보였지만 눈에 안 보이는 천재”라고 말했다.
언젠가 이창호에게 “왜 승부사가 물러서기만 하느냐”고 질책 섞인 질문을 했더니
“‘싸우다 보면 1%라도 질 가능성이 있는데 물러서면 반집이라도 이기는 길이 보여 그랬습니다’라고 어눌하게 답해
머쓱했던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
올해 4차례 세계대회 개인전에서 모두 중국에 우승컵을 내줄 정도로 부진한 한국 바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요즘 중국에선 바둑학원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국가의 지원도 탄탄하다. 그게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우리의 바둑 인기는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일본처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대표 상비군 체제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이세돌 등 정상권이 더 버텨줄 것이라 믿는다.”

그는 바둑계에서
운전면허와 신용카드, 휴대전화가 없는 ‘3무(無)’로 유명하다.
이에 대해 묻자 “이제는 1무다. 운전면허까지 따야 할지 고민”이라며 웃었다.

―정상에 오래 머물렀고 세계 최강의 제자도 길러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여전히 성적을 내고 싶다. 제자도 키우고 싶지만 그 일은 여건과 인연이 맞아야 한다.
그동안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돌려줄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아마추어가 있기에 프로가 있는 것이다.”

자녀에게 바둑을 가르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부인 정미화 씨와의 사이에 1남 2녀.
“바둑의 ‘끼’가 없었다.
억지로 가르쳐서 크게 될 수는 없기에 일찍 포기했다”고 말했다.

―끝으로 조 국수에게 바둑은 무엇인가.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다.
돈을 벌 수도 직장에서 성공할 수도 있다.
돌아보면,
 
 
나는 네 살 때 아버지 품에서 바라본
 
 
바둑이 좋아 택한 길이다.
 
 
어떤 분야든 누구든지 끝까지 가다 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본다.
또 정상은 어떤 면에서 서로 통한다.
이런 인생도 저런 인생도 있는데 나는 그중 하나를 걸어갈 뿐이다.”

조 국수는 골프 때문에 뜸해졌지만
요즘도 체력 단련을 위해 평창동 집 근처에 있는 북한산을 오른다.

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조훈현 9단

 

 

     개인통산 1900승 고지 넘었다

영원한 승부사’ 조훈현 9단이 통산 1900승 고지를 넘어섰다.

한국기원은 지난 2일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제7기 지지옥션배 여류대시니어 연승대항전 본선 17국에서
최정 3단에게 260수 만에 흑으로 거둔 반집승이 바로 1900승째였던 것을 확인했다. 이는 한국기원은 물론 세계 바둑계에서 전인미답의 기록이다. 조훈현 9단은 ‘걸어다니는 기네스’라는 명성에 걸맞게
‘최다대국(2719국)’, ‘최다승(1901승)’, ‘최다타이틀(158회)’-나중에 대주배 추가 159회-2위 이창호140회, 단일기전 연속우승(패왕전 16連覇)’, ‘한국 최초의 9단(1982년)’ 등 수많은 기록을 보유중이다.

1953년 3월 10일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난 조9단은 1962년 10월 14일 제16회 입단대회를 통해 아홉 살의 나이로 세계 최연소 입단관문을 통과했으며 이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듬해인 1963년 10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故 세고에 겐사쿠 9단 문하생이 되었고 1966년 7월 일본기원 입단대회 도 통과해 초단을 취득했다. 군입대 문제로 10년에 걸친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1972년 3월 귀국해 본격적인 한국에서의 바둑생활을 시작했다.

공군 복무시절인 1974년 1월 20일 제14기 최고위전 도전기에서 김인 7단(당시)에게서 승리를 거두며 첫 타이틀을 쟁취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대회 147회, 세계대회 11회 우승으로 총 158회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대주배 추가로 이젠 159회이고 그 다음 2위가 140회의 이창호임) 특히 1989년 제1회 응씨배.에서 중국의 녜웨이핑 9단과 겨뤄 3-2의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컵을 차지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영원한 승부사 조훈현 9단의 승부세계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지난 3일에는 제7기 지지옥션배 여류대시니어 연승대항전 본선 18국에서 김수진 사범을 꺾고 1901승을 거뒀으며 이 대회를 통해 연승행진을 이어갈 예정이다.

전경우 기자 kwjun@sportsworldi.com
*****************

[O2/인터뷰]

 

 

‘올인’의 실제 주인공 차민수의 고백

 
 
 
입력 2011-05-15 10:10:00
 
 
 
 
 
이병헌이 주인공으로 나온 TV 드라마 ‘올 인(All In)’의 실제 주인공 차민수 프로바둑 4단(60)은 잘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그의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이고, 어려서 운동한 덕에 몸매도 탄탄하다. 그는 여전히 카지노 관련 업무를 하고 있고, 한국기원에서 바둑팀 감독으로도 뛰고 있는 잘나가는 현역이다.

그런 그에게 1984년 겨울은 시련의 시기였다. 미국 생활 8년차(당시 33세)였던 그해 1월 그는 막막했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갔더니 열쇠가 맞지 않았다. 부인이 열쇠를 바꾼 것으로 사실상 이혼 통고였다.
1976년 미국으로 이민 가 리커스토어(주류판매점)를 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안정을 찾았지만 카지노를 드나든 게 화근이었다.
여기에 부인과의 성격 차이도 한몫해 가정은 파탄 직전이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 새 출발을 다짐했다.
그러나 한번 금 간 결혼생활은 선을 넘어 버렸다. 결국 아내에게 전 재산과 아이들을 넘기고 이혼했다.

○ 어머니의 문전박대 “모자 인연 끊자”

얼마 뒤 빈털터리로 귀국했다. 어머니 집을 찾았으나 돌아온 것은 냉대뿐이었다.

“그 많던 재산 다 넘겨주고…. 나이 삼십도 넘은 놈이…. 집에서 나가라.” 그의 가방은 마당으로 던져졌다. 귀염받던 막내아들인 그의 상심은 컸다. ‘모자의 연을 끊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허름한 여관에서 5, 6개월을 지냈다. 인생 밑바닥이었다.
명색이 프로기사였지만 바둑으로 생활할 형편도 안 됐다. 주변에선 미국에서 잠깐 집에 들르러 온 줄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먹고살 게 없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해 7월 어머니가 김포공항에서 3000달러가 든 봉투를 건넸지만, 그는 그 봉투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연락하지 말고, 유산도 남기지 말라”고 모진 말을 하고 떠났다.
그리고 나중에야 어머니 부탁을 받고 자신을 찾아온 누나에게서 어머니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몇 달을 울고 지냈다. ‘너는 누나가 돼서 동생 생사도 모르고 있느냐. 어서 찾아가 봐라’고 말했다”고 했다.
어머니와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화해했다. 당시 사업도 하던 그의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와는 달랐다. 입술을 깨물고 그를 극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혼당한 데다 집에서도 쫓겨난 차 4단의 마음에는
오직 성공이라는 두 글자밖에 없었다. “세상은 어차피 홀로 서야 한다. 이제는 성공해서 보여줄 것이다. 이후로는 철인으로 변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의 수중에는 18달러밖에 없었다. 그는 절박했다.
20달러 내기바둑으로 돈을 모아 1600달러를 만든 뒤 다시 카지노에 입성한다.
그때 그의 카드 실력은 바둑으로 치면 강1급 정도.
이미 1970년대 말 카드의 고수인 스승 2명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실력이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포커학 교수인 치프 존슨과 단 게롯이 그들이었다.
아마 바둑 3단 정도인 존슨에게는 바둑을 가르치는 대가로 포커를 이론적으로 배웠다.
‘포커는 확률’이란 점을 깊게 새겼다.
주한미군 출신으로 ‘미캐닉(기계·우리말로 타짜)’으로 불리던 게롯에게는 김치를 갖다 주며 인간적으로 친해져
그의 카드 사기기술 수백 가지를 배웠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실력으로 카지노업계에서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톱클래스가 되기 위해 그는 이를 악물고 실전경험을 쌓아간다.

○ 실력 차이 많이 나는 포커는 ‘학살’

2년 뒤인 1986년부터 그는 카지노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해부터 1997년까지 포커게임 수입 1위를 기록한다.
당시 한 해에 250만 달러에서 4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한 해 100만 달러를 넘게 버는 갬블러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많이 나갔다.

“포커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틀렸다. 사실 실력이 100%다.
바둑이나 골프 같은 운동은 잘 못하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지만, 포커는 핸디캡을 주는 경우가 없다.
바둑으로 치면 프로나 아마추어나 모두 맞바둑을 두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들이 같이 포커를 친다는 것은 사실상 학살에 가깝다.”

차 4단은 “바둑에 기재가 있고, 연예인에게 끼가 있듯이 카드에는 카드를 이해하는 독해력, 즉 ‘카드센스’가 있어야 한다”며
“숫자에 대한 감각은 물론이고 승부근성과 배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배짱이 지나치면 만용이 된다고 충고한다.

“내 승부근성은 어려서 기원에 다닐 때 했던 내기 사탕바둑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기원 할아버지가 먼저 사탕을 듬뿍 주고는 내기 바둑을 두자고 했는데, 사탕을 뺏기기 싫어 악착같이 뒀던 것 같다. 사탕을 잃으면 얼마나 분하던지….”

○ 조훈현과 100여 차례 대국

그가 바둑을 배운 것은 일곱 살 때.
이종사촌 형들의 바둑을 어깨너머로 보다가 기원에서 본격적으로 바둑을 배웠다.
당시 기원을 다니는 아이가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4남매의 막내로 유복자인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려 했다.
그의 집은 예식장을 하다가 영등포 경흥극장을 운영하기도 했던 부잣집이었다.
그는 어려서 15가지를 배웠다.
당수 쿵후 수영 탁구 같은 운동뿐 아니라
피아노 기타 바이올린 등 악기도 부는 것 빼고는 거의 배웠다.
한때는 바이올린으로 대학을 가려 했을 정도다. 대학 때 피아트 자동차를 몰기도 했다.

그는 혼자 하는 모든 게임에 강했다.
미국 이민 첫날에 조카들로부터 체스의 룰을 듣고 나서는 맞붙어 곧바로 이겼다.
바둑 장기의 고수이기에 가능했다.
 
고3 때 그는 고1인 서봉수와 기원에서 만난다.
 
 
당시에는 3점을 접어줬으나 얼마 안 돼 맞바둑이 됐다.
서봉수는 1970년 입단했고, 차민수는?
그는 74년 입단했다.
그해 그는 공군에 입대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친구가 많지 않던
조훈현 당시 6단과 만난 것도 그해였다.
100차례 이상 바둑을 뒀다는 둘은 지금도 막역한 사이다.

그는 1997년 프로 갬블러 세계를 떠난다.
“그해 어머니가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가장 귀여워했지만 불효했던 내가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포커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외국인들이 돈을 쓰도록 하기 위해서는 카지노를 늘려야 한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런 때문인지 2005년에 한국관광공사 카지노회사 상임이사가 됐다.
서울힐튼호텔과 부산롯데호텔에서 문을 여는 외국인 전용 카지노의 영업과 객장관리를 한동안 맡기도 했다.

“카지노라는 게 종합엔터테인먼트산업인데
단순히 도박산업으로만 생각하는 게 안타깝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수입의 15% 정도만 카지노 수입이다.
그 1.5배가 회의 등 각종 컨벤션 수입이고,
또 카지노 수입의 3배가 쇼핑 수입이다.”

그는 요즘도
‘카지노인터내셔널그룹’의 회장으로
카지노 컨설팅 업무를 해주고 있다.
남태평양 피지 정부가 카지노 개설 업무를 준비 중인데 거기에 입찰을 해놓고 준비하고 있다.
그의 e메일 ID ‘mrtwice1’도 포커와 관련이 있다.
이 ID는 그의 호적수이자 동료였던 프로갬블러 ‘치프 리즈’가 부른 별명에서 따왔다.
리즈는 남들처럼 그를 ‘지미지미’(차민수의 미국 이름인 지미 차에서 나온 별명)로 부르지 않았다.
그의 이름(지미)이 두 번 불린다는 것에 착안해
‘트와이스’란 단어를 썼고, 존경한다는 의미로 ‘미스터’를 붙였다.

또 그는 다른 승부의 세계인 바둑에도 열심이다.
지금은 한국바둑리그에 참가하는 8개팀 중 하나인 ‘한게임’의 감독으로
이영구 윤준상 진시형 한태희 류재형 이태현 등 팀 소속 프로기사들에게 “승부가 뭔지에 대해 가르쳐 준다”고 말한다.
그의 승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글=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사진=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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