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이 지난 7월 21일 참의원 선거 승리 이후 ‘평화헌법’ 개정을 위한 로드맵을 본격 가동하고 있다. 국내외 여론상 당장은 평화헌법 9조 개정이 어렵지만, 집단적 자위권 행사→헌법
96조 개정→헌법 9조 개정 등 단계적 절차를 통해 장기적으로 개헌을 완수한다는 목표다. 최근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의 ‘독일 나치식
개헌’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아소 부총리가 1일 관련 발언을 취소하긴 했지만 ‘혼네(本音·속내)’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신(新)군국주의’ 부활과 맞닿는다는 평이다. 아베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시 일제의 침략전쟁 사실마저도 부인하는 상황에서
한국·중국 등 주변국은 강력 반발할 수밖에 없다. 한·중·일 3국 협력은 물론 전통적인 한·미·일 3각 공조마저도 일본의 ‘우경화’ 행보에
휘청거릴 정도다. 동북아에서 일본의 ‘고립’ 자초는 장기적으로 동북아 정세의 지각변동에도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1.평화헌법 제정 배경과 내용일본의 현행 헌법은 세계 2차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뒤 1946년 연합군 점령하에
미국에 의해 제정됐다.
군국주의와 절대군주제를 표방하며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을 뒷받침했던
‘대일본제국헌법’을 자유민주주의를 골자로 한 ‘일본국헌법’으로 변경한 것이다.
이 가운데 일본의 군사력 및 교전권을 포기토록 한
헌법 제9조 ‘전쟁의 방기’ 조항이 바로 ‘평화헌법(平和憲法)’이라고 불린다. 일본의 전쟁도발과 무력행사를 영구히 방기하기 위해 육·해·공군 등
전력을 보유하지 못하며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 군사력 증강의 걸림돌인 이 제9조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개헌조건부터 고쳐야 하는데 이 조항이 바로 제96조다. 즉, 헌법 제96조를 수정하는 1차 개헌을 한 뒤, 헌법 제9조를 고치는 2차 개헌을
손쉽게 진행하려는 것이 일본의 계획이다.
2. 왜 개정하려고 하나명분은 ‘보통국가’화다. 일본
보수세력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60여 년이 지난 만큼 이제 일본도 다른 정상국가와 마찬가지로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보통국가론’이다.
전후 일본 대외전략을 결정했던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에
전념한다’는 ‘요시다 독트린’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1990년대 탈냉전 이후
국제안보환경 변화와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등을 계기로 힘을 얻었다. 자위대의 해외파병 등
‘국제공헌론’도 제기되면서 종래의 헌법 해석과 입법을 통한 대처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3. 평화헌법 개정에 필요한
절차평화헌법을 개정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뭘까. 우선 중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에서 각각 헌법심
사회를 구성하여 헌법 개정 원안(原案)을 발의해야 한다.
이때 중의원 의원 100명 이상, 참의원
의원 50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후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가결되면 대국민발의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전체 의회의 3분의 2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이후 국민투표에서도 과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에 따라 아베 정권에서는 이 까다로운 개헌조항이 명시된 ‘의회 3분의
2의 동의’ 부분을 ‘과반 동의’로 바꾸려는 작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4. 아소 ‘나치式 개헌’ 주장
배경7월 29일 아소 부총리가 도쿄(東京)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서 “독일 나치정권이 바이마르헌법을 아무도 모르게 바꿨듯이,
일본도 그 수법을
배우면 어떤가”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파문이 일고 있다.
일본헌법 개정이 그만큼 까다롭고 반대가
많기 때문에 나치식 추진밖에 방법이 없다는 점을 얘기한 것이기도 하다. 앞서 발표된 마이니치(每日)신문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20%만이 헌법
제9조 개헌에 찬성했다. 또한 일본의 개헌논의가 나올 때마다 한국과 중국 정부가 반발하자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은밀히 하는 게 좋다는 계산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대표적 개헌론자는 누구자민당 소속의 아베 총리와 아소 부총리 외에도,
대표적인 개헌론자로는 극우정당으로 꼽히는 일본유신회의 두 공동대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와 하시모토 도루(橋下徹)가 있다. 특히 이시하라
대표는 평화헌법의 파기를 주장할 만큼 강경한 개헌론자로 유명하다.
다함께당의 와타나베 요시미(渡邊喜美) 대표도 “(개헌은)
전시체제를 찬양하는 세력과는 다르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오히려 자민당보다 개헌을 더욱 서두르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야당인
민주당에도 개헌주의자들이 있다. 2005년 민주당을 이끌었던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전 대표는 대표적인 개헌론자다. 또한 민주당 차세대
리더로 꼽혔던 호소노 고시(細野豪志) 전 간사장도 “옆에 있는 미군이 공격받으면 당연히 자위대는 (응전)해야 한다”고 말해 개헌의 목표인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6. 대표적 호헌론자는식민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의 주인공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는 대표적 호헌론자이다.
민당과 연립정당을 꾸리고 있는 공명당은 호헌파의
목소리가 강하다. 공명당은 평화주의를 표방하며 군대보유와 교전권 금지를 규정한 9조 개정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으로
환경권 등을 헌법에 추가하는 ‘가헌(加憲)’엔 찬성하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도 대표적인
호헌론자다.
그는 지난 2005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가장 두려운 점은 일본의 헌법이 바뀌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전쟁 포기선언이 명시된
평화헌법의 제9조를 수호하기 위해 ‘9조
모임’이라는 시민
단체를 이끌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도 “생각이 부족한 인간은
헌법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고 얘기하는 호헌론자다.
최근 한국국적으로 세이가쿠인(聖學院)대의 학장이 된 강상중 교수 또한
일본의 개헌이 일본의 정치와 국가체제, 사회의 존재방식 등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며 헌법의 수호를 주장하고 있다.
지난 5월 지식인
호헌모임인 ‘96조 모임’을 결성한 히구치 요이치(桶口陽一) 도쿄대 명예교수도 호헌여론을 이끌고 있다.
7. 아베의 평화헌법
개정 로드맵아베 총리는 일단 단기적으로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1차적으로 2014년
말까지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
라인) 개정 문제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침 개정을 통한 미·일 간 역할 분담 구체화가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 범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
안전보장의 법적 기반 재구축에 관한 간담회’를 재가동해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헌법 해석 변경을 시도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재 자민당 및 연립정당의 참의원 의석이 143석으로, 개헌 발의를 위한 3분의 2 의석(162석)에는 모자라기
때문이다.
미·일 지침 개정→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 및 ‘국가안전보장기본법’ 제정→헌법 96조의 의결 정족수 변경→헌법 9조
개정을 통한 군대 공식 보유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두승 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아베 정권은 올해 말 책정되는 새로운
방위대강부터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 문제에 관한 구체적인 정책 방침을 포함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8. 개정되면 뭐가
달라지나당장은 일본 자민당과 연립정당의 좌석수를 감안하면 헌법개정이 쉽지 않지만, 그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헌법 96조가 개정되면 현재 중·참의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한데, 정족수가 과반으로 변경된다. 헌법 개정이 훨씬
손쉬워지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베 내각이 헌법 9조까지 개정하면 9조 명칭은 ‘전쟁포기’에서 ‘안전보장’으로 바뀌고, 9조
1항의 ‘전력 비보유’ 대신 ‘자위권 보유’가 삽입될 것으로 보인다.
자위군 명칭도 아예 ‘국방군’으로 명기하겠다는 게 자민당
방침이다. 2차대전 전범 국가가 과거사 반성도 없이 또다시 대규모 군대를 공식 보유하겠다는 것으로, 일본이 전후에 세운 전수방위 개념과
비핵3원칙(핵 보유·제조·반입 금지) 등이 무너지면서 무제한적 국방력
강화가 가능해지고, 이를 통한 일본의 선제공격이나 핵보유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9. 과거사 왜곡 등과의 관련성평화헌법 개정 시도는 전반적인 일본 내 ‘우경화’ 흐름과도 떼려야
뗄 수 없다.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초·중·고교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데 이어, 아베 내각은 교과서에 한·중 등 아시아
국가에 대한 배려 의무를 담은 ‘근린제국(近隣諸國) 조항’ 철폐도 공약한 상태다.
올해 일본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호칭)의
날’ 행사에 정부 각료가 처음 참석했고, 아소 부총리는 4월 야스쿠니(靖國) 신사 춘계 예대제(例大祭·제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이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는 2년째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河野) 담화와 무라야마(村山) 담화를 부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 일본은 중국과도
중·일 간 분쟁지역인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국유화 단행 이후 최악의 관계다.
10. 한·일, 중·일 관계
영향은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개헌마저 시도하면 ‘레드라인(금지선)’을 더 훌쩍 넘어서는 것이 된다. 주변국 신뢰를 전혀 얻지
못한 상태에서 군사력 강화는 ‘군국주의’ 부활 우려를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對)한·대중 관계도 악화일로를 걸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일본이 과거사·영토 도발을 이어가면서 ‘군대 보유’를 통한 ‘보통국가화’를 이룬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외적 팽창주의에 나서게 되면
동북아 정세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반격이나 센카쿠에서 중·일 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일각에서는 일제의 한반도 첫 번째 강점지였던 독도 역시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중·일 3국 협력은 파탄나고, 한·미·일 3국 공조 결렬도 예상된다. 다만, 일본의 개헌 시도가 당장 임박한 것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견해다.
이원덕(국제학) 국민대 교수는 “아베 내각에 가장 큰 문제는 경제이고, 내년부터 2∼3%
올리기로 한 소비세 증세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개헌에
신경 쓸 여력이 많지 않다”면서 “지금 당장 일본의 개헌 가능성은 현실성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고
말했다.
신보영·김다영 기자 boyoung22@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