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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황순원 長男^^ 황동규 시인 문학 3帶 상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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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800회 작성일 2013-09-0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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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3년 09월 06일(金)
“詩가르치는 대학 많지만
 
 
 
 
 
문학 아닌 재주만 가르쳐”
 
 
 
 
황동규 시인 미투데이공감페이스북트위터구글
▲ 황동규 시인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캠퍼스 안의 연못 옆 정원에서 ‘시를 쓰면서 느끼는 삶의 작은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연수 기자 nyskim@munhwa.com
황동규(75·서울대 명예교수) 시인은 존재 그 자체가 노년 예찬이다. 70대 중반의 노년에 생애 최고의 시집을 내놨다. 올 초에 낸 시집 ‘사는 기쁨’(문학과 지성)은 상처에서 새싹을 틔우듯,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사는 기쁨에 매여 있는 삶의 황혼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시집의 전체 분위기는 곳곳에서 터지는 상상력 넘치는 싱싱한 언어들과 상승하는 정신으로 오히려 삶의 생기가 가득하다.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라는 시집의 한 구절은, 소소한 삶을 버티는 생명력에 대해 견딜 수 없는 간지러움으로 표현했다. 가볍게 툭툭 일상을 건드리는 비유에 상상력이 빛난다. 그의 시집 전체에 흐르는 맑고도 강력한 에너지는 어딘가의 깊고도 아득한 원천에서 솟아나고 있다.

황 시인과의 만남은 지난 8월 26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명예교수실에서였다. 사진촬영을 위해 이젠 덥지 않은 바람이 살랑대는 서울대 교정을 함께 걸으면서, 그의 시적 성취와 삶에 대해 물었고, 황 교수는 시종 밝은 미소로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가을바람처럼 시원했다. 먼저 황 시인이 ‘사는 기쁨’에서 “한없이 맑고 적적한 산수”라고 했던 원나라 시대 산수화가 예찬(倪瓚)을 왜 좋아하는지 물어봤다.

―원나라 말기 화가 예찬은 전 재산을 친지들에게 나눠주고 배를 탄 채 강을 오가며 살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신선이 된 셈인가요.

“내가 동양인이니까 동양화를 좋아하지요. 명청시대보다는 송나라 시대와 원나라 시대의 화가들의 그림과 시가 좋습니다. 황공망 등과 더불어 원대 4대 화가로 불리는 예찬 그림은 신선이 들어가 살만한 곳을 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시는 신선이 안되겠다는 시였습니다. 신선이 되려면 상상력도 다 버리고 가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추사의 제자 허련이 화실을 운림산방이라고 했는데, 운림(雲林)은 예찬의 호예요. 예찬은 원나라 화가 가운데 가장 시적인 사람이었지요. 추사 역시 시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초월 대신 오늘 여기의 삶을 열정적으로 사는 게 선생님 시의 근본이지요. 예찬이 살 만한 곳으로 태호에 들어갔지만, 황 시인께서 어느 품보다 더 두터운 자연의 품이라고 했던 고요한 몰운대에는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예전 모습이 많이 훼손됐기 때문인가요.(몰운대는 황 시인의 시 몰운대행이 나온 뒤 문학청년들이 앞다퉈 시를 읊조리며 산을 오르는 명소가 됐다.)

“몰운대는 덜 살고 싶을 때 슬그머니 들르고 했던 곳이지요. 시에서 쓴 대로 ‘군에서 주차장을 신설하고 매점과 화장실을 내’고 길이 뚫리고 포장이 돼 오르 내리는 맛이 확 줄어들었어요. 험하던 바윗길이 완만해지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지만 예전처럼 길섶에 야생화가 야생화처럼 핀 모습은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시 때문에 명소가 된 몰운대처럼 황 명예교수의 시 ‘즐거운 편지’는 연애편지의 대명사이지요. 이 시를 매개로 해서 헤어지려던 남녀가 다시 만난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헤어질 뻔한 사람이 이 시로 만났다는 얘기를 들은 게 최소한 다섯 차례는 됩니다. 헤어지자는 연인에게 이 시를 보내니까 다시 만나게 됐다는 얘기, 시 때문에 끊어질 뻔하다 화합하고 결혼에 골인했다는 얘기 등을 직접 들었어요. 며칠 전에는 한 커플이 결혼 청첩장에 ‘즐거운 편지’를 넣어도 좋겠느냐는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즐거운 편지’는 연상을 짝사랑한 시입니다. 여자들은 짝사랑을 받는 것을 좋아하나 봐요.(웃음)

―요즘 한국 문학의 위기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원인은 무엇일까요.

“소설은 너무 일본소설화하고, 시는 유럽에서는 이미 단절된 부조리시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가끔 보면 부분적으로 일본소설을 흉내 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내에 나온 상당한 시가 부조리극에서 나온 부조리시인데 전체적으로는 허망합니다. 어떻게 보면 부조리시는 쓰기가 쉽지요. 잘 썼건 못썼건 평가하기 힘들잖아요. 독자들로서는 둘 다 신물나죠.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는 것은 인쇄 매체 자체의 인기가 떨어지는 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좋은 소설가와 시인이 줄어들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난 하루키 책을 한 권밖에 안 읽었지만 재미있잖아요. 하지만 우리나라 작가들이 하루키를 흉내 내서는 좋은 작품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시집의 경우도 절대 양은 아직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춤과 시를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왕의 반역자’인 성삼문을 죽일 때도 시를 짓게 하고 죽일 정도였으니까요. 성삼문은 그냥 담담하게 ‘북치는 사람이 명을 재촉하나 내가 죽으면 어디서 자느냐’라는 시를 썼지요.”

―어떤 작품을 써야 할까요.

“대학 문예창작과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시를 가르치는 곳이 많지만 진짜 문학이 아닌 재주를 가르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요즘 유럽과 미국 시의 기본은 자기 삶을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를 놓고 씨름하고 있지요. 재미 시인 수전 김 콱은 미국 시단에서 이름도 나고 상도 받았는데, 이는 자기 삶을 제대로 형상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세계 시 경향을 보면 이념이 붙은 시는 초현실주의로 끝났습니다. 주의나 이데올로기에 맡기지 않고 자기 삶을 예술화시키는 것이 주류입니다. 내가 조금 사랑받는 것도 시속에서 내 삶을 형상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미당에 대해 평가하신다면.

“그분에 대해 이런저런 논란이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시에 황홀을 제대로 만들어준 분 가운데 한 명입니다. 시적으로 높이 평가하지요.”

―시를 통해 치유의 효과가 나타나기도 하나요.

“시가 고쳐준 게 많죠.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 차츰 저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가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내가 쓴 ‘오미자 술’이라는 시입니다. 그 때 친구와 한바탕 싸워야 했는데 아름다운 오미자 술 한잔을 마시고 없던 거로 했지요. 시에서 크건 작건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 시인은 물론 독자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기에 극서정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와 시인은 서로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시에서 배우기도 하고, 시를 배워주기도 하는 것이지요. 좋은 시인은 어떤 형식으로든 시적 자아와 서로 주고받아야 합니다. 시적 자아는 미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시인보다 위에 있지요. 시인이 자신보다 색깔이 짙게 만든 것이니까요. 그 존재와 대화해 손해 볼 이유가 하나도 없지요. 엘리엇이나 보들레르와 대화를 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당신도 시적 자아와 대화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황 시인께서는 구체적으로 치유를 넘어 병을 치료한 예도 있다는데요.

“책을 난독해서 생긴 병인데, 시야에 모기가 날아가는 것 같은 비문증이 있었습니다. 어느 가을, 그 증세가 심해졌어요. 눈을 꽉 감았는데도 안 없어져서 고생했지요. 고통스럽다는 시를 쓰고 있을 때 문득 ‘(모기가)날면 어때’라는 시구가 떠올랐어요. 그다음부터는 그 증세가 생길 때마다 ‘날면 어때!’라는 말을 썼더니 효과가 있었습니다. 의식을 안하면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 낫지는 않았지만, 증상이 완화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15번째 시집 제목이 ‘사는 기쁨’인데 그 기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큰 기쁨을 얘기하면 여러 사람들이 성공을 얘기하는데, 성공은 대개 많은 사람들의 실패 위에 서는 것이어서 비인간적인 데가 많죠. 그보다는 나는 인간의 기쁨, 손자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것 같은 데서 사는 기쁨을 느낍니다. 이번 시집 전체에 흐르는 것이 그렇지요. 인간의 아픔과 외로움, 그리고 허무를 벗어나는 신선이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를 극복하는 데 영감을 주는 것이 현대 지식인과 예술인의 존재이유입니다.”

황 시인이 이미 40대 중반부터 시작해 50대 후반에 끝난 ‘죽음에 대한 시’ 풍장은 한국 현대 시사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의 연작시 ‘풍장’은 시인이 하나의 테마를 14년 동안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우리 시단의 보기 드문 역작이다. 굴곡과 변화의 폭을 지닌 물리적 시간으로 잴 수 없는 그 시간의 깊이는 대단한 것이다. 시인은 그 시를 냈을 때 “나는 초월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초월을 향해 가고 있는 것들의 때로는 숨가쁘고 때로는 넉넉한 그러한 몸짓을 사랑합니다”라고 얘기한 바 있다. 황 시인은 “그때 죽음과 싸운 체험이 지금도 죽음에 대해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만들었다”며 “그것이 삶을 시 한곳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6·25전쟁 때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시체도 직접 보았고, 대구·부산에서 좌판을 벌이고 장사를 했는데, 순경의 발길에 차여 쓰러지기도 하고, 고생을 했지요. 그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그 생각이 지금도 시를 열심히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을 평론가들이 최고의 시로 꼽는데, 지금도 황 시인의 시 세계가 계속 상승하는 것에 대해 젊은 시인들이 많이 감탄하는 것 같습니다.

“75세면 살만큼 살았잖아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작곡가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베토벤보다 딱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존경하는 사람보다 10년만 더 살면 충분한 것 아닌가요. 지금은 거의 20년을 더 살았어요. 사실 이번 시집을 마지막 시집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로서는 전력투구한 시집이지요. 해설이 늦어져 몇 달 지나는 동안 시집이 하나 더 되겠다는 생각이 스치더군요. 단 ‘쓰다가 상상력이 막히면 미완으로 남기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완의 작품을 남기는 게 자연스럽지요. 끝까지 일했다는 것 아니겠어요. 완성하고 쉬는 삶보다 그게 더 나은 삶 아니겠습니까.”

(그는 유언도 남겼다. ‘생명보조 장치를 달지 말아라. 치매에 걸리면 훈련받은 요원이 있는 요양원에 보내라’는 내용 등이다.)

그는 미술작품에도 영감을 많이 받았다. 미켈란젤로가 대표적인 화가다.

―미켈란젤로에 영감을 받은 순간이 작품에 영향을 줬나요.

“처음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갔을 때 전면 벽화 ‘최후의 심판’을 보고 전율을 느꼈죠. 지금 생각하면 예수가 가운데 서 있고 옆에 마리아가 다소곳이 서 있었습니다. 예수가 재림하면 예수의 우편에서 천 년을 누릴 사람들이 예수 앞에 빙 둘러 서 있었습니다. 바톨로뮤는 순교할 때 벗겨진 자신의 피부 껍질을 들고 서 있고 마태 요한 베드로 다 순교한 사람들이에요. 예수보다 어떻게 보면 더 고통스럽게 순교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얼굴을 보세요. 예수 재림 이후 1000년을 누리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최후의 심판을 거부하는 얼굴들이지요. 그게 휴머니즘의 극치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자기보다 200년 전에 죽은 단테 최고 연구가 중 한 명일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시 가운데 내가 인용한 구절이 하나 있지요. ‘아 이루소서 주여, 내가 나로 다시 환원되지 않도록’ 이런 내용이에요.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다시 내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기원입니다. 나는 화가와 작곡가들 가운데서도 문학과 가까운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왜냐면 문학이 그들의 작품을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있으신가요.

“고등학교 때 휴거 비슷한 교회에 다녔어요. 지금은 종교가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는 귀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기보다 더 큰 존재를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주죠. 인류를 인류답게 하는데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기보다 더 큰 존재를 만나는 순간이 없다면 도스토옙스키도 톨스토이도, 셰익스피어도 없는 거죠. 물론 소포클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속한 현실생활을 담지 못하는 시는 공허하기 마련이다. 황동규 시인의 시에서 드라마는 사소하면서도 극적이다. 평론가들은 황동규의 극서정시에 대해 어떤 정황이 제시되고 시적 자아가 그것을 통과함으로써 내적 변화를 경험하게 하는 시적 짜임새라고 말한다. 그는 1970년대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고 노래했다. 그가 지금 굴리면서 자신을 변화시켜 역동성을 살리게 하는 바퀴는 무엇일까.

“하여간 ‘쉬운 바퀴’는 안 좋아해요. 그 뭔가 새로운 생각, 새로운 아이디어, 최소한 자기 능력보다 벅찬 일을 시도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힘든 일이 쉬운 일보다 가치가 있고, 그게 삶의 참 모습입니다.”

아직도 표정이 해맑아 어떻게 보면 천진스러워 보이는 시인은 지금도 열정의 바람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인터뷰 = 예진수 문화부장 jinye@munhwa.com
e-mail 예진수 기자 / 문화부 / 부장 예진수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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