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9월 정묘삭 병자(10일)에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왔다. 이때에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와
칠자경(七子鏡) 한 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중략) (백제왕이) 손자 침류왕(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교류하고 있는
바다 동쪽의 귀국은 하늘이 계시하여 세운 나라이다. 그러므로 천은을 베풀어 바다 서쪽을 나누어 나에게 주니, 나라의 기틀이 영원히 견고해졌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닦아 토물을 모아 공물을 끊임없이 바친다면 죽어도 무슨 한이 남겠느냐?”라고 일러두었다. 이후로 매년 끊임없이
조공하였다.’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칠지도.
일본 고대사를 다룬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 52년의
기록에는 하사가 아닌 ‘조공’이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백제는 일본의 조공국이었단 말인가.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로 일본사 연구 기본서로 꼽히는 이 책은 진실과 허구가 뒤섞이고, 과장과 윤색이 심해 양면성을 갖는다. 예로 든 신공기의 칠지도
하사(조공) 기사와 흠명기(欽明紀)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4세기 후반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 가야에 일본부를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지배했다는 주장) 등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사료의 신뢰성은 떨어지지만 고대 한·일 관계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철저한 사료비판으로 허구를 걷어내야 가능한 일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최근 ‘역주 일본서기’를 발간했다. 그간 번역서는 몇 권
있었지만 전체를 다룬 종합 역주본은 최초다. 7명의 연구자가 6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 이를 지휘한 연민수 연구위원을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동북아역사재단 자료센터에서 만났다. 동국대 겸임교수와 한일관계사학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연 위원은 국내 손꼽히는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
권위자이다.
연 위원은 “마치 ‘복어의 알’ 같은 책이다. 독을 잘 제거하면 맛있는 음식이 되듯,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에 매우
유용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연 위원은 “이 책은 고대 일본이 ‘국가’로 완비되는 과정에 편찬된 내부통치용 역사서다. 천황통치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모습은 북한이 김일성 일가를 신격화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한반도 기술과 관련, “사신을 인질로,
동맹국을 조공국으로 표현하는 등 왜곡이 커서 이에 대응할 역주서 발행이 절실했다”며 역주 일본서기 편찬에 의미를
부여했다.
일본서기의 주된 편찬이념은 ‘번국사관(蕃國史觀·한반도를 침략대상지로 보는 의식)’이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설화, 가야
7국 평정설화 등은 한반도를 복속국 정도로 여기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연 위원은 “이는 근세 조선멸시관과 정한론(征韓論·1870년대 일본
정계에서 대두된 한국 공략론)에 사상·이념적 근거를 제공한다”며 “일본 우익세력이 일본서기를 ‘성전(聖傳)’으로 떠받드는 데 이런 이유가
있다”고 전했다. 일본의 일부 교과서들은 임나일본부설을 마치 정설처럼 인용하고 있는데, 바로 일본서기가 근거사료로 제시된다. 연 위원에 따르면
이제 일본 학자들도 임나일본부설을 믿지 않는다. 임나일본부는 가야가 외압을 받던 시기, 외교를 목적으로 일본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머문 기관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일본서기가 유독 조작과 윤색이 심한 이유는 뭘까. 연 위원은 이를 열등의식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당시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수준은 굉장히 차이가 컸다. 일본은 열등감을 정치적인 논리로
극복하려고 한 듯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일본서기에는 신라정벌론, 한반도 응징론 등이 종종 대두되지만 실제로 일어난 적은 없다. 늘
말로만 엄포를 놓는 북한의 행태와 비슷하다”고 전했다.
역주 일본서기 발간에는 연 위원 외에 김은숙(역사교육학) 한국교원대 교수,
이근우(사학) 부경대 교수, 정효운(일어일문학) 동의대 교수, 나행주(일본학) 대진대 교수, 서보경 고려대 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교수, 박재용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등이 참여했다. 6년간 한 달에 한 번 이틀씩 정기합숙을 했고 책 발간 1년을 앞두고는 매주 만나 토론을 했다.
여러 설이 존재하거나 해석이 애매한 부분에 보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다. 연 위원은 “번역은 1년 만에 끝났지만, 검증과 검토만 5년이 걸렸다.
어투와 용어를 맞추기 위해 책을 통독하는 과정도 매우 지난했다”며 지난 6년을 회고했다.
역주 일본서기 발간은 일본서기 연구의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연 위원은 특히, 한국과 일본이 아닌 제3국의 연구자들이 일본서기에 내재된 이념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식민지근대화론보다 고대사 왜곡이 더 위험하다”며 “서구의 아시아 학자들에게 일본서기는 필수서인데, 고대에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허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우려했다. 연 위원은 “기회가 되면 역주 일본서기의 영문판 발간을 통해 제3국 학자들의 왜곡된
한국고대사인식을 바로잡고 싶다”고 덧붙였다.
글 =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사진 = 심만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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