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작가-소설가 ^^^황석영 가족이 최근 집중하는 작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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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859회 작성일 2013-12-31 00:24본문
[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16> 소설가 황석영씨 가족
"현대판 굿극 '바리데기' 무대 올리려
아들 부부와 똘똘
뭉쳤죠"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 입력시간 : 2013.12.29 22:05:43
- 황석영씨의 서재에 모인 세 사람. 왼쪽부터 권수정, 황호준, 황석영씨. 조영호 기자 youcho@hk.co.kr
한국적 오페라라는 기치 내걸었던
'아랑'에 우리 장단 다채롭게 활용
"전해져 온 민속악, 기록 유실 많아
그 음악적 유산에 대한 실험에 초점"
● 경서도소리꾼인 며느리 최수정씨
경기 소리 명창인 안비취씨의 제자
전숙희씨 스승으로 모시며 새 길
"아직은 시도된 적 없는 무가라 흥분
새 창법을 만들 생각에 부담도 돼죠"
● 30년 만에 희곡 쓰는 황석영씨
2007년 발표한 '바리데기' 무대화
내년 대본 작업… 2015년무대에
"소설의 원래 테마인 페미니즘 벗고
자연에 기대는 삶을 주제로 담을 것"
"타악기인 북과 바라와 징 때리는 소리가 질펀한 가운데 가냘프고 여린 현금이며 비파,
드높게 떨리는 생황과 젓대, 간드러진 호궁 소리가 어우러졌다."(2003년작'심청'131쪽) 소설가 황석영(70) 씨의 글은 동양 음악의 현묘한 세계를 문자라는 뜰 것으로 능히 길어 올렸다.
앞서 기자는 또 다른 황씨에 대해 이렇게 쓴 적 있다. "작곡가 황호준씨는 한국적이라는 의미를 가장
중시, 경서도(京西道) 소리꾼 등 정통의 사람들을 캐스팅했다"고. 한국적 오페라라는 기치를 높이 내건 국립오페라단의 '아랑'이 초연되던
2010년 12월의 기사였다. 서양의 형식에 굿거리 자진모리 엇모리 등 우리 장단을 다채롭게 활용한 무대는 벨칸토 오페라에 대한 반격이었다.
두 황씨, 바로 부자지간이다. 약속이나 한 듯, 현재 앓는 병까지 비슷하다. 어깨에 칠십견이 온 아버지, 사십견이 덜컥 닥친 아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글 감옥'에 있다. 명 단편 100편을 골라 리뷰를 써 달라는 한 문학 잡지의 부탁을 수락해 둔 상태다. 아들은 지난 3년 동안 뮤지컬 음악극 각종 크로스오버 작업 등으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고 운을 맞춘다. 이들은 이제 한 배에 탔다.
7년 간격으로 아버지는 원작 소설을, 호준(41)씨는 그에 근거한 오페라의 선율을 세상에 내놨으니 동지라면 참으로 별난 동지다. '아랑'을 두고 호준씨가 "국립오페라단의 8번째 창작품"이라며 "오페라라는 서구 양식의 정점을 두고 한국화라는 목표 아래 기획 단계부터 서사는 물론 음악까지 한국화를 지향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아버지는 " 워낙 바빠 못 봤다"며 어깃장을 놓는가 싶더니 "뮤지컬'황세자비 실종 사건'만 봤다"고 한다. "이제 아들은 어엿한 일가로 독립해 나는 아는 척 못 한다"고 한마디 덧붙이긴 한다.
두 사람은 그러나 지음(知音)이라는 관용어를 무색케 하는 관계다. 머잖아 그 사실은 천하에 알려진다. 이번에는 며느리인 서도소리꾼 최수정(40)씨까지 작품에 동참하니 우리 문화사에 독특한 기록 하나가 곧 수립될 전망이다. 황석영씨가 2007년 발표한 소설 '바리데기'의 무대화다. 가족과 함께 탈북한 바리가 끝내 가족을 모두 잃고 혈혈단신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냉정한 자본주의의 영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전국적으로 확인되는 바리데기 설화의 현재성을 기아, 전쟁, 세계화의 병폐 등 현대의 갖가지 참상으로 번역해 낸 문장은 판타지를 방불케 했다.
아버지가 구축한 세계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 온 아들이다. "작곡자로서 서사가 필요한 것은 음악극 창극 뮤지컬 오페라인데 결국 사람을 다루는 문제 아닌가." 두 사람의 작업이 둘이 아닌 이유를 그렇게 말했다. 어려서부터 익히 보던 모습이었다. "항상 수많은 예술가들이 아버지를 찾아와,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엄청나다." 더욱이 아버지가 민예총을 조직하는 바람에 그들의 집에는 소속 작가들이 아예 먹고 살았던 터다. 현재 중진급이 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와 함께 아들이 초등학교 때 광주 집에 자연스레 책을 접할 수 있게 책을 갖다 놓은 아버지의 전술(?)도 주효했다.
수학에 재질을 보이던 아들의 이과 행을 좌절시킨 것은 아버지가 쳐놓은 미필적 고의의 그물이었다. "과학 쪽은 쉬 자본의 주구가 될 수 있어 애초 마음에 없었다. 그래도 황 아무개 아들인데 창조적 작업하라고 피아노 학원에 보냈는데, 1주일 다니더니 그만 두겠다는 거였죠."수학이 음악과도 통한다는 나름의 이유였는데, 아들은 며칠 나가더니 "손 훈련은 싫다, 곡부터 치고 싶다"며 발길을 끊었다. 이후 일련의 결행이 이어졌다
국악고등학교(광주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전대협과 전교조의 고등학생 버전이라 할만한 전고협을 결성하겠다며 친구 8명과 주동으로 움직이다 결국 퇴학당했다. 이 사건은 훗날 아버지의 방북 당시 안기부까지 가서 조사 받던 일과 그의 의식에서는 하나다. 방북 직전이던 고1 당시, 민족음악분과 위원장으로 승효상, 임옥상 등과 실무진을 맡고 있던 박범훈씨에게 황씨는 "아들인데 작곡에 재주 있으니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검정고시로 중앙대 국악과 93학번으로 입학한 그에게 박씨는 작곡에 필요한 책을 주는 등 격려했고, 그 덕에 그는 세계 민족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다. 민중 예술의 내면화 작업이었던 셈이다.
민중 연희의 보고라 할 만한 소설 '장길산'의 저자는 왜 아들을 국악과에 보냈을까? "국악의 아악은 중국 음악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악보다 우리 음악 고유의 특질을 더 많이 지니는 민속악이 진정한 백성의 음악이라 믿은 까닭이었다. "민속 음악에 우리 음악의 중심이 있다 믿고, 그리 보냈다. 아들도 나의 전체적 구상을 알고 동의했다."
'장길산'을 탐독, 광대패에게 온존돼 있던 조선 후기의 생동감 있는 음악을 그대로 내면화하고 있던 아들의 생각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기록 덕에 복원 가능한 궁중음악에 비긴다면 민속음악은 유실이 많다. 그만큼 현장에서의 발굴 가능성이 크다." 불확실한 전승 체계를 타고 면면히 전해져 온 민속음악의 힘을 규명하고, 나아가 현재의 음악적 자산으로 흡수한다는 원칙이 그래서 세워졌다.
밀입북에 따른 국보법 위반죄로 감내해야 했던 징벌(7년 선고, 1993~1998년 수감)의 시간은 황석영씨에게 또 하나의 내재적 계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들은 옥살이에서 벗어난 아버지를 '최수정 개인 발표회'에 모시고 갔다. "그거 보고 감탄했다. 궁중음악의 청성(淸聲)이 아니라, 남도의 판소리 성음(聲音)이 그 청아한 목소리에서 활달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대단한 미래를 예감했고, 보다 정확히는 좋은 만남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 대목, 남편은 말한다. "결혼 당시 아내는 이미 나름의 일가를 이룬 어린 명창이었다." 그는 우리 음악의 섬세한 부분을 아내를 통해 알게 됐다고 덧붙인다. 시쳇말로 존재감의 인식이었다. 최씨에게 내재된 정통성은 옥고를 치르고 갓 나온 황씨에게 어떤 은총이었다.
최씨는 경기 소리의 명창 안비취에게서 17세까지 배웠다. 외할머니가 큰 무당이었고 부모가 경기굿의 만신이었던 세습무 집안의 그녀 역시 부모의 길을 이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안비취의 제자 전숙희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업보를 벗는다. 귀한 경서도 소리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 대목에 기다렸다는 듯 시아버지의 목청에 활기가 돈다. "그 소리는 맑고, 경쾌하며 흥겨운 동시에 남도 판소리의 애환을 호흡으로 녹인 극적 구조를 갖죠. 서사가 녹아 있는 짧은 소리랄까."황석영씨의 견결한 분석이다. 다음 첨언에는 사물의 본질로 내닫는 대가의 통찰이 엿보인다. "시와 소설의 차이야. 굿의 피가 쟤 안에 있는 거야."
저쯤 되면 며느리 사랑도 가히 미학의 경지다. 1998년 안산시립관현악단의 소리 부문에 있을 때 국립소극장에서 처음 만나 했던 장래 시아버지의 말을 수정씨는 잊지 않는다. "한 길로 뒤돌아보지 않고 가다 보면 뒤에서 노크한다." 집에서의 식사 자리가 두 사람의 인연을 승낙한다는 신호였다.
이제 그 만남은 새 무대, '바리데기'로 승화한다. "쟤들과 창극 아니면 굿극으로 할 거에요. 이런 말이 나온 게 4년은 됐죠." 원래 전국적으로 48가지나 확인되는 바리공주 설화 중 가장 표준이 되는 경기ㆍ서울 본을 주 텍스트로 삼고 미륵사상과 연계시킨 광주ㆍ 나주 지역 본 등 독특한 버전을 엮어 펼치는 새로운 연희 양식이 지금 태동하고 있다. 물론 곡은 호준씨의 몫이다."전국에 널리 퍼져 소재로서는 진부하죠. 우리는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고유의 음악적 유산에 대한 양식적 실험을 하자는 거니까."
"기쁘고도 흥분되죠. 그러나 아직 시도된 적 없는 우리 시대의 무가(巫歌)를 지향하는 만큼 새 창법을 개발해야 하는데, 부담스럽죠."남편의 작곡이 들어갈 현대의 무가는 최씨의 본류인 경기ㆍ서도 소리의 범주 안이 될 것이라는 게 최씨의 전망이다. 국립국악원에 소속으로 '어린이 바리데기''황진이' 등 다양한 소리극 실험을 치러낸 경험 자산이 두둑한 자본이다. 호준씨가 "판소리 전공자들이 하는 연기가 아니라 경서도 소리 전공자로서 그 안에서의 드라마적 정서를 이끌어 내는 것"이라며 "결국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무당의 행위"라며 낙관한다.
"기본적으로 내가 배우는 자세지만, 콘서트를 함께 보고 나면 적극적으로 소감을 교환하죠." 그것은 남편과의 시너지 효과가 출발하는 지점이다."강원도 쪽 소리인'정선아리랑'을 제일 좋아하세요. 크고 작은 행사 때면 가서 불러 드리죠." 며느리와 시아버지 간의 교감은 언어를 초월한다.
황석영씨로 보자면 과거의 자신을 불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1980년대 마당극, 창작극 을 쓰고는 손 뗐다 굿 속으로 들어가 30여년 만에 쓰는 희곡이다. 원래 소설의 줄기는 페미니즘이었으나 무대가 전제된 이번 작업의 기본은 굿판 현장이다. "모성이 테마였는데 이번은 생명 사상 혹은 자연에 기대는 삶이 주제죠." 새 술에 새 부대다.
"현재 매주 한 번의 연재가 내년 3월 끝나면 (대본 작업에)본격 착수할 계획이에요. 자정에 집필을 시작, 예닐곱 시까지 쓰죠." 40년 다 돼 가는 천석고황 같은 버릇이다. '바리데기'는 2015년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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