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식/이화여대 교수·한국학
지난 7월부터 반년 동안 필자는 우리나라의 문화, 그중에서도 생활 문화의 난맥상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했다. 우리의
결혼 문화나 장례 문화가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를 밝힌 것이다. 이제 정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문화 전반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아직도 사람들이 문화를 바라보는 눈이 너무 고정돼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대통령으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문화를 중시하겠다는 심산을 밝혔다. 그래서 국정 기조 가운데 ‘문화 융성’을 집어넣었다. 이 기조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문화융성위원회’라는 것도 만들었다. 필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런 관변 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었는데, 그동안 그 위원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느낀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몇 번의 회의에서 필자는 문화를 융성하자는 것은 물론 대단히 좋은 발상인데 좀 더
정확히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요지는 간단하다. ‘문화 융성’이라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문화가 무엇을 의미하며 융성은 대체 어떤
상태를 이르는지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위원회를 통해 느낀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문화를 좁게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문화를 일상생활을 떠나 별도의 시간대에 특정한 공간에 가서 즐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극장이나 음악당에 가고
뮤지컬 같은 것을 보는 것만이 문화적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화는 일반적인 문화가 아니라 외려 특수한 문화로
공연 문화에 해당한다. 문화는 이렇게 특별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란 삶 전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치관이라든지 생활 문화 같은 것은 가장 기초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앞에서 문화를, 또는 문화의 범위를 정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문화를 공연 문화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결혼이나 장례 문화 같은 생활 문화까지 포함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가장 큰 문화라 할 수 있는 한국인의 가치관까지
확대시킬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 범위가 결정돼야 그것이 융성된 상태가 어떤 것인지 조정해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필자는 그동안 결혼과 상례에 나타난 수많은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문제는 영화나 음악 공연을 진작시킨다고
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인의 가치관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건대 현대 한국인들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영화나 뮤지컬이 발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런 생활 문화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를 일상생활 속에서 느껴야 한다. 다시 말해 매끼의 밥에서, 항상 입는 옷에서, 또 노상 하는 생각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집이나 학교, 직장에서 행복을 향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더 많은 상상력을 흡수하고 더 짜릿한 자극을 받고
싶으면 공연장이나 극장 같은 특수한 장소로 가면 된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는 문화적인 것이 보이지 않는다. 정신적인 향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은
아파트 평수나 차의 기종, 매월 또는 매년
수입의 크기 등 전부 물질적인 것으로 도배돼 있다. 이런 것들은 행복해질 수 있는 기초 조건이 될 수 있을
뿐이지 이 자체가 행복일 수는 없다.
인간의 행복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가치관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본인이
불안하고 우울하면 불행한 것이고, 돈이 항상 빠듯해도 살고 있다는 충만감이 넘치면 행복한 것이다. 또 아무리
가난해도 자신이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우리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문화밖에 없다. 더 강력하게 말하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종교적인 신앙이 아니라 문화다. 아무리 종교적인 신념이 강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문화를 통한 일상생활에서이기 때문이다.
문화를 이렇게 넓게 봐야 하는데 이런 시각으로 문화를 접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인으로서 문화적인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인지 좀 더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냥 사회의 유명 문화
인사를 모아놓고 하는 문화융성위원회 같은
모임 가지고는 부족하다.
조선 시대의 성군으로 세종과 정조를 꼽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임금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집현전’과 ‘규장각’이라는 자신의 싱크탱크를 최대한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 두 연구소는 다른 왕
때에도 있었지만 이 연구소가 항상 이 두 임금과 함께 연상되는 것은 이분들이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지금 국정의 다른 분야에도 할
일이 많겠지만 문화도 마찬가지다. 문화를 제대로 융성하게 하려면 연구소가 만들어져 사계의 최고 권위자들이 격의 없이 몇날 며칠을, 아니 몇
개월이라도 논의를 해야 한다. 대체 어떤 문화적 삶이 우리 한국인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오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국정 현안이
너무 많은지 대통령에게서 문화에 대한 언급이 갈수록 줄어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