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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사쿠데타의 숨은 주역-^^황용주-筆禍-비참한 末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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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264회 작성일 2013-08-1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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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의 숨은 주역' 황용주 평전 낸 안경환 교수
 
나라의 미래 고뇌했던 지식인에 글로나마 작은 무덤 세워주고 싶었다.
 
 
 
 
입력시간 : 2013.04.26 21:04:27
수정시간 : 2013.04.26 2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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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년 8월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까치 제공

■ 평전 쓰게 된 계기는

격동기 열정적 삶 마음에 와 닿아
혁명가의 비참한 말년 안타까워
'학병세대'의 지적 자양분 재조명

■ 5·16은 민족주의 혁명?
헌정 질서 파괴한 쿠데타이지만
산업화로 대한민국 역사에 기여
시시비비 따지는 건 내 몫이 아니다

■ 새 정치의 핵심은 무엇인가
앞으로 나라 이끌어 갈 청년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 열어야
진보개혁이 목소리 낼 수 있을 것


1962년 8월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수영복에 셔츠만 걸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막 달려온 아들 지만에게 눈을 돌린 사이, 동석자가 미소를 띤 채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박 의장의 대구사범 동기인 황용주 당시 부산일보 사장이다. 그는 박 의장 측근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이 사진을 신문에 실었다.
 
 
 
<라이프>지에 실려 화제가 됐던 미국 케네디 대통령 부자의 수영복 차림 사진을 거론하며 "지도자는 모름지기 국민에게 친근감을 줘야 한다"고 설파했지만,
 
 
그렇잖아도 그를 고깝게 여기던 측근들에겐 어쭙잖은 과시욕으로 비쳤다. MBC 사장에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64년 야당과 측근들의 협공 속에 <세대>지 필화 사건(반공법 위반 구속)에 휘말려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죽는 날까지 박정희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다. "아 정희야! 아 란서야!" 여든 셋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끔찍하게 사랑했던 친구와 외동딸의 이름이었다.
 
 
 


5ㆍ16 쿠데타의 숨은 주역이었던 황용주(1918~2001) 평전이 나왔다. <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까치 발행). 저자는 안경환(65)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다. 2009년 이명박 정부와의 갈등 끝에 국가인권위원장에서 물러났고,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캠프의 새정치위원장을 맡았던 전력에 비춰보면 다소 뜻밖이다. 책은 고인이 남긴 40여권의 일기와 생전 인터뷰 등을 토대로 "민족주의 혁명을 꿈꾼 지식인"의 육성을 '충실히' 전한다.
 
 
 
서문에서 "역사관이든 이념이든 어디까지나 필자의 눈에 비친 그의 이야기일 뿐, 필자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다"고 강조했지만, 이래저래 논란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안 교수는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고뇌했던 고인과 그 세대의 열정과 좌절, 환희와 분노가 성공한 대한민국 역사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고인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동향(경남 밀양)이라 집안끼리 아는데, 돌아가신 부친과 그분 사이에 악연이 좀 있었어요. 정치적 노선이나 개인적인 관계에서…. 제 딴에는 불편한 과거를 털고 가고 싶어 87년 미국에서 돌아와 서울대에 부임한 뒤 찾아갔어요. 명절 때 인사 가서 바둑도 두고 프랑스에 사는 따님이 오면 같이 식사도 하고 1년에 서너 번쯤 만났죠. 나중에 일기를 보니 저를 굉장히 신뢰하고, 제 부친한테 이런 아들을 남겨주어서 고맙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책을 보면 고인을 직접 인터뷰 한 내용이 없던데.

그땐 평전 쓸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민감한 과거사를 굳이 묻지 않았죠. 그분이 부산일보 주필 시절 쓴 글들을 어려서부터 보고 자랐고 또 김윤식 교수의 연구를 접하며 '학병세대'에 관심이 많았어요. 주로 그 시절에 대해 묻고 배웠어요.

평전을 쓰게 된 계기는 뭔가요?

그분이 타계한 뒤 유족이 마땅히 둘 데가 없다며 일기장을 맡겼어요. 부인 말로는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는데, 해방 이후부터 필화 사건 때까지 결정적 시기의 기록이 없었어요. 수사기관에서 가져간 게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뒤집을 만한 내용은 딱히 없었지만, 격동기를 산 지식인의 열정적 삶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2009년 인권위원장 그만두면서 본격적으로 준비했죠. 말년을 외롭고 궁핍하게 살다 끝내 죽은 육신 누일 곳조차 없이 떠난 삶이 안타까워 글로나마 작은 무덤을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부인과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나 딸과의 애틋한 추억까지 세세하게 담았죠.

서문에 "글을 쓰는 동안 나의 세대의 무지와 후속세대의 경박한 오만에 절망하곤 했다"고 썼던데.

일제 때 고등교육을 받은 '학병세대'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어요. 황용주가 일본 유학 시절 일본어로 쓴 일기만 봐도 문장 구사나 그 안에 담긴 생각의 깊이, 넓이가 대단해요. 그런데 4ㆍ19세대와 그 영향 아래 있던 우리 세대는 그 훌륭한 지적 자양분을 모두 일제의 잔재로 몰아 버렸죠. 요즘 젊은이들한테서도 종종 그런 걸 느껴요. 지적 뿌리가 얕은 사람들이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면서 자기들만 최고, 남들은 다 틀렸다고 하고…. 젊은 세대의 주장이나 정서에 대체로 동의하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그런 점은 많이 아쉽죠.

학병세대의 울분에는 공감하지만, 황용주가 학도병 출신 장교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밝히는 대목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연결돼 논란을 부를 듯한데.

불편할 수 있죠. 역사란 결국 선택적 기억, 선택적 기록이잖아요. 책에 보면 황용주가 난징에서 일본군 소장의 '대동아공영권' 훈시에 손 번쩍 들고 반론을 제기하잖아요. 소장은 배포 있게 넘어가줬고. 그러면서 일본군 장교에 호의적인 생각이 자리잡았고, 훗날 박정희에 대해서도 "일본 사관학교를 다녀 그릇이 크다"고 말하곤 했죠. 생각의 궤적을 좇는데 중요한 부분이니 다뤘을 뿐, 제가 뭐라 평가할 입장은 아닙니다. 이러면 친일파를 옹호했다고 욕 먹을라나…. 이제 그런 데서 좀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둘러싼 역사 논쟁이 새 정부 출범 이후 더 격화했는데.

이 정부를 박정희 시대의 연장으로 보니까 갈등이 더 심한 거죠. 대선 때도 말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을 무조건 박정희와 연결시켜 반대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어요. 우리가 다른 식의 연좌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까? 그건 넘어서야죠. 공과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옹호하는 쪽이나 비난하는 쪽이나 모두 문제예요. 정권이 바뀌고 세대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ㆍ16을 쿠데타 대신 그들이 말한 '민족주의 혁명'으로 기술하고, 주로 주도세력 측에서 발간한 자료를 재구성해 자칫 쿠데타를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거듭 말하지만 이건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눈에 비친 '그'의 이야기입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건 제 몫이 아니에요. 황용주와 박정희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쿠데타를 모의했고, 왜 민족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는지 들여다 보자는 거예요. 황용주는 서구식 민주주의로는 한국이 절대 후진성을 벗을 수 없고, 당시 혁명을 이끌 주체는 군밖에 없다고 봤어요. 군사쿠데타는 수단인 셈이고, 산업화ㆍ근대화를 이룩하고, 궁극적으로 남북한 불가침 조약 체결과 유엔 동시가입, 남북간 격차 해소를 통해 통일에 이른다는 로드맵을 갖고 있었죠. 그는 이런 생각을 4ㆍ19 이전부터 신문 사설을 통해 꾸준히 개진했고, 60년 1월 박정희가 부산 군수사령관으로 온 뒤 끊임없이 주입을 했어요. 그래서 황용주는 혁명론에 관한 한 자신이 본체이고 박정희가 분신이라고 여겼어요.
 
 


5ㆍ16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요?
 


그 행위 자체는 헌정 질서를 파괴한 명백한 쿠데타죠. 다만 그 이후 이뤄진 산업화 역시 오늘의 대한민국 역사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거예요. 책에도, 예전 칼럼에도 썼지만 4ㆍ19와 5ㆍ16은 '2인3각'으로 봐야 해요. 김병익 선생의 말을 빌린 건데, 애초에는 상반된 이념이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거죠. 민주화의 상징으로서 4ㆍ19, 산업화의 상징으로서 5ㆍ16 어느 한 쪽도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지 않나요?

민주화와 산업화를 모두 긍정하는 발전적 미래를 모색하자면, 5ㆍ16의 또 다른 결과물인 유신 체제에 대한 혹독한 비판과 극복이 전제돼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죠.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산업화를 긍정하자는 주장을 했다가 박정희 시대의 직접적 피해자인 분들께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어요. 따지고 보면 저도 피해자죠. 제 부친이 5ㆍ16 이후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그 유산을 제가 고스란히 받아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인 피해와 시대적인 역할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정치권엔 발 들이지 않겠다는 원칙을 깨고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막겠다고 나섰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구체제의 상징이라고 봤기 때문이죠. 이제 미래세대를 보자는 거예요. 민주당에 가서도 과거사에 매달려서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고 얘기했죠. 안타깝게도 전혀 먹혀 들지 않았죠.

곁가지이긴 한데, 박근혜 캠프에서도 러브콜을 받았죠?

저도 모르는 사이 국민대통합위원장 물망에 올랐죠. 영화를 보느라 휴대폰을 꺼 놓고 있었는데, 나와 보니 이미 보도가 났더라고요. 그쪽 사람이 전화해 "기사도 났는데 (박 후보를) 한번 만나 보시죠" 하길래, "유부남이 왜 처녀를 만납니까"하고 농으로 받았어요.(웃음) 갈 마음도 전혀 없이 만나는 게 오히려 실례라고 보고 그렇게 거절한 거죠.

정치 참여를 통해 이루려 했던 '새 정치'의 핵심이 뭔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청년들의 정치 참여를 일상화하는 거예요. 수적으로 열세인 야권이나 진보개혁 세력이 집권하는 길이 단일화 같은 '이벤트'밖에 없는 이런 낡은 정치구조에서는 젊은이들은 정치에 대해 냉소적일 수밖에 없어요. 여당 정치는 앞뒤 안 돌아보고 저 혼자 출세하고 적당히 타락한 뒤에 하는 것, 야당 정치는 엄청난 투사이거나 정치건달이나 하는 것 정도로 여기죠. 정치 하면 다들 여의도만 바라보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정치 참여를 백안시해 억압하는 분위기예요. 이래서는 희망이 없잖아요.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가야 할 청년들이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해요. 기득권층에 기반한 체제가 견고한 새누리당보다는 야권이 그런 개혁에 나서야 합니다.

안철수씨가 국회에 입성하긴 했지만, '새 정치' 주장은 바람 빠진 풍선 느낌인데.

좀더 두고 봐야겠죠. '안철수 현상'이란 것도 막연한 기대였지, 구체적인 정책을 놓고 토론하고 참여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한 것은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이 환상의 형태로나마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거예요. 정당이 이 열망을 흡수해 환상을 희망으로 바꿔야죠.

여전히 지리멸렬한 민주당의 현실을 보면 안타까움이 크겠어요.

노 코멘트. 이미 정치를 떠난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 있겠어요?

대선 이후 한 인터뷰에서 "문재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애틋함 때문에 잠시 함께 꿈을 꿨다"고 하셨던데, 요즘은 지나치게 유약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글쎄요. 그 분을 훌륭하게 보는 것이 적어도 룰을 지키며 살자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치사한 승리자가 되기보다 당당한 패배자가 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당선이 안 됐는지도 모르죠.(웃음) 하지만 그 몇 달 만에 그 정도의 성과를 낸 건 대단하다고 봐요. 상황이 닥치면 해내겠죠. 지금 당장 뭘 할 수 있겠어요? 당에서 무슨 역할을 줬습니까? 권한이 있습니까? 뭐가 유약하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지난 2월 인권위원장 시절 비망록 <좌우지간 인권이다>를 내면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민 누님, 국민 어머니가 되시길 빈다"고 하셨는데, 지난 2개월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아직 뭐라 하기엔 너무 이르죠. 제발 잘 하기를 바란다는 말밖에는.

인권위원장에서 물러나면서 "정권은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는 말을 남기셨는데, 정부가 바뀌고도 인권위의 사정이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권위가 제 역할을 하려면 먼저 정부, 대통령이 독립기관으로 인정하고 쓴소리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해요. 다음은 인권위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업무에 충실해야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국민의 뒷받침이죠.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엔 적어도 첫째, 둘째 부문에선 상당한 성과가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선 셋 다 무너진 거죠. 이명박 정부는 인권위를 없애려 했다가 반발에 부딪치자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려고 했고 결국 기구를 축소해버렸잖아요. 박근혜 정부에선 적어도 그런 움직임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죠. 인권위 얘기는 이제 그만하려고 해요. 전임자가 자꾸 뭐라 하는 게 도리도 아니고.

<좌우지간 인권이다>에서 "지식인의 원색은 회색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라고 쓴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회색인' 하면 어느 시대나 환영 받지 못했는데.

흑백으로 나눠 보면 그럴 수 있지만, 통합이란 관점에서 보면 달라지죠. 지금은 통합, 융합의 시대라고 하잖아요. 균형감각을 갖고 이쪽 저쪽을 잘 섞고 궁극적으로는 융합의 단계로까지 끌어올리는 것, 그게 지식인의 역할 아닌가요?

누구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라고 하고, 누구는 진보 성향이라고 하는데, 어느 쪽이에요?

몰라요. 보수가 뭔지, 진보가 뭔지 개념 규정도 분명치 않잖아요. 누구는 이슈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기회주의자라고도 하던데.(웃음) 나름대로 일관된 원칙은 있죠. 모든 정권에 대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는 것! 잘한 거야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달리 말하면 강자에는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약자는 보듬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죠.

황용주 평전에서 독일 격언을 인용해 법학을 '빵 굽는 학문'이라고 했던데, 애초에 법대 갈 때 밥벌이를 염두에 두신 건가요?

꿈은 꾸되 두 발은 땅에 굳건히 붙이고 살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저희 집안이 다들 인문학 해서 망했거든요.(웃음) 사법시험에 대한 집착은 없었어요. 붙기도 어렵고, 한 번 봤다가 안 돼서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갔죠. 베트남전에 파병될 줄 알았어요. 그때는 어찌나 말랐는지, 죽마고우가 베트콩에 붙잡히면 얼른 웃통을 벗어라, 그럼 아군인 줄 알고 살려줄 거다, 그랬어요.(웃음) 결국 파병은 못 갔어요.

8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데, 교육자로서 삶을 돌아본다면?

강의나 연구뿐 아니라 대학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푸는 데 나름대로 애썼어요. 법대 학장 시절 처음으로 여교수를 채용했어요. 결국 떨어졌지만 총장 선거에 나갔던 것도 서울대를 바꾸고, 그걸 통해 한국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에요.

퇴임 후 계획은 세웠나요?

교수직은 끝났지만 작가로서는 할 일이 아주 많죠. 학병세대 소설가 이병주 평전도 쓸 거고, '법과 문학' 분야에서도 더 쓰고 싶은 주제들이 아주 많아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번역도 하고 있어요.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보면 글을 쓰게 하는 욕구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는 이기심부터 몇 가지를 꼽잖아요. 마지막이 세상을 바꾸려는 정치적인 욕구예요. 세상에 대한 분노나 실망, 아쉬움이 남아 있는 한 글쓰기는 멈출 수 없죠. 우리 세대가 가진 한계, 후속세대에 대한 아쉬움,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별 것 아닌 경험과 생각이나마 부지런히 풀어놓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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