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소위 ‘자백 편지’ 최초 공개
1894년 동학 농민혁명 때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 학살에 앞장섰던 하급 장교가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 때도 핵심 구실을 한 주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드러났다.박맹수(58) 원광대 교수는 28일 일본군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1894년 18대대 1중대와 함께 충청도 금산, 전라도 용담·진안·고산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사실을 당시 일본군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 겸 육군 소장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1894년 12월26일치 편지를 <한겨레>에 처음
공개했다.
박 교수는 미야모토가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핵심 주범임을 보여주는 당시 일본군
헌병사령관의 전보도 함께 공개했다. 이 전보는 미야모토가 당시 현장에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는 목격담과 자백 내용을 담고 있다. 미야모토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그 사건 직후 기소됐다가 무죄 방면됐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박 교수는 당시 ‘토벌대’ 소속 병사가 일본군의 동학 농민군 학살 실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메이지
27년(1894년) 일청교전 종군일지’ 전문 사본 및 번역본도 공개했다. 종군일지는 지난 6월 일본에서 발간된 책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나카쓰카 아키라·이노우에 가쓰오·박맹수 공저)에 그 존재 사실과 일부 구절이 수록(<한겨레> 7월23일치
1·2면)됐지만, 작성자나 일지의 구성, 내용 전체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익산/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데라우치 육군소장 겸 운수통신장관에게 보낸 편지/박맹수 교수 제공.
<한겨레> 자료사진 |
1894년 동학 농민혁명 때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 학살에 앞장섰던
하급 장교가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 때도 핵심 구실을 한 주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드러났다.
박맹수(58) 원광대 교수는 28일 일본군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1894년 18대대 1중대와 함께 충청도 금산, 전라도 용담·진안·고산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사실을 당시 일본군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 겸 육군 소장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1894년 12월2일치 편지를 <한겨레>에 처음 공개했다.
일본 ‘동학 토벌대’의 만행 드러나
1894년 11월14일 경기도 하남
“달아나는 자 모두를 총살하고
부녀자 13명을 구금했다”
12월19일 경상도 김천, 23일 거창
“농민 10명 죽이고, 잔당 8명 총살”
1895년 1월7~14일 전라도 장흥
“통행하는 남자를 모두 잡아 고문
저항하면 옷에 불붙이고 시신 태워”
이와 함께 박 교수는 당시 ‘토벌대’ 소속 병사가 일본군의 동학 농민군 학살 실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메이지 27년(1894년) 일청교전 종군일지’ 전문 사본 및 번역본도 공개했다. 종군일지는 지난 6월 일본에서 발간된 책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나카쓰카 아키라·이노우에 가쓰오·박맹수 공저)에 그 존재 사실과 일부 구절이 수록(<한겨레>
7월23일치 1·2면)됐지만, 작성자나 일지의 구성, 내용 전체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쿠시마현 요시노가와 출신인 구스노키 비요키치는 1894년 7월23일 후비역(현역과
예비역을 마친 다음의 병역) 보병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제2분대 병사로 소집된다. 그해 10월28일 일본군 대본영은 그의 부대를 ‘동학당
토벌대’로 명했고, 부대는 11월6일 인천에 상륙한다. 이틀 뒤 서울 용산 만리창에 집결한 토벌대는 11일 동로·중로·서로 ‘3로’로 나뉘어
진압에 나선다.
구스노키는 소집 당일부터 1895년 12월9일 귀국 뒤 부대 해체 때까지 일지를 계속
썼다. 길이 923㎝, 폭 34㎝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문서는, 구스노키의 일지 메모를 그의 친척 구스노키 마사하루가 동학 학살이 끝난 지
3~4년 뒤 정서한 것이다.
일지 속 일본군 토벌 경로를 보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군대 해산에 분노한
동학봉기(제2차 봉기)가 전라도만이 아닌 전국적 봉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학살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에서도 자행됐다.
먼저 광주와 장호원 등 경기도 일대를 훑어가던 구스노키 등이 처음 학살을 자행한 곳은
곤지암. 11월14일 동학 접주 김기룡을 체포한 토벌대는 그를 이천 병참부로 압송한 뒤 그날 저녁에 총살하고 “집집마다 수색해 달아나는 자들을
모두 총살”했으며, 부녀자 13명을 구금했다. 17일에는 가흥 북쪽 동막읍에서 민가를 불태우고 농민 18명을 죽이고, 접주 이경원을 체포해
총살했다.
충청도로 이동한 부대는 21일 청풍 인근 동학 접주 집과 40리 떨어진 성내동의 모든
민가를 불태웠다. 22일 제천 접주 한 명을 체포해 총살했고, 그다음 날 청풍현 민가 수십 채를 불태웠다. 12월13일 충주 인근에서 동학
접주를 체포해 총살했고 16일엔 경상도 상주목사의 서기관 박용래를 체포해서 고문한 끝에 관직을 박탈한 뒤 추방했다. 18일 개령의 관리들
수십명을 동학교도라는 이유로 모두 총살했다. 19일 김천에서 농민 10명을 죽이고, 23일엔 거창 촌락을 수색해 8명을 체포해서 총살했다.
26일 전라도 남원에서 농가들을 불태웠다. 30일엔 남원 일대 절과 민가들을 불태웠다.
31일 곡성에서 농가 수십호를 불태웠고 그날 밤 농민군 10명을 체포해 조선 사람들에게 그들을 소살(불태워 죽임)하도록 했다.
1895년 1월2일 옥과에서 농민군 5명을 고문한 뒤 총살하고 시신은 불태웠다. 4일엔
능주에서 농민군 70~80명을 체포, 고문하고 20명 정도를 총살했다. 5일, 능주에서 또 농민군 수백명을 체포해 수십명을 총살했다.
1월11일 장흥 일대 통행자를 모조리 붙잡아 고문했고, 저항자는 옷에 불을 붙여
달아나면 총을 쏘아 죽였다. “그 광경을 보고 모두 웃었다.” 죽청동 인근에선 12살 아이를 꾀어 동학군을 지목하게 한 다음 16명을 고문하고
8명을 총살해 시신은 불태웠다. 죽천 장터에서도 18명을 죽였다. 대흥면 쪽으로 가다 11명의 농민을 붙잡아 죽였고, 3명은 옷에 불을 붙여
바다 쪽에 빠져죽게 만들었다. 13일 대흥면 산에서 농민군 수십명을 잡아 죽였다.
2월4일, “(나주부) 남문에서 4정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산이 있었고, 그곳에는
사람의 시신이 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번 장흥부 전투(1895년 1월8~10일) 이후 수색을 강화하자 숨을 곳 찾기가 어려워진 농민군이
민보군 또는 일본군에 포획당해, 책문(고문) 뒤 죽은 중죄인이 매일 12명 이상으로 103명을 넘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버려진 시신이 680구에
달하여 땅은 죽은 사람들의 기름이 하얀 은(백은)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의 편지
이 편지에는, 그해 10월30일 경성(서울) 수비대로 파병된 제18대대가 파병 목적과는
달리 농민군 학살에 나선 사실이 적시돼 있다. 미야모토 소위는 1895년 1월 전라도 장흥과 해남, 진도 등에서도 학살을 자행했다.
제18대대는 그해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에도 깊숙이 개입했으며, 미야모토는 시해의
주범 중 한 사람이었다. 일본 방위성이 소장한, 1895년 11월22일 하루타 헌병사령관이 고다마 육군차관에게 보낸 전보(나카쓰카 교수 발굴)에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익산/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日, 동학 개입 없었다면 조선 근대화 달라졌을 것”
‘일지’ 전문 공개한 박맹수 교수
일본 학자들과 18년간 자료 탐구
“동학, 단순 지역농민 봉기 아닌
동아시아 3국을 뒤흔든 대사건”
1995년 홋카이도대에 방치돼 있던 동학 농민혁명 당시 진도지역 희생자들 유골이 발견되자 이노우에 교수 등은 한국 동학
관계자들에게 유골봉환과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전국동학농민혁명기념회 학술간사이던 박맹수 당시 영산원불교대 교수가 파트너가 됐다. 그 인연으로 박
교수는 1997년부터 4년간 홋카이도대에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중심으로 근대 한-일 관계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고 교토대에서도 1년간
동학사상을 연구했다.
박맹수 교수 |
“동학, 단순 지역농민 봉기 아닌
동아시아 3국을 뒤흔든 대사건”
“동학 농민혁명을 1894년 1월의 고부 농민봉기에서 시작돼 1895년 3월 전봉준의
처형으로 종결된 단조로운 사건으로 봐선 안 됩니다. 19세기 전 시기에 걸쳐 준비·전개된 일대 사건으로, 조선왕조 500년의 종결을 예고하는
동시에 동아시아 3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어요. 그런데도 일본은 이를 고부나 전라도 일원의 지역사건으로 축소하려 했고 해방 뒤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학자들도 제대로 연구·평가하지 못하고 있어요.”
박맹수(58) 원광대 교수는 일본이 동학 농민혁명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조선 근대화의
도정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그랬다면 일본도 조선 식민지 수탈을 토대로 한 제국주의적 팽창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중국 근대사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학 주도세력들이 나름의 독자적인 근대화 비전이나 이상을 머리에 그릴 만큼 준비가 돼 있었고 국제 정세에도 밝았다는 증거들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보수 주류세력은 근대 일본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 결국 패망한 게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또는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우익 군부의 파시즘적 일탈 때문이라 합니다. 그 전까지 일본, 특히 메이지 시절 일본은 국제법을
준수하며 근대화를 이룩한 정상적인 국가라는 거죠. 거짓말입니다. 이미 메이지 시절부터 일본은 무도하게 이웃을 침략하고 수탈해 제국주의적 팽창의
토대를 쌓았어요. 동학 농민혁명 압살이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축소·은폐하려 했고 공식 기록에서도 관련 사실들을 삭제해버렸어요.
구스노키 진중일지는 이를 뒤집는 결정적 자료입니다.”
나카쓰카 아키라(84)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이노우에 가쓰오(68)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와 그의 동학 농민혁명 공동연구는 18년 전 시작됐다.
익산/글·사진 한승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