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베트남 개혁-^^도이모이-북한에 주자?-김상봉 교수! > 자유

교류 차원에서 보자면, 베트남과 한국은 이미 ‘친구’다. 베트남한테 한국은 4번째로 큰 수출시장이자, 2번째로 큰 수입국이다. 지금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 가운데 베트남 출신은 한국계 중국인에 이어 2번째로 숫자가 많다. 말 그대로 두 나라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 하지만 이제까지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베트남은 ‘기울어진 친구’다. 한국에 비해 경제적으로 뒤처진 나라, 베트남전쟁 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긴 나라, 자본주의를 따라잡으려 애쓰면서도 사회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는 나라. 하지만 베트남은 한국과 달리 자기 힘으로 독립과 통일을 이뤘고, 동구사회주의국가들이 몰락하기 훨씬 이전부터 개혁개방정책을 펼쳐 세계체제의 변화에 적응을 꾀했다. 지금도 한켠에선 사회주의가 진화 중이다. 한국이 베트남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국제 세미나 참석차 한국을 찾은 팜반득 베트남 사회과학한림원 철학원 원장과, 그와 오랫동안 교분을 맺어온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과)가 22일 한겨레신문사 6층 회의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팜반득 원장은 1961년 베트남 북부 하이퐁에서 태어났다. 하노이 종합대학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트남의 통치이념과 사회철학 이론을 전담하는 최고 싱크탱크인 사회과학 한림원 철학원장을 맡고 있으며, 공산당 중앙이론협의회 위원이다. 베트남 공산당의 핵심 이론가로 꼽히는 팜반득 원장은 2008년, 2013년 각각 10차·11차 공산당 당대회 문건을 작성하기도 했다. 　 김상봉 교수는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석사를 마친 뒤 독일 마인츠대학교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재벌 등 한국사회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 주목받는 인문학자이며, <서로주체성의 이념><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도덕교육의 파시즘>등을 펴냈다. 현재 ‘학벌없는사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김상봉(이하 김)당신은 베트남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최고 이론가로 꼽힌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1986년 개혁개방정책(도이머이) 이후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적극 수용해왔고 세계화 체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유효한가?

팜반득(이하 득) 베트남의 전통은 유연하고 실용적인 사고다. 만약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이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이를 과감히 버릴 준비가 돼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여전히 베트남을 발전시키는 세계관이자 방법론으로 기여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베트남 민족을 단결시켜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줬다.

경제 기초를 닦는 데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인민이 사회발전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은, ‘국가가 배라면 인민은 물과 같아서 물이 움직이면 배가 뒤집힌다’는 베트남인들의 전통적 정치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비록 도이머이 이후 비중이 줄긴 했으나 여전히 대학 학부·석사과정 등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교육은 의무화돼 있다. 여기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공산당 역사, 호찌민사상 등이 포함된다.

김 한국 같은 자본주의 국가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필요하다고 보나?

득 그렇다. 우리도 자본주의 원리에서 배우는 점이 있다. 한국도 사회발전을 위해 사회주의 원리를 배우고 일부를 수용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지만 이런 걸 배우는 건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나라마다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수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김 한국은 과거에 중국보다도 더 교조적으로 유학을 해석하고 교육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함해 외부에서 철학을 받아들일 때 더 유연한 것 같다.

득 맞다. 베트남인들은 해당 철학이 우리 사회에 이익이 되는가를 중시한다. 베트남은 한무제 공격을 받은 이래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다가 938년에야 독립왕조를 세웠다. 그 기간 동안 중국한테서 유학을 받아들일 기회가 많았지만 우리는 중국의 압제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유학을 받아들였다. 또 베트남에선 도교·유교·불교가 공존했는데 이를 ‘삼교동원’이라고 한다. 이는 베트남인 특유의 ‘관용 사상’과도 이어진다.

김 관용 사상 때문에 갈라진 남-북 베트남이 전쟁 이후에도 결국 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건가?

득 베트남은 1976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을 이룬 뒤 관용 사상으로 나라를 통합하고자 했다. 남베트남의 관료들은 3년간 재교육을 받고 다시 공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북베트남에선 다른 사회주의국가들과 달리 기독교도들을 탄압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중요한 것은 단결이었다. 호찌민은 “단결, 단결, 대단결해야 성공, 성공, 대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마오쩌둥은 계급투쟁과 혁명을 강조했지만 우리는 그처럼 단결과 통합을 중요시한 덕에 문화혁명 같은 걸 겪지 않았다. 비록 통일 이후 남베트남의 일부 인사들이 저항을 했고 일부는 미국 등으로 건너갔지만 1986년 도이머이 이후 상당수가 베트남으로 돌아와 정착하거나 투자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김 북한 얘기를 해보자. 득 원장은 한국을 10차례 이상 방문했고 한국 친구들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북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호찌민사상과 주체철학은 어떻게 다른가? 또 남한과 북한을 비교하자면?

득 지난해 4월 북한 사회과학원 초대로 열흘간 북한에 머물며 그곳 학자들과 주체철학에 대해 논의했다. 주체철학도 호찌민사상처럼 마르크스철학에서 출발했고 인민의 역할을 강조했다.

고 김일성 주석은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이론적 측면에선 문제가 없지만 사회 운영에 이를 제대로 적용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가 용이하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토론이 얼마나 활발한지는 알 수 없다.

남한은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역동적이고 개방적 토론을 한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것은 분명히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나 합리적인 컨센서스를 이룰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한은 베트남의 관용 정신을 배우는 게 매우 중요할 것 같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인에게 보복하지 않았듯, 남한도 베트남의 관용 정신으로 북한을 대하는 게 필요하다.

김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베트남인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고 많은 한국인들이 여기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마무리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득 나는 아버지한테서 민간인 학살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이에 대해 사과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그마저도 안 하지 않았나.

김 지금은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베트남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가 적잖이 문제가 되고 있다.

득 몇몇 한국 기업은 분명히 베트남 노동자를 가혹하게 대했고 중요한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그동안 베트남 정부는 한국 기업한테 노조와 대화를 권고하고 노조의 구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위법한 행동은 엄격하게 처리하겠다고 경고했고, 실제 그렇게 했다. 최근 몇년간의 그런 노력들로 최근엔 한국 기업들의 노사관계가 상당히 나아졌다고 평가한다.

김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높게 평가한다고 했지만 자본주의와 세계화로 인한 병폐도 크다. 베트남은 한국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득 한국은 빈부격차, 도농격차, 즉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에서도 산업화 과정에서 이런 문제와 맞닥뜨리고 있는데, 한국보다는 미리 이를 염려해왔으며 해결책들을 연구해왔다. 베트남이 비록 한국보다 경제력이 뒤처진 개발도상국가이기는 하지만, 사실 한국처럼 양극화 문제를 이렇게 방치하진 않는다.

베트남이 한국보다 사회적 연대가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패 문제와 관련해선 베트남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부패예방기구를 설립하고 학교에서도 이를 예방하는 교육을 하고 있지만, 성과는 아직 높지 않은 편이다.

김 그렇다면 민주주의 문제는 어떤가? 한국은 다당제이고 베트남은 공산당 일당체제다.

득 베트남은 공산당 일당체제이긴 하지만, 당내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려고 꾸준히 노력해왔다. 2011년 총선으로 13대 국회가 개원한 이래 개헌을 하기로 의결했고 지난 1월 헌법 초안을 공표했다. 베트남 정부는 헌법 초안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알리며 여론을 수렴하고 있다.

이번 헌법 개정의 주요 내용엔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어떻게 이룰지에 대한 것들이 있다. 베트남은 국민들이 국회의원(500명)을 선출하면 국회의원 중에서 국가주석, 총리, 장관이 선출된다. 당이 해당 자리에 후보자를 추천하면 국회의원들이 임명동의 투표를 하게 된다. 올해부터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됐다. 베트남에선 국회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처럼 요식적인 기구가 아니다.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유지할지,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 다시 바꿀지도 논의해왔다. 헌법개정위원회가 지난달 회의에서 현 국호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최종 결정은 오는 10월 국회 인준투표에서 이뤄지지만 헌법개정위원회의 견해가 관철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시점에서 국가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를 드높이는 길을 분열시키고 왜곡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우리는 ‘부유한 인민, 강한 국가, 민주, 공평, 문명’이라는 사회주의 이상을 위해 시장경제를 도입한 것이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은 1945년 초대 국가주석인 호찌민이 프랑스로부터 독립선언을 할 당시 이름이고,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은 1976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북통일을 이룬 뒤 붙인 국호다.

정리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