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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558회 작성일 2013-09-05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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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서 냉전 끝난 적 없어…

 
 
 
 
 

                     

 

 

                         평화체제 구축 실패가 원인”

 
 
 
 
 
 
 
등록 : 2013.09.03 20:34수정 : 2013.09.03 22:19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왼쪽부터),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왕후이 중국 칭화대 교수,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8월28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정전협정 60돌을 맞아 한반도 정전체제의 의미와 실천적 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올해로 한국전쟁이 정전된 지 60년이 지났다. 한반도에선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세계에서 선례를 찾을 수 없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60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한반도의 정전체제는 왜 해소되지 않나? 이를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 동아시아와 한반도 문제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한국·미국·중국·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모여 한반도 정전체제의 의미와 실천적 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좌담은 8월28일 한겨레신문사 8층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좌담자 소개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 한반도 근현대사의 전문가로 한국전쟁에 관한 기념비적인 저작인 <한국전쟁의 기원>(1981~1990)을 남겼다.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주전공인 러시아사를 시작으로 북한 현대사, 남북관계, 한반도 문제 등에 여러 연구 성과를 남겼다. 군사독재 시절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후원한 일본의 대표적인 실천적 지식인으로 꼽힌다.
왕후이
중국 칭화대 교수. 루쉰 문학 연구에서 출발해 중국 신좌파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연구 영역을 넓혀 왔다. 주요 저서로 <탈정치화의 정치><죽은 불 다시 살아나>등이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한국전쟁, 한-미 관계, 해방 전후 한국정치 등에서 꾸준한 연구 성과를 거둔 한국의 정치학자.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996)은 한국전쟁에 대한 주요 연구 성과로 꼽힌다.
■ 정전체제가 60년이나 지속되는 이유
박명림(이하 박)올해는 한국전쟁이 정전된 지 60돌이 되는 해다. 정전체제가 60년이나 지속된 요인부터 얘기를 풀어가 보자.
브루스 커밍스(이하 커밍스) 나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누구도 지금과 같은 불안정한 상황이 이렇게 장기화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본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전쟁에 참여한 어떤 진영도 전쟁의 결과물인 휴전선을 인정하고 타협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정전 1년 뒤인 1954년 정전협정에 따라 제네바에서 평화협상이 열렸다. 정전협정에 따라 군사 대결이 끝나긴 했지만 갈등을 종식시키진 못했다. 전쟁은 아니고 평화도 아닌 매우 특이한 전쟁 중단 방식이었기 때문에 1953년에 형성된 체제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와다 하루키(이하 와다) 한국전쟁은 2차 세계대전 뒤 냉전이 시작된 이래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두번째의 새로운 아시아 전쟁이었다. 첫 전쟁은 중국 내전이었다. 제국주의가 해체된 뒤 동아시아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국민국가를 형성하려는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중국 내전 때는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개입이 있었다.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미국은 전쟁이 종료된 것이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번째 전쟁은 베트남전쟁이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의 종식 직전에 미국과 중국이 만나 데탕트를 이뤘다. 이 만남으로 미국과 중국은 서로를 인정하게 됐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한국전쟁의 종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흐름은 연속적인 것으로서 한국전쟁은 동아시아의 다른 무대에서 계속됐다. 1953년의 정전은 평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커밍스 맞다. 미국은 1954년 제네바에서 협상하려 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공산주의와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북한, 중국, 베트남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이것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가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군에 패배하고 난 뒤 분명해졌다. 미국은 프랑스 대신 이 전쟁에 개입했다.
왕후이(이하 왕) 사실 동아시아에서 냉전은 끝난 적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냉전이란 냉전시대에 있었던 특정한 질서를 뜻한다. 이를테면 핵 위협을 보자. 한반도에서 핵 위협은 매우 흔한 것이다. 이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만과의 양안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의 개입은 한반도에도 있고, 대만에도 있고, 동아시아의 곳곳에 있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후퇴하고 싶지 않고, 무기를 팔고 싶어한다. 그런 미국의 정책이 지금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냉전 상태가 크게 변하지 않은 절반의 전쟁상태라고 생각한다.
브루스 커밍스
6·25 기원은 식민시대 대립
미·소 개입으로 국제전 확산
양 진영 휴전선 인정않고 불타협
미 ‘징벌적 외교’ 자기파멸적
와다 하루키
6·25, 동아시아 다른 곳서 계속
미, 베트남 패전서 교훈 못얻어
미-일과 관계 정상화 못한 북한
남한-중·소 수교에 위협 느껴
■ 북-미 관계, 그리고 G2 시대
국제관계를 보면 미국은 전쟁 종료 이후 또는 적대국가들과 모두 한 세대 안에 관계를 정상화해왔다. 심지어 전범국가와도 곧바로 강화조약을 맺거나 국교를 정상화해 왔다. 소련, 서독, 일본, 동독, 중국, 베트남 등이 모두 그랬다. 그런데 미국은 오직 북한과는 60년이 넘도록 강화조약을 맺지도, 관계를 정상화하지도 않고 있다. 이는 세계적 예외 사례로서 한반도 정전체제와 동아시아 냉전이 지속되는 핵심 이유이다. 즉 평화체제 구축 실패의 제일 요인이 아닌가 싶다.
커밍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최소 30년간은 미국이 남한을 지원해야 했다. 그래서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북한과 경쟁 관계에 있던 남한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붕괴하자 상황이 변했다. 북한은 곧 붕괴될 것인데 굳이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관계 정상화를 하지 않는 데 대한 별다른 변명거리가 없다. 한국전쟁으로부터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미국은 그곳에 대사관도 없고 영향력이 없다. 나는 미국이 북한과 빨리 관계 정상화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에 별다른 관심을 쏟고 있지 않다. 미국은 지금 온통 중동 문제에 정신이 빠져 있다. 외교라는 것은 익숙하지 않고 낯선 이들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5년 이후 미국은 외교를 징벌로 사용해 왔다. 우리는 너희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외교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인데, 나는 이것이 자기파멸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와다 내가 말하는 새로운 아시아 전쟁은 1975년의 베트남전쟁의 종료로 끝이 났다. 미국이 패배한 것이다. 물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성격은 다르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반성할 마음이 든다면, 한국전쟁에서도 태도를 바꿔 북한과 관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예상하고서 미국이 패배했다는 불명예스런 인상을 지우려고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에 의한 베이징과의 화해라는 행동으로 나아갔다. 북한은 미국이 중국과 화해를 했다면 자신들과도 화해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김일성이 “닉슨이 백기를 들고 베이징에 갔다”고 말한 것은 그런 생각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닉슨은 북한과 화해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북한과 평화협상을 한다면 미군은 한국 주둔을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이 이 지역에서 군사적인 지위를 유지하려 하는 게 한반도 정세가 풀리지 않는 최소한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독일 정책을 비교한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아닌 소련의 정책 변화가 있었던 덕분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지금 중국이 근본적으로 변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또한 북한이 굴복하기를 바란다. 중국은 거대한 변화기에 있지만 미국이 원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모든 구조가 여기에서 꽉 막혀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구실이 중요해졌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님이 확인됐다.
세계적으로 주요 2국(G2)은 현실이 아닌가? 또 미국과 중국은 동아시아와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도 기축국가다. 중국의 책임대국론도 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군의 철수 문제도 중국, 일본, 러시아의 오랜 대한정책과 역내 상호 경쟁, 남북 적대 상황에 비춰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냉전시대 주한미군은 북한의 대남공격 방어와 남한의 대북공격 저지라는 이중 역할을 수행했다. 주한미군은 일본의 독자적 군비 강화를 견제하는 구실과도 관련된다.
종종 중국의 부상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리라고 말하는 이들을 본다. 그러나 중국은 군사적으로 G2가 될 수 없다. 중국은 심지어 주요 8개국(G8)에 포함되지도 못하는 나라다. 중국 영토 밖에 배치된 중국 병사가 단 한명이라도 있는가. 한국한테 중국의 군사적인 위협이 있는가. 중국은 중국 밖에 단 하나의 군사기지도 없고 작은 군사적인 위협도 없다.
커밍스 미국은 그동안 한번도 아시아를 떠난 적이 없다. 괌, 한국, 일본 오키나와 등에 군사기지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 있던 옛소련 군 기지를 접수했다. 파키스탄에 비밀기지가 있다. 오랫동안 적대해 온 버마와도 관개개선을 이뤘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미국이 외국에 군사기지를 갖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그런 모습에 대해 별로 변명하지 않겠다.
왕후이
한국전쟁 1단계는 해방직후 상황
6·25 외부 직접적 개입 전례 없어
미국의 개입정책에 냉전 계속
중, 군사적으로는 G2 될 수 없어
박명림
미, 오직 북한과만 관계개선 안해
미·중, 한반도문제 해결 기축국가
북-미 관계 정상화와 평화체제
전환 없인 북핵개발 막기 힘들어
■ 남북관계와 한반도 내부
중국이 대국으로 부상한 뒤 우리는 양안 관계, 한국전쟁 참전, 티베트 문제, 중국-인도 국경분쟁, 중-소 국경분쟁, 중국-베트남 전쟁 등 그동안 중국이 펼쳐 온 변방정책을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핵심은 역시 미국과 중국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반도 내부를 보자. 올봄에도 세계 언론들은 제2의 한국전쟁이 터질 위험성을 보도하기에 바빴다. 한국 문제로 인해 동아시아와 세계에 전쟁위협과 갈등이 악화될 때면 세계인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대북정책을 놓고, 일관성을 잃고, 보수와 진보가 격렬하게 다투는 한국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커밍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한국 내부에서 지속적인 관계 강화 움직임이 있었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과 같은 건설적인 사업들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흐름이 뒤집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부시 행정부가 집권하고 한국에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북한한테 매우 당혹스런 상황이 발생하게 됐다. 북한으로서는 갑자기 미국과 남한이 문호를 닫은 셈이다. 거기에 천안함 침몰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사실은 미국과 남한이 정치적인 이유로 화해의 과정을 닫아버린 것이다. 미국과 남한의 정책이 문제를 일으키고 북한의 반응이 이를 다시 증폭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더 앞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서울과 워싱턴의 정치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다. 화해보다는 압박으로 북한의 붕괴를 노린 것이다.
와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한국에서는 더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더는 북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에 흡수될 것을 두려워한다. 북한은 미·일과 관계 정상화를 하지 못했지만 남한은 이미 옛소련 및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이런 안보 위협에 대처하려고 북한은 핵을 개발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매우 지혜롭지 않은 정책을 폈다. 남한은 강하고 북한은 약하다. 어떻게 여기에 균형을 맞추어 그들이 미래를 위해 갈 수 있게 할 것인가?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다.
2주 전에 내가 평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일반 북한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북한에는 지도자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여론이 있다. 이것은 대만과 크게 다른 점이다. 대만은 분리 독립을 원하지만 북한은 통일에 대해 강한 열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남한이 어떤 정책을 취하느냐에 따라 큰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는 좋은 기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주변국들이 북한과 관계개선을 시도하는 순간 늘 역풍이 불었다. 2002년에 일본에 있었는데,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하고 일본과 관계개선을 하려 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평양 방문을 끝내고 돌아온 직후 언론을 중심으로 대단한 반대 여론이 일었다. 미국을 보면, 클린턴 행정부 시절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고 북한한테 경수로를 제공하는 대가로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는 제네바 합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집권한 뒤 이것이 뒤집혔다. 왜 우린 이런 기회들을 잃었을까? 우리는 단순히 모든 일에 대해 북한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약속의 준수와 정책 일관성의 문제는 상호 위반의 사례가 중첩돼 있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독재체제와 민주주의의 차이도 중요하다.
커밍스 북한은 독재라는 매우 연속적인 리더십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일관된 정책을 펼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은 민주주의 체제다. 선거가 끝나 정부가 바뀌면 이전의 정책이 바뀐다.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바꿨고,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바꿨다. 나는 북한의 낙담을 이해할 수 있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와 협상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와다 고이즈미 총리가 2004년 북한을 두번째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매우 실망했다. 민주주의에서도 정치 지도자는 어떤 힘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1차 방문 이후 일본과 1년 안에 관계 정상화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가 돌아온 뒤 납치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공개적으로 “우리는 북한과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바꾸겠다. 그리고 대립에서 우정으로 또 협력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평양으로 떠나기 전에 하네다 공항에서 말했고,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난 뒤에 말했고, 일본으로 돌아와서 다시 말했다. 세번을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북한은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북한, 분리 원하는 대만과 달라…남한 정책따라 큰 변화 가능”
왼쪽부터 브루스 커밍스, 와다 하루키, 왕후이, 박명림. (※ 클릭하면 이미지가 크게 보입니다.)
■ 북한 내부-선군주의
이제 북한 내부의 요인을 말해보자. 개혁개방에 성공한 중국과 베트남, 밑으로부터의 변혁에 성공한 동독과 비교해볼 때 북한은 여전히 폐쇄적 독재체제이며 선군주의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선군주의는 한반도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와다 선군주의라는 북한의 정책은 비상체제다. 주로 밖에서 오는 위협에 대처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군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체제이다. 북한은 실제로 이를 통해 지난 위기를 극복했다. 현재는 이미 권력이 군에서 다시 당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커밍스 그 의견에 동의한다.
왕 다른 한편으로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적 의제가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는 북한 인민들이 이룩한 것들을 평가해야 한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품위를 지키고 있었다. 평양에서 많은 공사현장과 높은 빌딩 등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전기 사정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 주택, 교육, 도로, 건강보험 등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체제도 그처럼 좋진 않다. 북한은 완전 고립된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런 것들을 유지하고 있었다. 놀라웠다. 물론 평양 이외의 모든 곳이 다 그렇진 않았을 것이지만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대부분의 서구 언론들에서 북한은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런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가로막는다. 만약 외부 언론이 논조를 좀더 부드럽게 하고, 북한에 좀 신뢰를 보인다면 북한과 관계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커밍스 방금 얘기는 30년 전인 1981년에 내가 받았던 느낌과 매우 비슷하게 들린다. 나도 북한에서 본 것을 제대로 설명하기란 어렵다고 본다. 북한의 일반 사람들은 보통의 평범한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으며, 일부 북한 사람들 중에는 세뇌당하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도 있어 보였기에 북한에서 본 것을 그대로 북한 밖으로 나와서 설명하기란 어렵다.
와다 현재의 북한은 지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매우 강한 집단 지도체제에 의해 국가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
부시·이명박 문호 갑자기 닫고
북한이 격하게 반응해 문제 증폭
미국에 가장 중요한 건 상호이해
전쟁 발발 가능성 최소화해야
와다 하루키
북, 선군주의로 위기 넘겼지만
권력은 다시 당으로 돌아간듯
안보 우려로 핵개발 계속
오바마 주도로 6자회담 할 필요
■ 한국전쟁의 성격
한국전쟁 정전 60돌 대담이라서 아무래도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커밍스 한국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이다. 근본적으로 나는 이 전쟁이 1950년 6월25일에 시작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식민시대 대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이 좌우로 나뉘고 두개의 분할정부가 나타나며 본격 전개되기 시작했다. 내전이므로, 어느 한쪽의 침략으로 시작됐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한국전쟁은 내전으로 시작돼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이 각각 남한과 북한 편을 들어 국제전으로 확산됐다.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한 나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와다 1948년에 한반도에 두개의 국가가 탄생했다. 그들은 통일국가를 만들기 원했다. 그 수단은 군사적인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그다음엔 남한이 통일을 위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러나 중국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식민 시기나 해방 후가 아니라, 분할정부 수립 이후 북한 주도로 시작된 두 정부 간의 내전이었다. 일반적인 내전처럼 정부와 혁명군 사이의 내전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냉전에 의해 매우 큰 영향을 받은 내전이지만 이후엔 동아시아 전쟁으로 확산됐다.
한국전쟁의 1단계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의 현상이었다. 나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든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커밍스 교수의 의견에 동의한다. 한국전쟁이 내전이라는 것은 중국의 상황과 같다. 1945년에 중국과 조선 모두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조선처럼 중국에도 이미 두개의 정부가 있었다. 그리고 소련과 미국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 내전에서 이 두 세력의 직접적 개입은 없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는 냉전의 두 축이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격돌했다. 한국전쟁처럼 외부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던 전쟁도 드물다.
나는 한국전쟁을 내전이나 국제전으로 보지 않는다.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발전했다고 보지도 않는다. 또 식민시대나 1945년 이후보다는 1948년 두 분단국가의 등장이 훨씬 중요했다고 본다. 전쟁의 기원과 원인, 결정 과정과 주체, 시작과 발발, 전개, 종결 과정과 전후 체제, 영향의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전쟁은 전형적인 세계시민전쟁이었다고 본다. 당시 한반도는 세계 진영 대결과 이념 대결이 응축된 소우주로서 제국 대 제국, 정부 대 정부, 시민 대 시민, 제국 대 민족, 정부 대 시민 등 여러 차원이 응축된 세계 갈등의 전방초소였다. 한국인들도 당시 세계 분단과 세계 이념과 세계 갈등을 가장 깊이 내화한 대표적인 세계시민들이었다.
왕후이
중, 동아시아 문제 해결 한계 있어
언론 논조, 북과 관계에 영향 줘
김정일-고이즈미 합의 등 뒤집혀
북한을 비난할 수만은 없어
박명림
지난 남·북·미 비핵화 합의 과정서
북, 주한미군 철수 주장 등
일거에 거둬들인 바 있어
끝까지 대화로 설득해 나가야
■ 북핵문제
마지막 주제는 핵문제이다. 한국전쟁 시기는 물론 정전 60년 동안 한반도는 늘 핵문제를 안고 있었다. 정전체제에 중첩된 최근의 북핵체제는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나는 북-미 관계 정상화와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없이 북핵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커밍스 나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정말 모든 핵무기를 다 내놓았다고 말한다 해도 뒤에서 한두개 숨겨 놓았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아마도 그들이 더는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지 못하도록 제한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 대안일 것이다. 미국과 남한이 당장 그렇게 하려 하지 않겠지만, 미국이 북한과 관계개선을 도모한다면 북한은 이 제안에 동의할 것이다. 미국 정부한테 지금 중요한 건 현재 상황을 상호 이해하고 인정하며 전쟁 발발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봄에 거의 전쟁 발발 직전까지 갔던 위기 상황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와다 북한은 재래식 무기로는 미국 및 남한과는 상대가 안 되기 때문에 핵무기를 가지려 한다. 따라서 안보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한의 핵개발을 막기는 힘들다. 그래서 ‘더 이상 실험을 하지 말라, 대화하자’고 하려면 미국이 문을 열고 6자회담을 시작해야 한다. 이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 만약 미국이 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더 많은 핵무기를 만들 것이다. 리비아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핵을 포기했고 그래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이런 전쟁을 겪은 뒤에 어떻게 북한한테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라고 할 수 있겠나. 북한은 부시 정부의 불량국가 명단에 있었다. 이는 북한이 적이라는 선언이었다. 적에게 어떻게 무기를 버리라고 할 수 있나. 힘의 역학 관계가 이렇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상대를 설득할 수 있겠나.
셋 모두 비관적이다. 그러나 나는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남한-북한-미국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합의를 두번이나 이룩한 바 있다. 6자회담에서도 두번이나 합의에 도달했다. 북한은 오랫동안 남북관계 개선의 ‘3대 선결 요건’이라고 주장해온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철폐를 일거에 거두어들인 바 있다. 일련의 회담에 직접 참여해 북한을 끝까지 설득해본 경험에 비추어, 나는 아직 희망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절실함과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 그리고 지혜와 전략이 아닌가 싶다. 하루빨리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수립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끝>
정리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I D: alfonsohan
·이 름: 한준구
·닉네임: 알폰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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