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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627회 작성일 2013-11-05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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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 오판 ‘병자년 참극’

 

 

 

 

 

G2시대에 던지는 교훈

 

 

등록 : 2013.11.03 20:03수정 : 2013.11.03 22:36

한 주를 여는 생각


병자호란 1·2
한명기 지음
푸른역사 펴냄
병자호란(1636~1637) 당시, 한강변 삼전도의 수항단 단상에 앉은 청의 황제 홍타이지 앞에서 인조와 소현세자가 세번 무릎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던 장면은 우리 역사의 치욕적 순간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수모도 일반 백성들의 비극에 비하면 약과였다. 주화파 최명길은 그때 붙잡혀간 사람을 당시 조선 인구의 10%에 상당하는 50만명으로 추산했다. 형조참의 나만갑이 남긴 <병자록>은 철수하는 청군이 조선인 남녀를 수백명 단위로 줄을 세워 감시인들을 붙여 청의 수도 선양(심양)으로 끌고 갔는데, 그런 행렬이 온종일 이어졌다고 기록한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은 병자호란 38년 뒤인 1675년 선양을 탈출해 압록강까지 왔으나 고향을 눈앞에 두고 조선 관리들에게 붙잡혀 선양 주인집으로 강제 송환당하는 안단이라는 주회인(끌려갔다가 도망쳐 온 사람) 이야기로 시작한다. 설령 돈을 쥐여주고 풀려났더라도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사례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은 ‘실절’(절개를 지키지 못함)했다 하여 고향에 와서도 버림받았다. 임진왜란(1592~1598년) 때는 10만 남짓 사람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고작 6000여명이 전쟁 뒤 교섭으로 돌아왔다. 불과 약 40년 만에 왜 임진왜란보다 더한 참극이 다시 벌어졌을까?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1623년 인조반정에서 대북파가 지지하던 광해군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세력, 그들의 골수에 박힌 존명사대·향명배청 사대주의 이데올로기야말로 그 주범이라고 말한다. 반정세력은 급변하던 한반도 주변 정세를 파악하는 데 너무나 둔감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부터 명의 쇠퇴와 일본·여진 등 신흥 강자들의 등장이라는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급변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정세력은 그런 변화에 나름대로 기민하게 대처하고 있던 광해군을 내쫓고 수십년 뒤 해체되는 늙은 제국 명에 나라의 운명을 내맡겼다. 한 교수는 조선 지배세력이 정세 급변을 오히려 역이용해 힘을 키울 수 있었는데도 비극을 자초한 것을 기득권 집착과 그로 인한 ‘전략적 사고의 부재’ 탓으로 요약한다.
‘G2 시대’라 불리며 동아시아 판도가 급변하는 요즘,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17세기 국제전쟁이었던 병자호란은 지금을 성찰하기 위한 현재적 텍스트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1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묘사한 삼전도비 부조. 푸른역사 제공
오늘의 명과 청은 어디이며 사대주의자는 누군가
 
‘존명사대’의 세계관에 갇힌 인조와 반정세력은 동아시아 정세 변동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낡은 체제와 기득권에 매달렸다. 그 결과 정세 급변을 유리하게 활용하는 전략적 사고도 불가능했다. 지금 또한 그런 시대가 아닌가?

병자호란 1·2
한명기 지음
푸른역사 펴냄
화냥년
유하령 지음
푸른역사 펴냄·1만 4500원
조선이 임진왜란의 참화를 추슬러 가던 1623년,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권좌에서 쫓아낸 인조반정 세력은 ‘광해군이 어지럽힌 정사(난정)를 바로잡겠다’는 걸 명분으로 내걸었다. 그들이 주장한 난정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광해군이 모후(선조가 1602년에 재혼한 인목왕후)를 폐하고 아우(이복동생 영창대군)를 죽임으로써 패륜을 자행했다. 둘째, 궁궐 건설 등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재정을 고갈시키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셋째, 오랑캐 후금(청)과 화친하여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했다.
이 가운데 세 번째 명분이야말로 반정과 그 이후 인조 정권의 성패가 걸린 문제였다. 이 존명사대·향명배청의 사대주의 명분은 인조 세력의 반정을 지켜준 보루였지만, 또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참화가 바로 그 때문에, 또 그토록 참혹하게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의 <병자호란 1·2>(푸른역사·각 권 1만5900원)가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임진왜란 참전으로 명의 쇠락이 더욱 완연해진 틈을 타 누르하치의 만주 여진이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위기를 느낀 명은 조선을 끌어들여 여진을 견제하는 이이제이책을 구사했다. “(명은) 임진왜란 때문에 망해가던 조선을 다시 살렸다는 은혜를 내세워 만주와의 싸움에 조선을 계속 끌어들이려 했다. 명을 위해 만주와 싸울 것인가? 만주가 뜨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중립을 지킬 것인가? 양단의 선택 앞에서 조선은 분열되었다. 1623년의 인조반정은 전자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후자를 실행하고 있던 세력에 대해) 일으킨 쿠데타였다. 망해가던 명을 선택한 직후인 1627년 만주는 조선을 침략(정묘호란)했다.”
지은이의 문제의식은 그때 그 상황이 지금의 한반도와 주변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현재적 사건’일 수 있다는 인식에 닿아 있다. 바꿔 말하면, 지은이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거대 중국이 등장하고 미국의 패권적 지위와 일본 힘이 기울고 있는 오늘날의 명과 청은 어디이며, 이 땅의 존명 사대주의자는 누구인가?
2 청의 기마군 그림. 푸른역사 제공
반정세력이 창덕궁에 들이닥치자
광해군의 왕비 유씨가 반문했다
“거사가 종사의 미래를 위한 것인가?
그대들의 영달을 위한 것인가?”
반정세력의 개혁은 말뿐이었고
방비책도 ‘정권 안보’ 차원이었다
공신들의 부정에는 관대했으나
반대파의 적산 탈취에는 재빨랐다
책은 1623년 3월 반정세력 지휘부가 창덕궁으로 들이닥쳤을 때 광해군의 왕비 유씨가 이렇게 반문했다고 썼다. “지금의 거사가 종사의 미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대들의 영달을 위한 것인가?” 인조반정에는 왕족과 권신들 간의 복잡하게 얽힌 원한과 권력투쟁이 배경에 짙게 깔려 있었다.
1636년(병자년) 12월9일 황제 홍타이지가 이끄는 14만의 청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넘고(병자호란),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간 지 46일 만에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은 인조와 반정공신들의 무능과 무책임, 기득권 집착이었다. 하지만 최후의 일격을 날린 사건은 강화도 함락이었다. 인조는 청군이 물밀듯 들이닥치자 왕세자빈과 봉림대군 등 왕실 가족들, 조정신료들의 처자들, 그리고 역대 선왕들의 신주를 서둘러 강화도로 피신시켰다. 원래 인조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두었으나, 청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시기를 놓치고 차선책으로 장기항전 준비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이런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 결정적 요인은 도원수 김자점을 비롯한 공신들이 짜낸 ‘청야견벽’(淸野堅壁) 전략이었다. 말 그대로 적군이 지나가는 평탄한 곳을 깨끗이 비우고 곳곳에 준비된 요새로 들어가 굳건히 버틴다는 것인데, 청군은 의표를 찔렀다. 그들은 산성에 웅거한 조선군을 그대로 둔 채 한양으로 내달렸다.
반정세력의 속내가 실은 그들 일족의 ‘영달’이었음을 의심케 하는 더욱 기막힌 사례들이 많다. 인조가 강화도 방어를 책임질 검찰사로 누가 좋겠느냐고 영의정에게 묻자 김류는 자신의 아들 김경징을 천거했다. 그게 비극의 씨앗이었다. 피난길에서조차 자기 집안 식구와 재물 지키기에 광분하던 김경징은 강화도에서 날마다 술잔치만 벌이다가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저질러 강화도를 청군에 넘겨주고는 자기 수하와 함께 도망쳤다. 강화도가 무너지자 그곳으로 피신했던 조선 지배세력 처·첩 등 부녀자들은 겁탈을 피해 무더기로 목을 매거나 바다에 몸을 던졌다. 청군의 봉쇄전략 속에 고립된 저항군은 이미 고사 직전까지 내몰린데다, 강화도가 무너진 마당에 남한산성을 지키는 건 무의미했다.
3 명청 교체기의 분수령이 됐던 1619년 사르후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푸른역사 제공
인조는 끝내 존명사대를 버리지 못했지만 병자호란 뒤 급속히 친청 자세로 기울었다. 신료들에게서 “그렇다면 왜 반정을 했느냐?”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존명반청이야말로 반정의 가장 중요한 명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부터 반정세력은 명분을 잃었다. 개혁은 말뿐이었고 정묘호란 뒤의 방비책도 인조 주변의 ‘정권 안보’적 차원에 머물렀다. 그것마저 지지부진했다. 인조는 걸핏하면 백성들에게 사과했고 단호한 개혁을 입에 올렸으나 실행이 따르지 않았다. 공신들 부정과 무능에는 관대했으나 제거당한 반대파의 적산 탈취에는 재빨랐다. 권력 남용, 인사의 난맥 등도 광해군 때를 능가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청의 조선 침략은 명의 쇠락 속에 중원을 장악해 가던 청이 언젠가는 결행했을 일이며, 인조와 반정세력의 세계관이나 친명 사대주의가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란이 연달아, 그것도 그토록 참혹하게 전개된 데는 조선 조정의 존명 사대주의 정책이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원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 청은 배후에서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세력으로서 조선의 존재를 늘 의식했으며, 명의 가장 중요한 번국 조선의 복속은 청의 안정적 중원 지배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청은 어떻게든 조선을 복속시켰겠지만, 조선 조정의 시대착오적인 향명배청 정책은 그 과정이 처참할 정도의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게 만들었다. 존명 사대주의에 갇힌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었던 인조와 반정세력은 대북파와 광해군과는 달리 동아시아 정세 변동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사멸해가는 낡은 체제 및 그것과 얽혀 있는 기득권에 매달렸다.
그에 따라 정세급변을 조선에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는 ‘전략적 사고’도 할 수 없었다는 게 <병자호란>의 핵심 메시지다.
지은이 한 교수의 아내인 작가 유하령씨는 청에 끌려간 여성들의 수난의 역사를 그린 소설 <화냥년>(푸른역사·1만4500원)을 함께 펴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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