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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城 및 홍콩-李小龍 특집 및 日지도층의 국수주의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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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419회 작성일 2013-10-13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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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공주 공산城
 
 
 
 
양권모 논설위원
 
서기 660년 7월13일 저녁,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도읍 부여 사비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백제 의자왕은 태자와 주요 신하를 거느리고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옛 왕도였던 웅진성에서 사직을 지키려 했지만, 끝내 닷새 후인 7월18일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해
백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웅진은
 
지금의 공주를 칭한다. 공주의 옛 이름이 고마나루, 웅진(熊津)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자,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은 475년 웅진으로 천도를 감행했다.
 
이후 5대 왕 64년 동안
 
백제가 웅혼한 기상을 펼친 도성이 웅진성, 지금의 공주 공산성이다.
공산성 지척에 묻힌 무령왕이 바로 웅진 백제의 영화를 증언한다.

大학자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기 공산성을 찾아 망국의 상흔을 이렇게 읊었다.
‘둘러 있는 산과 물이 그림 같은데/
가련하다 오늘에는 군사의 모습이 사라졌네/
음산한 바람 휘몰아치고 물결 거칠게 일어나니/
전쟁 북소리 아직 울리는 것 같네’

백제가 고구려의 위협에 쫓겨 웅진으로 천도한 데는 바로 “그림 같은” 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에서 부여에 이르러 ‘백마’로 이름을 바꾸는 금강이다.
공산성의 사면은 금강이 유유히 굽이쳐 감아돈다.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부여 부소산성과 함께
 
 
금강의 아늑한 굽이침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
 
 
공산성이다.
‘백제의 시인’ 신동엽은 대하 서사시 <금강>에서 노래했다.
‘백제/
옛부터 이곳에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에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정신을 남기는 곳, 금강에 접한 공산성의 북쪽 성곽이 지난 9월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적국의 침략에 의해서도 아니고, 반란의 공략 때문도 아니다.
공산성을 존재케 한 금강을 ‘살린다’는 토목이 빚어낸 것이다.
수천년을 이어온 물길을 막고, 역사의 숨결이 배인 모래톱을
 
소멸시킨 소위 4대강 사업이 공산성을 허물었다.

 
<금강>에서 신동엽은 노래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살림을 장식하기 위해 백성들 가슴에/
달았던 꽃이, 백성들 머리 위 기어 올라가/
쇠항아리처럼 커져서 백성 덮누르기 시작한 것은’ 쇠항아리처럼
백성과 역사를 짓누르는 ‘강 죽이기’의 업보를
언제까지 속절없이 지켜만 봐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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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스케치]아뵤오∼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기사입력 2013-09-07
이소룡, 그가 떠난 지 올해로 40년


‘정무문’에서 웃옷을 벗고 왕자 복근과 쌍절곤 실력을 뽐냈던 이소룡(왼쪽)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의 연기로 환생한다. 동아일보DB
1973년 7월 20일 이소룡(李小龍·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리샤오룽)이 숨졌다. 그는 홍콩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 미국에서도 빅스타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지 몰랐을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전설이 됐다.

그의 1972년 작품 ‘정무문’이 지난주 국내에서 재개봉했다. 디지털 변환을 거쳐 선명해진 화질은 전설의 액션을 더 실감나게 그렸다. 지난달 22일에는 전설적 무술인 영춘권을 부활시킨 중국인 예원(葉問·엽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일대종사’가 개봉했다. 왕자웨이(王家衛·왕가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올해 베를린영화제 개막작이었다. 하지만 이소룡이 없었다면 이 영화도 없었다. 예원이 이소룡의 스승이기 때문에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이소룡은 아직도 우리 곁에 살아있다.


2013년, 이소룡의 환생

영화 ‘사망유희’에서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소룡(왼쪽)과 영화 ‘킬빌’에서 같은 복장으로 등장한 우마 서먼. 동아일보DB
여름에 개봉한 영화 ‘레드: 더 레전드’에 나오는 이병헌. ‘지.아이.조’ 1, 2편에 이어 그는 이 영화까지 할리우드 영화 3편에 출연했다. 그는 영화 속에서 잘 다듬어진 근육과 액션을 뽐냈다. 할리우드 영화 ‘닌자 어쌔신’에 출연한 정지훈(비)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모두 이소룡의 아류라고 말한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두 배우의 할리우드 진출은 이소룡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그의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할리우드는 동양 남성 배우들이 이소룡의 이미지를 재연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소룡은 다른 영화에서도 무한 복제되고 있다. 이소룡 마니아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킬빌’ 1편에 그에 대한 오마주(hommage·존경의 표시)를 담았다.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 중 여배우 우마 서먼에게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혀 ‘17 대 1’의 전투를 벌이게 했다. 이 장면은 이소룡이 ‘사망유희’에서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농구 스타 카림 압둘 자바와 싸우는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다.

워쇼스키 남매 감독의 ‘매트릭스’에도 이소룡은 살아 있다. 주인공 네오와 악당들의 액션 신은 대부분 롱테이크로 촬영됐다. 요즘 액션 영화는 화면을 잘게 쪼개는 쇼트 컷을 주로 사용하지만 ‘매트릭스’는 중계방송을 하듯 카메라를 고정한 채 배우들의 주먹다짐을 응시한다. 이는 이소룡의 영화가 싸움 장면을 끊지 않고 통째로 보여주는 방식과 같다. 워쇼스키 남매 감독도 이소룡의 마니아다.

이소룡은 대역 없이 실제 무술을 선보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액션은 ‘날것’ 그대로였다. 이런 특징은 요즘 액션 영화의 트렌드가 된 ‘본’ 시리즈에도 영향을 미쳤다. 맷 데이먼 주연의 ‘본’ 시리즈는 과장된 화려한 액션보다 실제로 살과 뼈가 부딪치는 액션으로 각광받고 있다.

영화 ‘퀵’ 등에 출연한 오세영 무술감독은 “‘본’ 시리즈의 리얼 액션은 절제된 이소룡의 액션에서 가져온 것”이라며 “요즘 한국 액션 영화의 교과서가 된 원빈 주연의 ‘아저씨’도 맥을 같이 한다”고 평가했다.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이소룡은 권상우로 환생했다. 영화 중 태권도 사범의 아들로 출연한 권상우는 친구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검정 비닐 테이프로 감은 쌍절곤을 들고 옥상 전투를 벌인다. 유하 감독은 “이소룡은 학창시절 나에게 폭력과 일탈의 욕망을 승화시킨 축제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젊은 연기자들도 이소룡을 몸에 담고 있다. 장혁은 이소룡이 창시한 무술 절권도를 10년 넘게 수련했다. 서른일곱인 그는 요즘 절권도로 단련한 근육으로 MBC 예능 프로그램 ‘일밤-진짜 사나이’에서 20대 병사를 능가하는 괴력을 뽐내고 있다. 장혁은 드라마 ‘아이리스2’와 ‘추노’에서도 위험한 액션 신을 대역 없이 소화했다. 그가 절권도를 배운 도장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 ‘이소룡 절권도 한국 총본관’이다. 이곳의 김종학 관장은 “김수로 김선아 등의 배우들이 (우리 도장에서) 절권도를 배웠으며 스턴트맨들도 찾아온다”고 했다.

2006년 KBS 개그콘서트 ‘이소룡이 간다’ 코너에 나온 개그맨 장동민도 ‘이소룡빠’이다. 그가 이소룡에 빠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청룽(成龍·성룡) 영화는 스토리 라인이 있는데, 이소룡 영화는 그냥 싸움이죠. 그는 ‘강한 놈’으로서 계속 싸웁니다. 이놈을 때려눕히면 다른 놈이 등장하고, 그를 또 때려눕혀요. 수백 명을 상대로 이기는데, 마치 게임 같아요. 실제로 ‘철권’ 같은 게임은 이소룡을 모티브로 만들었어요. 저는 게임을 할 때도 늘 이소룡 캐릭터로 싸워요.”

‘정무문’의 수입사인 조이앤콘텐츠그룹은 내년까지 ‘용쟁호투’를 제외한 이소룡 주연 영화 4편을 국내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이소룡의 인터넷 팬클럽 ‘브루스 리 포럼’의 회원은 1700여 명이나 된다. 이소룡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1971년, 문화적 현상의 탄생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6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세기의 영웅 20걸’을 발표했다. 선정된 20명 중 배우는 메릴린 먼로와 이소룡, 2명뿐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소룡은 세기의 인물이다.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1966년 미국 TV 액션물 ‘그린 호넷’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그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971년 첫 주연 작품 ‘당산대형’ 때부터다. 이후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와 유작 ‘사망유희’까지 단 5편의 영화만으로 최고의 스타가 됐다. 이소룡은 1970, 80년대 전 세계 남성들에게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소룡이 큰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그가 완벽한 캐릭터를 구축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김시무 부산영화제연구소장의 분석이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년)에 출연한 왕위(王羽) 등 이전 홍콩 액션 스타들은 손으로 싸운 데 비해 이소룡은 동작이 크고 화려한 발 기술을 구사했어요. 발차기로 머리 하나는 더 큰 서양인을 연방 쓰러뜨리잖아요. 왕(王)자가 선명한 복근을 보여주기 위해 윗옷을 벗은 점도 이전 배우들과 달라요. 섹스어필인 셈이죠. 여기에 짧은 시간에 대표작들을 쏟아내고 33세에 요절한 점도 아우라를 만들어냈죠.” 이소룡 이후 액션스타 청룽, 리롄제(李連杰·이연걸), 전쯔단(甄子丹·견자단) 등에게 왕자 복근과 상의 탈의는 기본이 됐다.

이소룡 무술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종학 총본관장은 “무술에는 소림무술, 합기도 등 다양한 분파가 있는데, 이 무술들은 자신들이 최고라며 수련자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 무술에 사람을 맞추라는 격이다. 하지만 이소룡은 무술의 장점을 모아 주체를 개인으로 바꿨다. 그가 무술로 전 세계를 흔들 수 있었던 이유다”라고 했다.

이소룡은 영화배우를 넘어 동양인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은 문화적 현상을 상징한다. 1981∼1996년 독일에서 유학한 황철민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의 평가다. “아편전쟁 이후 유럽인은 동양인을 게으르고 ‘찌질’한 존재로 여겼죠. 하지만 이소룡의 등장 이후 아시아인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이는 문명사적 대전환입니다. 지금도 이소룡은 유럽에서 인기가 있는데, 지난 40년은 이소룡이 서양인의 모세혈관까지 파고든 시간입니다.”



:: 이소룡 연보 ::

-1940년 11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
-1961년 미국 워싱턴주립대 철학과 입학
-1971년 첫 주연 작품 ‘당산대형’ 개봉
-1972년 두 번째 주연 작품 ‘정무문’ 개봉
-1973년 주연 각본 감독 맡은 ‘맹룡과강’, 할리우드와의 합작 영화 ‘용쟁호투’ 개봉, 7월 20일 홍콩에서 의문의 사망
-1978년 유작 ‘사망유희’ 개봉

민병선·구가인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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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스케치]

방송-문화계 남성 5인 “나에게 이소룡은…”

기사입력 2013-09-07 03:00:00 기사수정 2013-09-07 03:58:26
70년대 짓눌린 욕망의 분출통로… 강한 남자의 판타지였다

김태훈(44·팝칼럼니스트)

초등학교 때 비디오를 통해 이소룡의 영화를 알게 됐다. 1980년대는 아파트촌을 중심으로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가 보급되던 시기였다. 당시 불법 복제본이 많이 돌았는데 남자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게 이소룡의 영화였다.

영화를 다 챙겨 봤지만 그가 죽었다는 것은 꽤 뒤에 알았다. 이소룡의 영화를 보면서 사춘기 남자 아이들은 남성성을 확인했다. 강해지고 싶은 욕구를 이소룡이라는 판타지를 통해 해소한 것 같다.    
    
    
    
    

천명관(49·소설가)

내 또래 세대에게 이소룡은 슈퍼 히어로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것은 동양인으로서의 ‘열등감’과도 닿아 있는 것 같다. 한창 활동하던 시절 이소룡은 아시아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당시 인기 있었던 폴 뉴먼, 말런 브랜도와 비교하면 키도 작고 연기했던 캐릭터도 단순했다. 하지만 멋진 스타일을 보여줬다. 그처럼 육체성이 강조된 히어로는 이소룡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만한 인물은 없었다. 지금도 다들 이소룡을 흉내 내는 것을 보면.
    
    
    


장동민(34·개그맨)

고등학교 때는 가방에 절권도 관련 서적만 가지고 다녔고 대학 시절엔 이소룡이 그려진 옷이나 차이나풍 도복을 입고 다녀서 사람들이 ‘소룡 씨’라고 불렀다. 내 모든 아이디는 이소룡의 영어 이름인 ‘Bruce’로 시작한다. 슈퍼맨은 외계인이고 배트맨에겐 고가의 장비가 있으며 스파이더맨은 변종이지만 이소룡은 순수한 인간이다. 무도인이자 철학자로서도 그는 출중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의 삶을 동경한다. 단 하루라도 이소룡처럼 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임진모(54·음악평론가)

잠재됐던 그 세대 감성의 폭발을 상징하는 이가 이소룡이다. 요즘 아이들이 아이돌 그룹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정무문’이 개봉한 해에 초토화되듯 한결같이 그에게 넘어갔다. 당시 중학교 교실에서는 쌍절곤 흔들고, 절권도를 흉내 내는 아이들과 그들이 내는 ‘아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무문은 진짜 싸움 같았다. 액션에 촉과 날이 있었다. 굉장히 ‘레알(real)’이었다. ‘정무문’ ‘당산대형’ ‘맹룡과강’ ‘용쟁호투’. 당시엔 네 편의 이소룡 출연 영화 제목을 못 대면 그는 대중문화를 이해 못 하는 사람이었다. 대중문화로 가는 교과서 역할을 했다. 이소룡 때문에 잡지를 사게 됐고, 그림을 그리게 됐으며 그림을 그릴 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음악을 만났다.
    
    
    


유하(50·영화감독)

초등학교 5학년 때 재개봉관에서 이소룡의 ‘정무문’을 처음 봤다. 얼마나 여러 번 상영한 필름인지 화면에는 비가 내렸고 심지어 마지막 장면은 잘려 있었다. 하지만 이소룡은 너무 강렬했다. 버스비를 아껴서 이소룡 영화를 보러 다녔다. 반 친구들 절반 이상이 이소룡의 팬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짓눌린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이소룡이었다. 그의 비장미 넘치는 액션은 유신시대의 음울한 분위기와도 어울렸다. 절권도 고수의 액션은 화려하진 않지만 진실을 담고 있었다. 이소룡 시대가 저문 뒤 1980년대 청룽의 시대가 왔다. 나와 같은 이소룡 팬들은 청룽을 좋아할 수 없었다. 청룽은 이소룡에 비하면 너무 경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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