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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821회 작성일 2013-12-2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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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조 9호세대 비화](26)비밀 학습조의 잔인한 첫 실습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71학번 이혜경(현 여성문화예술기획 대표,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의 부인)과 사회학과 73학번 이혜경(유인태 열린우리당 의원의 부인).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교에 다닌 탓에 적잖은 혼선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아는 사람은 71학번 이혜경을 '큰 이혜경', 73학번 이혜경을 '작은 이혜경'으로 부르기도 한다.

1975년 10월 19일 서울대-고려대-이화여대 흥사단아카데미 소속 학생 5명이 '김지하 양심선언'을 게재한 유인물을 배포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흥사단아카데미 사건'.

살아남은 조직의 갈 길

긴급조치 9호 하에 흔히 발생한 단순 유인물 배포 사건의 하나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이 사건을 단순하게 볼 수 없는 까닭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어서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배후, 전개 과정, 그리고 여기에 관계된 운동권의 복잡한 인맥 등 긴급조치 9호 시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온갖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이 사건 관계자들은 사건의 실체에 관해 엇갈려 기억하는 부분이 많다. 이를테면 김지하 양심선언을 흥사단카데미 학생들에게 건네준 사람이 '큰 이혜경'이고 이들이 제작한 유인물을 교내에 뿌린 사람이 '작은 이혜경'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공식 기록이 없고 당사자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진실이 아니라고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소한 행위가 중죄가 되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상황에는 당사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을 관계자나 관찰자가 더 잘 기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흥사단아카데미 사건으로 단죄된 사람은 5명이다. 서울대 아카데미 소속 조성두(현 한국조폐공사 감사)-송영인(현 녹색병원 교육자문위원), 고려대 아카데미 김태일(현 영남대 교수), 이화여대 아카데미 이정숙(현 우리내과의원 원장)-김영인(현 영인한의원 원장)이다. 모두 74학번으로, 사건 당시 2학년생이었다.

흥사단(興士團)의 학생 조직인 흥사단아카데미는 원래 운동권 서클이 아니었다. 지향하는 바도 학생운동과 다소 거리가 있었다. 191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설한 흥사단은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 앞날을 짊어질 인재를 양성했으며, 광복 후에는 국민 계몽운동에 주력했다. 1937년 동우회 사건 이후 딱히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

긴급조치 9호 하에 일어난 흥사단아카데미 사건은 광복 이후 '흥사단'이라는 이름으로 표면화된 최초의 조직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흥사단아카데미 소속 학생이 개별적으로 학생운동에 연루된 적은 있었지만 주도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흥사단은 5-16쿠데타 후인 1963년부터 소수 지식인이 아닌 젊은 청년-학생을 길러내기 위한 '아카데미 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그해 8월 서울청년아카데미가 출범했고, 1968년 들어서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아카데미가 차례로 조직됐다. 이화여대 아카데미는 그보다 4년 뒤인 1972년에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운동권 범주에도 들지 못하던 흥사단아카데미는 긴급조치 9호 시대 들어 질적-양적으로 엄청나게 팽창한다. 1980년대 초 학생운동권의 양대산맥을 이룬 무림-학림 세력 가운데 학림의 주축이 바로 흥사단아카데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된 데는 박정희 정권의 파상적인 학생운동 탄압과 긴급조치 9호라는 시대상황이 맞물려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위수령과 긴급조치 4-7-9호 등으로 학내 운동권 서클이 근절되자 학외 조직에 기반한 흥사단아카데미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됐고, 학내 사찰이 극심한 긴급조치 9호 상황에 학외에 기반을 둔 흥사단아카데미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흥사단아카데미 사건은 이 점에서 앞으로 닥쳐올 운동권의 판도 변화를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결정적 연결고리 '큰 이혜경'

이 사건의 또 하나 특이점은 이들이 양심선언을 배포하게 된 배경과 경위, 발각된 과정, 그리고 주변 관계에 있다. 우선 이들 5명이 함께 일을 꾸미게 된 과정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그 시작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1월 21일과 26일 서울대 의대와 연세대 의대에서 반유신 데모가 각각 일어난다. 그해 1월 8일 선포된 긴급조치 1,2호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첫 학생운동이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이었고, 2호는 1호 위반자를 단죄하기 위한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학생운동사에서 보기 드문 1월 데모가 일어난 것은 전해 10-2 서울문리대 데모 후 휴강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학교가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의대 데모 주동자는 본과 3학년생 양길승(현 녹색병원 원장)이었고, 연세대 의대 집회 주동자는 본과 1학년생 고영하(전 국민회의 서울 노원갑지구당 위원장)였다. 이때 양길승은 도피에 성공했으나 고영하는 검거돼 군사재판에서 10년형을 받고, 이듬해 2월 15일 민청학련 관련자 일제 석방 때 함께 풀려난다.





흥사단아카데미 사건 5인방은 바로 양길승이 조직한 비밀 스터디그룹의 멤버였다. 예과 1학년 때인 1969년 흥사단아카데미에 가입한 그가 후진 양성에 주력한 것은 서울대 의대 데모로 제적돼 수배중이던 74년 초부터였다. 그는 각 대학 신입 아카데미 회원 가운데 인재를 뽑아 개인 또는 그룹 지도를 했다.

5인 스터디그룹 외에 그가 지도한 그룹으로는 이화여대 고은광순(현 홍명한의원 원장)과 '작은 이혜경' 팀이 있었다. 양길승은 이 인연으로 뒷날 그의 부인이 되는 '큰 이혜경'을 만난다. '작은 이혜경'이 동명이인인 '큰 이혜경'을 그에게 소개한 것이다.

참여정부 초기 양길승-이혜경 부부는 청와대의 동명이인 때문에 웃지 못할 해프닝을 겪기도 한다. 남편은 청주 나이트클럽 향응 파문으로 유명해진 청와대 제1부속실장과, 아내는 '엽기수석'으로 세간의 화제에 오른 유인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의 부인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양길승이 스터디그룹에서 강독한 것은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등 후일 '의식화 서적'으로 불리게 되는 책들이었다. 그의 스터디그룹에는 국립의료원 간호사팀과 경희대 아카데미팀도 있었고 서울대 아카데미 이선근(현 민주노동당 민생보호단장)-권영기(현 조선일보 출판부장) 등처럼 개인지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흥사단아카데미 사건은 양길승을 중심으로 한 이런 복잡한 인적 관계 속에서 벌어졌다.

이들을 연결한 결정적인 고리가 '큰 이혜경'이었다. 재학중에 연극반과 새얼 등에서 활동한 그는 이때 졸업생 신분이었다. 중앙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그가 사건에 개입했던 것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한문연) 연구위원으로서 학내 출입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문연 원장은 서광선 교수(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였고, 또 한 명의 사건 관계자인 김윤수 교수(현 국립현대미술관장)가 연구위원으로 있었다. '큰 이혜경'에게 문제의 양심선언을 전한 이가 바로 김 교수였다.

김 교수는 김지하의 서울대 미학과 2년 선배였다. 수많은 문화계 거목을 품안에서 길러낸 '민족예술의 맏형' '혁명적 로맨티스트' '영원한 청년 김윤수' 등 그를 지칭하는 수많은 수사(修辭)는 그가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다른 닉네임으로 대체됐을지도 모른다. 그가 당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3년 개헌청원서명운동본부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였다. 이때부터 그는 김지하와 친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1974년 민청학련 조직 때는 사회인사 담당이던 서중석(현 성균관대 교수)을 만나기도 했다(그는 이때 조사를 받았으나 서중석이 끝까지 '불지' 않아 연루되지 않았다).

김지하 양심선언이 그의 수중에 들어온 루트에는 김지하의 어머니와 서울대 오둘둘 사건의 주모자 유영표(현 매경바이어스가이드 고문)가 있었다. 그가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김지하의 어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양심선언 전문을 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이 유영표를 거쳐 그에게 오게 됐다는 것이다. 유영표는 오둘둘 사건 후 도피중이었는데 양심선언을 건네받을 당시 그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하지만 유영표는 김윤수 교수 집에 은신한 적은 있으나 양심선언을 전한 기억은 없다고 최근 밝혔다.) 김 교수가 입수한 양심선언이 '큰 이혜경'을 통해 양길승에게 전해진 과정도 당사자간에 기억이 엇갈린다. 김 교수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큰 이혜경'이 가져가 복사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큰 이혜경'은 김 교수의 허락을 얻어 가져갔다가 돌려주었다는 주장이다.

'양심선언'의 마력

"서랍 속에 넣어둔 양심선언을 읽다가 강의 시간이 돼서 그것을 책상 고무판 밑에 넣어두었다. 두 시간쯤 뒤에 돌아와 보니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10월 말쯤 새벽에 집에 있는데 보안사에서 나를 좀 보자고 했다. 유영표를 잡으러 왔다고 생각하고 옷도 대충 입고 부리나케 나갔다. 그런데 유영표 얘기는 안 하고 양심선언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추궁하기에 이상하게 생각했다. 검찰로 넘어가니 내가 모르던 양길승-이선근이 끼어 있었다. 이혜경 얘기도 검취 때 들어서 알았다. 고무판 밑에 넣고 강의 들어간 사이에 이혜경이 그걸 가져나가 복사해서..."(김윤수)

"한문연 회의 시간을 알려주려고 김윤수 선생님 방에 갔는데 '이런 게 있다'며 양심선언을 보여주었다. 그때가 퇴근 시간이라서 나도 약속이 있고, 선생님도 나가야 됐다. 그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연구실에 가서 보고 다음날 아침 일찍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그걸 다방에서 양길승씨를 만나 보여주었다. 나는 '여기서만 읽어보라'고 했는데 그는 '다방에서 보기가 그렇다'고 했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결국 그걸 가져갔는데 양길승씨가 복사한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걸 밤새 필경을 해서..."(이혜경)

어쨌든 양심선언의 유통 경로가 조영래-김지하 어머니-(유영표)-김윤수-이혜경-양길승-흥사단아카데미 5인방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리도록 하는 마력(?)을 양심선언이 지녔음도 이 사건이 증명하고 있다. 재판 결과와 관계없이 이들 모두 최소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긴급조치 9호 위반 행위를 한 셈이다. 먼저 김윤수 교수의 기억.


"양심선언을 지하가 직접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그 당시에도 짐작하고 있었다. '말뚝이'나 '장일담'은 지하가 영래한테 그 얘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영래가 충분히 쓸 수 있었다. 나는 당시 영래에게 '지하를 죽이려는 모양인데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적은 있었지만 그를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하 구출 방안을 찾기 위해 지하 자당에게 양심선언을 보고 싶다고..."

'큰 이혜경'은 이 무렵 양길승을 자주 만나고 있었다. '만날 술만 마시는' 연극반 등 문화패와는 달리 양길승 그룹의 '토론하는' 분위기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뒤탈을 더 생각했다면 양심선언을 양길승에게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양심선언을 대하는 순간 무척 반가웠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노란 책자가 있었다. 김지하씨가 썼다는 '나는 공산주의자입니다'라는 것이었는데 그게 굉장히 많이 유포돼 있었다. 그것을 뒤집는 양심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문장 자체도 굉장히 좋았고, 사상적 편력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김지하씨의 글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양길승씨한테..."

양심선언 사본을 손에 넣은 양길승 역시 아직 배우는 단계인 2학년생들에게 사고를 치게 만든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흥사단아카데미 사건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제공자가 됐다. 5인 스터디그룹은 이 무렵 김상협 고려대 교수의 [모택동 사상]을 학습하고 있었다. 양길승의 지도로 의식을 가다듬어온 지 어언 2년,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이론 공부만 하고 있으니 답답함을 느낄 만한 시기였다.

"계속 공부만 할 거냐?" "우리도 이제 재미있는 것 좀 하자"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양길승이 양심선언을 입수한 것이 바로 이 즈음이었다. 그는 양심선언 배포는 전적으로 자신이 시켜서 한 것이라고 최근 술회했다.

"모임에서 똑똑하고 일 잘할 만한 학생을 뽑아 가르쳤다. 그게 악연이었다. 양심선언 배포는 내가 치밀하게 진행한 것이다. 나는 집과 연락할 때도 집 앞 미장원에 전화를 걸어 누나한테 머리 하러 오라고 전하게 해서 통화하는 사람이었다. 절대로 유인물을 손에서 손으로 전하지 못하게 했다. 강당이나 강의실에 수업 전에 몰래 갖다놓는 방법이라든가... 그런데 고려대 쪽에서 사고가 생겼다. 손으로 유인물을 전한 것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발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양길승의 말이다. 가리방(등사기)은 양길승이 동대문 시장에서 사준 것이고, 유인물 제작은 신설동 조성두의 자취방에서 이뤄졌다. 5명이 나누어 필경을 하고 조성두-송영인이 밤새 등사를 했다. 이렇게 제작된 유인물은 뿌리는 단계에서 들통나고, 김태일이 먼저 체포된다. 양길승에 따르면 김태일이 하루를 버티고, 나머지 4명이 또 하루를 버텨 자신은 무사히 도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구성된 흥사단아카데미 사건 5인방은 2심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형을 각각 선고받고 이듬해 10월 석방된다. 만 20세가 안 돼 '소년범'으로 분류된 여학생 2명은 징역 단기 8월 장기 1년형을 받고 남학생보다 먼저 풀려난다.

고려대에서 터진 배달사고

이들이 지금도 아쉬워 하는 점은 '너무 일찍, 준비 없이 들어간 것'이다. 순천여고 동기이기도 한 김영인-이정숙은 출소 후 집에 억류(?)된다. 그래서 서울로 뜰 구실로 찾은 것이 '새출발'이었다. 두 사람은 1978년 경희대 한의대와 의대에 각각 새로 입학한다. 조직 논의를 거친 것이지만 '이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경희대 운동권의 요청으로 여학생 서클을 지도하는 등 학생운동을 계속하다 졸업 후에는 의사가 돼 '운동권 남편'의 든든한 후견인이 된다.

김태일과 송영인은 출소하자마자 군에 징집된다. 1980년 복학 후 김태일은 공부에 전념한다. 학생운동에도 현장활동(위장취업)에도 복귀할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극심한 '현장 부재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학업에 정진한다. 1980년대 중반 열린 학술운동 영역은 그런 그에게 단비였다. 송영인은 복학 후 휴학하고 노동현장으로 나간다. 1981년에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 1990년에는 전국민주노동자투쟁동맹 사건에 연루돼 옥고도 치른다. 그는 최근까지 노동현장에 몸담아 최장기 '학출' 노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조성두는 출소 후 민주화운동을 계속한다. 이해찬(현 국무총리)-원혜영(현 열린우리당 의원) 등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 '동지'들을 만난 것도 이때다. 학창시절 그의 주활동 무대는 흥사단아카데미였지만 서울공대 이념서클 산업사회연구회(산사연)에도 리크루트돼 있었다. 하지만 관악 운동권 본진에 합류한 것은 흥사단아카데미 사건 이후다.

'큰 이혜경'은 이 사건 재판이 끝날 무렵 양길승이 체포된 뒤에야 노출돼 20여일 조사받고 기소는 면한다. 사고가 난 고려대에서는 김태일의 아카데미 선배 하상주(현 대우증권 전문위원, 73학번) 등 다수가 조사를 받는다. 김태일로부터 양심선언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고'가 어디서 터졌는지는 지금껏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화여대 새벽지 사건이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터졌다는 정황은 당사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지하는 사항이지만 사고의 진원지는 마찬가지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배보다 배꼽이 큰 흥사단아카데미 사건에는 또 한 사람의 연루자가 있었다. 양길승이 '지도'하던 흥사단아카데미 유망주 이선근이었다. 서울대 방화미수 사건과 동아일보 테러미수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가지치기'된 특이한 사건의 주인공이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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