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종교문제연구의 대가 탁명환 선생이 기습 살인을 당했던 94년을 기억합니다.
신천지 등 사이비종교가 난무하는 세상에 그의 역할이 없음에 수많은 가정이 파탄납니다.
그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분의 명복을 빕니다.
그 분의 아들 탁지원씨가 좀더 부친의 필생 업적을 잘 이어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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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2월19일 새벽 탁명환 소장이 살해된 서울 노원구 월계3동 삼호아파트 현장에서 경찰이 조사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토요판]
표창원의 죄와벌
<30> 종교연구가 탁명환씨 살해사건
사이비종교 추적·비판해 온
탁명환
‘현대종교’ 발행인
1994년 괴한의 칼에 맞아
과다출혈로 숨을 거뒀다
범인은 탁씨가 비판했던
한 교회 목사의 수행비서
검경은 배후수사 집중했지만
증거
부족해 단독범행으로 결론
1994년 2월15일 저녁 문화방송(MBC) <피디수첩>은 ‘의혹, 영생교를 밝힌다’라는
제목으로 그동안 사이비종교로 지탄을 받던 영생교를 둘러싸고 제기되었던 다양한 문제들을 심층 보도했다. 영생교가 교주 조아무개(당시 63살)씨를
신격화하며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거짓 주장을 내세워 서민들을 현혹해 ‘근화실업’이라는 회사에서 일하게 하면서도 임금도 주지 않고,
말 안 듣는 신도를 납치해 폭행 및 살해하고, 이탈한 신도에 대한 보복 범죄 등을 자행해 왔다는 충격적인 의혹을 보도했다.
조아무개씨는 1981년 ‘개벽사상’에서 파생된 토속 신흥종교인 천부교 신자이던 시절 불교와 기독교 등 주류 종교의 사상과 이론을
토속 종교와 접목시켜 영생교를 만들었다고 했다. 기존 종교가 주장하던 ‘사후 영생’이 아닌 ‘살아서 영생’을 주장해 당시 교인들 사이에 큰
관심을 받아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던 중이었다. 대개의 신흥종교가 그렇듯 초기 교세 확장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드러나기도 하는 반면, 여타 종교의
경계와 시샘으로 근거 없는 음모와 낭설이 확산되기도 한다. 영생교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에 대해 영생교 쪽은 모두 악의적인 음해와 모략,
낭설이라고 주장하며 <피디수첩>의 방송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고 협박성 전화, 집단 시위 등 온 힘을 기울였다.
이 방송 뒤 탁명환(당시 58살) ‘월간 현대종교’ 발행인 겸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과의 인터뷰가 화제로 떠올랐다. 그는 영생교를
비롯한 한국의 신흥종교 집단에 대해 집중 추적하고 비판해 왔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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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은 이단 종교를 추적하고 비판해오다 1994년 2월 ㄷ교회의 신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탁 소장은 용기 있게 이단을 고발한다는 평가와 부정확한 근거로 특정 종교를 음해한다는 비판을 함께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
범인이 떨어뜨린 쇠파이프에서 얻은 결정적 증거
<피디수첩> 영생교 편이 방송된 지 3일이 지난 1994년 2월18일 밤, 귀가하던 탁명환
소장은 차를 주차하고 집으로 들어가던 중에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다가선 괴한은 칼로 탁
소장의 가슴과 배를 마구 찔렀다. 괴한이 휘두른 칼은 길이만 28㎝인 치명적인 살상 무기였다. 괴한은 칼뿐 아니라 미리 준비해둔 쇠파이프도 마구
휘둘러 때렸다.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쓰러진 탁 소장은 비명은커녕 신음도 내지 못했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밤의 괴성과 소음은 잠든 이웃들을 깨웠다. 여기저기서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괴한은 달아났다. 그동안 탁명환 소장이 통일교와
영생교 등 여러 신흥종교에 대한 고발과 비판을 해 오면서 끝없는 협박과 테러에 시달렸던 터라 탁 소장의 가족은 늘 불안과 긴장 상태였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마자 당시 스물여섯살이던 아들이 뛰어나왔다. 탁 소장은 온몸에 피를 흘리는 처참한 모습으로 가까스로 여린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달려나온 아들의 귀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범인… 경찰… 찔렀어….”
병원으로 옮겨진 탁 소장은 이미 과다출혈 상태였고 장기 손상도 심각해 숨지고 말았다. 경찰에는 비상이 걸렸다. 사흘 전 방송된
<피디수첩> 영생교 편의 파장이 확산되던 때였다. 영생교 쪽의 보복 살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경찰은 다음날인 2월19일,
그동안 영생교 신도들에 대한 납치와 폭행, 살인 등의 혐의를 받고 있던 이른바 ‘영생교 행동대원’ 김아무개(당시 44살)씨와 라아무개(당시
45살)씨를 긴급 공개수배하고 영생교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를 강화했다. 국회에서는 탁명환 소장 피살사건의 충격으로 영생교 관련 의혹을 밝히는
진상조사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사건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당황한 범인이 현장에 떨어뜨리고 간 쇠파이프를 발견했다. 파이프를 둘러싸고 있는 달력에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범인을 추적할 단서가 될 듯했다. 주민등록번호 조회를 한 결과 이들의 주소지가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으로 확인되었고 주소지로 찾아간
경찰은 그곳이 ㄷ교회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숙소임을 알아내었다. 숙소에는 달력에 적힌 사람들 중 8명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의 이름은 임아무개(당시 26살). ㄷ교회 박아무개(당시 66살) 목사의 운전사 겸 수행비서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다른 직원들도
임씨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 걱정하는 중이라고 했다. 경찰은 ㄷ교회 박 목사 역시 탁명환 소장에 의해 ‘이단’, ‘사이비’로 규정되어
비판과 공격을 받아 왔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범행의 동기와 정황증거들이 확보된 것이다. 이제 용의자 신병을 확보해 진술을 받아내고 범행에 사용한
도구인 칼을 찾아야 했다. 또 용의자의 단독범행인지, 공범과 배후가 있는지 여부 등을 밝히는 일도 중요했다.
서울경찰청 강력반은 사건 발생 3일 만인 2월21일 용의자 임씨를 붙잡았다. 경찰의 추궁에 용의자는 범행을 자백했고, 경찰은
검찰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검찰은 자백의 신빙성이 부족하고 살해 도구 등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며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하고 보강수사를
지시했다. 임씨 검거 다음날 경찰은 그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임씨는 경찰의 수사와 감시 아래 있어 도주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임씨는 칼을
숨긴 장소를 밝히라는 경찰의 계속된 추궁에 못 이겨 결국 “사건 현장에서 ㄷ교회로 오던 길에 근처 개천에 버렸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구로구
개봉동 철산교 밑 ‘목감천’을 수색해 물속에 가라앉아 있던 칼을 찾아냈다.
사건 발생 다음날 대책회의 연 ㄷ교회
임씨는 구속되었고 경찰은 그의 배후 수사에 집중했다. 임씨는 계속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ㄷ교회
주요 인사 등 임씨 주변 인물들에 대한 계좌추적과 행적 수사 및 탐문 수사 등 압박의 수위를 높여나갔다. 임씨는 “탁 소장이 내가 소속된
ㄷ교회와 내가 믿고 따르는 박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비난한 것에 분노해 겁을 주려고 미행을 하다가, 탁 소장이 30~40대 여성과 몰래
만나는 현장을 목격하고 분노가 치밀어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임씨가 검거된 뒤 ㄷ교회 쪽은 충격에 휩싸였고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교주로 추앙받던 박 목사가 사건 직후 미국으로 출국한 뒤
장기간 귀국하지 않아 혼란과 불안은 더욱 가중되었다. 당회장 김아무개(당시 61살) 목사 등 ㄷ교회 지도부는 여러 차례 대책회의를 열었고
한편으론 신도들을 진정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다른 한편으론 보수적인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ㄷ교회의 공식적 입장은
“임씨의 범행 사실을 이날 오전 방송 뉴스를 통해 알았을 뿐 전혀 몰랐던 일”이고 “교회 쪽의 배후 지시나 관여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경찰의 배후 수사는 소득이 있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2월19일, ㄷ교회에서 임씨의 탁 소장 살해 범행에 대한 ‘대책회의’가
열렸던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경찰 수사 결과 당시 대책회의에는 ㄷ교회 조아무개(당시 32살) 목사, 신아무개(당시 47살) 장로 등 여럿이
참석했고 그날 미국으로 출국한 박 목사는 공항에서 자세한 보고를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경찰은 임씨의 도주와 피신을 돕고 증거물인 달력을
소각하는 등 적극적으로 은폐에 가담한 조 목사와 신 장로를 체포·구속했다.
경찰에서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박 목사를 배후로 지목하고 수사를 진전시켰다. 결국 검찰은 박 목사가 사건 전 임씨에게 “공수부대
출신이라면서 아무 소용 없구먼.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사탄이 활개치고 다니면서 온갖 헛소리와 비방을 해대는데 때려잡지 못하느냐”라는 취지의 말을
여러차례 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박 목사가 탁명환 소장을 미워하고 두려워한 이유가 ‘이단’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의 사생활에 대한 폭로
가능성 때문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박 목사는 지난 30여년 동안 2개의 이름과 2개의 호적을 갖고 각기 다른 두 부인과 자녀들을 두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탁
소장이 그 사실들을 조사해 왔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박 목사가 ‘박철’이라는 이름으로 낳았던 딸이 1993년 5월 박 목사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한 사실도 드러났다. 박 목사는 측근을 통해 소송 취하를 종용했지만 소를 제기한 전처소생 딸이 100억원을 요구하는 바람에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던 중이었다. 이 사실이 고스란히 탁명환 소장의 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단지
‘정황증거’에 불과했다. 박 목사를 살인교사범으로 처벌하기 위해선 살인 피고인인 임씨의 구체적 진술이나 살인 전후에 오간 금품의 흐름 등 좀더
‘직접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된 탁 소장의 주검
탁명환 소장 살인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임씨의 범행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개인 단독행동이다’라는 입장을
표방한 ㄷ교회는 내부적으로는 탁 소장이 제기한 ‘이단’ 및 박 목사의 사생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면서 신도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ㄷ교회 쪽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인 대응을 해 나갔다. 탁명환 소장이 생전에 ㄷ교회와 박 목사에게 제기했던
비판에 대해 “지난 72년 탁씨가 종교문제연구소를 설립한 뒤 ㄷ교회 설립자인 박 목사가 개인적인 친분관계로 자금 지원을 해주다 이를 중단하자
ㄷ교회를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다. 한 대형 교단을 이단으로 비판해 오던 탁씨가 지난 78년 돈을 받고 이 교단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급선회해 박
목사가 자금 지원을 중단하자 태도가 돌변했다”고 주장하며 개인감정에서 비롯된 허위 주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고인 임씨에 대한 재판이 한창 진행중이던 1994년 7월7일에는, ㄷ교회 신도인 나아무개(당시 21살)씨가 “탁명환은 한국 목사
170여명을 집단으로 고소한 고소의 명수, 돈 안 주면 이단으로 선언한다”는 등 탁 소장을 비방하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 6천여장을 만든 뒤
법원과 검찰, 교회 목사 등에게 발송한 사실이 드러나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법정에서는 살인범 임씨가 ‘박 목사가 범행을 사주하지 않았고, 오직 스스로 판단해 저지른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검찰은
박 목사에게 살인교사 혐의를 적용할 수 없었다. 1994년 6월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검찰의 ‘사형’ 구형을 받아들이지 않고 피고인
임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6개월 뒤 12월엔 항소심 재판부가 원심의 형량이 너무 과하다며 임씨의 형량을 ‘징역 15년’으로 감형했다.
탁명환 소장은 생전에 ‘사후 장기기증 서약’을 한 뒤 사망하면 주검을 의과대학 실습을 위해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겨둔 상태였다.
가족은 고인의 유지를 따라 시신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했고, 해부 실습 후 그의 골격은 ‘뼈대본’으로 병원에 보관되어 있다.
탁명환 소장의 유족은 사건 발생 이후 줄곧 범행의 치밀성, 계획성, 도주 및 증거인멸 과정의 면밀함 등으로 판단해 볼 때 결코
임씨 개인의 우발적 단독범행일 리가 없다고 주장해 왔다. 박 목사 등 ㄷ교회 지도층의 범행 교사와 사전 모의 및 도주와 증거인멸 방조 정황이
명확히 드러났고, 범행 당시 현장에 2명 이상의 남자들이 있었던 것을 본 목격자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탁명환 소장의 맏아들(49살)은 선친의 유지를 이어 신흥종교 연구를 계속해 온 끝에 부산장신대학교 교회사 전공 교수가 되었다.
부친이 30년간 모아온 자료와 쓴 글 등을 정리해 <사료 한국의 신흥종교>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2009년 2월16일엔 탁명환
소장 15주기에 맞추어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2010년 9월9일 대법원은 ㅍ교회(ㄷ교회의 새 이름, 박아무개 원로목사)가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연구보고서를 쓴
총신대학교 교수들을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에는 1994년 ‘임아무개의 탁명환
소장 살해사건’이 언급되었다.
한편, 탁명환 소장 피살사건 직후 범인으로 의심받았던 ‘영생교’는 탁 소장 살해 사건과는 관련 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방송에서
제기된 신도 납치, 폭행, 살해 암매장 혐의가 사실로 밝혀지고 주검들이 발견되어 교주 조희성과 신도들이 체포돼 유죄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