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상대 중국과는 공존…
대북 ‘적대적 기억’도 극복해야
등록 : 2013.07.31 20:08수정 : 2013.07.31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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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대표단 개성으로 1951년 7월10일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등 유엔군 대표단이
정전 협상을 위해 회담장인 개성으로 떠나고 있다. 맥아더 기념관 소장. 경기관광공사
제공 |
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
⑥ 무엇을 기념해야 하나?
북한 시대착오적 ‘전승절’
남한도 ‘승전기념’ 경쟁
이젠 6·25 이념적대에서
7·27 평화과제로 전환할 때
한중관계처럼 상호이익
좇아야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문제는 특정 개인과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한다. 과거는 현재를 매개로 한 미래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들은 개인과 공동체를 막론하고 과거를 반성한 만큼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는 과거 성찰의 정도만큼만 미래 발전을 허락한다.
독일·일본·남아프리카공화국·북한의 사례는 과거 기억이 어떻게 한 공동체의 집단적 사유체계를 결정하고, 현실적·도덕적 수준을 좌우하는지를 극명하게
상징한다. 요컨대 우리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과거’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현재’의 수준에 비례한다.
한국전쟁을 우리는 대체 어떻게 기억하고 성찰해야 하나? 전쟁이라는 절멸주의 폭력에 대한 가혹한 비판은 가장 앞자리에 놓여야
한다. 그러나 전쟁의 시작에만 한정한다면 남한은 반성할 것이 거의 없을지 모른다. 북한의 명백한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의 시작에 대한 규탄과 증오에서 멈출 때 세계와 우리가 이 거대 사태로부터 가려 배울 것은 너무 작을 것이다. 사태의 시작이 시작 이후의
모든 전개와 영향, 성찰 요소와 실천 과제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동아시아와 세계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
한국전쟁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물어야 한다.
그럴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문제는 명명의 문제다. 최근 들어 이 전쟁에 대한 호칭은 ‘6·25전쟁’과 ‘한국전쟁’으로
대별되고 있다. 아직도 당대의 직접적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는 우리는 통일 이후 더 나은 대안이 도래할 때까지는 두 용어를 함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같은 거대 사태를 시작 날짜를 중심으로 기억하는 사례는 많지 않다는 점에서 ‘6·25전쟁’ 기억 방식이 당대를 직접 기억하는
인간들이 사라진 뒤에도 지속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3·1절, 8·15, 4·19, 5·16, 6·15처럼 특정 시점을
중심으로 과거를 기억하는 현대 한국의 익숙한 관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6·25전쟁과 한국전쟁의 구분
우리가 정작 깊이 성찰해야 할 요소는 ‘6·25’, ‘6·25전쟁’이라는 용어보다 하나의 세계관과 인식체계로서의
‘6·25담론’과 ‘6·25기억체계’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기억’이 ‘기억의 전쟁’으로, 또 ‘무기의 전쟁’이 ‘인식의 전쟁’으로 전화될
때 역사인식은 과거 해석과 미래 실천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6·25전쟁’은 보수의 용어이고 ‘한국전쟁’은 진보의 주장이라고 나누는
이분법은 틀린 접근이다.
한국에서 이 전쟁에 대한 체계적 정리를 처음 시작한 박정희 시기의 방대한 정부 공식기록은 ‘한국전쟁사’였다.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박정희 때부터였다. 따라서 ‘6·25전쟁’ 대 ‘한국전쟁’ 명명을 보수 대 진보로 양분한 뒤, 전자를
친대한민국적, 후자를 반대한민국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주장은 더 수용되기 어렵다. 말의 쓰임은 무엇보다 보편적
소통에 있다. 세계의 많은 공식문서와 자료와 보도들이 ‘한국전쟁’이라 표기하는 것을 ‘6·25전쟁’으로 번역하는 현실은 역사가 아니라 이념에
가깝다. 또 ‘한국’은 국가 명칭이기 때문에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주장 역시 타당성이 없다. 페르시아전쟁, 영국내전,
프랑스혁명, 미국내전, 러시아내전은 내외에서 일반적인 명명이 되어 있다. 자신들의 내부투쟁에 ‘영국내전’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영국은 어떻게
되는가?
한국전쟁의 ‘한국’은 ‘국가’가 아니라 ‘장소’로서의 한국(Korea), 한반도, 남한과 북한을 뜻한다. 자기 문제의
객관화, 즉 인간들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존하는 보편적 사유체계로서의 ‘주제’(topic)라는 개념 범주의 어원이 ‘장소’(topos)라는
말에서 왔음은 의미심장하다. 객관성과 보편성의 출발은 특수성과 장소성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좀더 보편타당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서구의 용례에서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이란 명명에 숨어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이 또다른 과제라는 점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의 기억과 관련해 오늘의 ‘6·25담론’을 깊이 성찰할 때 극단의 이념주의와 민족주의는 좌우 모두 같은 논리적 지반
위에 서 있다. 북한만 비판하면 된다는 ‘북한의 6·25남침’론은 북한과만 잘하면 된다는 ‘우리 민족끼리’ 접근방식의 ‘이념적 반대물’인 동시에
‘논리적 등가물’인 것이다. 만약 ‘북한’의 남침만 비판하면 된다면, 한국전쟁에 대해 수십년간 남한을 지배해온 ‘북한 괴뢰’론과 ‘북한
괴뢰군’론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결국 ‘6·25남침’ 담론이 ‘북한 괴뢰’론에서 ‘북한 주도’론으로 전이한 것은 사실의 구성은 다르나 비판의
대상은 동일한 이념주의가 낳은 인식의 자기충돌인 것이다.
심각한 기억의 불균등
기억의 불균등 문제는 가장 심각하다.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수정주의 사관을 비판하면서 국제 행위자들에 대한 비판을
유예하는 기억 방식은 논리모순이다. 만약 내전 논리가 틀렸다고 비판하면, 선제공격을 공동 결정한 소련과 중국도 함께 비판해야 논리적으로 맞다.
그것이 객관적 진실이며 수정주의가 무너진 연유다. 더욱이 정전 60주년을 맞아 남한(과 미국)은 ‘승전’을 말하면서도, 남한(과 미국)의 승전을
결정적으로 저지한 중국의 참전에 대한 기억은 ‘6·25남침’의 기억과는 전혀 다르다. 중국의 참전이 남한의 통일 저지에 ‘6·25남침’보다 훨씬
결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북한은 남한과 미국에 각각 관용과 적대, 공존과 증오의 대상으로 구별된다. 중국에 관한 한 남한과 미국의
한국전쟁 기억은 이념 지양, 적대 극복, 상호 이익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통일을 저지한 중국을 포용한 그 공존의 정신을 북한에는 어떻게 적용하는 게 바람직한지 우리 사회의 깊은
성찰과 모색이 필요하다. ‘중국이 참전해 통일이 저지됐다’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극복한 대중 철학과 방식을 원용하여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남침 담론을 넘어선 전혀 새로운 한국전쟁의 기억 지평을 궁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기억 지평이 새로운 실천 지평을
창출할 것임은 물론이다. 이념과 적대의 기억을 대체한 공존과 상호 이익의 기억 방식은 이제 ‘한-중’을 넘어 ‘남-북’과 ‘북-미’, 즉
‘남-북 대결’과 ‘북-미 적대’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남북관계와 국제 차원에서 ‘6·25전쟁 기억’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것이 ‘한-미’ 동맹, ‘북-중’ 동맹, ‘한-중’ 협력, ‘남-북’ 대결, ‘북-미’ 적대의 순서대로 나쁜 한국전쟁 기억의
심각한 불균등 문제를 해소하는 첩경인 것이다. 중국 내전의 적대적 기억을 돌파한 중국과 대만의 사례 역시 좋은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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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다리’ 위의 북한군 1955년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위에 북한군
경비병들이 서 있다. 1953년 7월 한국전쟁 정전 이후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포로들이 일단 한쪽 방향을 선택해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란 이름이 붙었다. 당시 중립국 감독위원회 참여국인 체코슬로바키아 관계자가 촬영했다. 주한체코대사관
소장. 경기관광공사 제공 |
이제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 체제의 구축을 위해
세계와 함께 6·25전쟁 발발보다는 7·27정전 체제를 기억하고 기념하자. 즉 6·25전쟁 담론에서 7·27평화 담론으로, 6·25이념 적대에서
7·27평화 과제로 전환하자. 필자가 오랫동안 이를 주창해온 궁극적 소이는 기억의 균형과 평화 과제의 실천에 있었다. 중국 참전과 중국군 묘지에
대한 기억의 역전, 그리고 한-중 관계 개선과 상호 이익 증대처럼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실례도 없다. 목적과 이익의 공유 공간을 확보하는 한
남-북과 북-미 역시 한-중의 상호 기억 역전과 접근 방식을 채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요컨대 6·25전쟁 담론에서 7·27평화 담론으로의
전이는 평화 철학 창출, 평화 과제 추출, 평화 실천의 요체로서, 전쟁에서 평화로, 적대에서 화해로, 정전 체제에서 평화 체제로 나아가는 핵심인
것이다.
인권·노동 억압해온 전쟁담론
내부 차원에서 전쟁의 발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6·25기념과 6·25담론은 또다른 문제로 다가온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전쟁에 대한 국가의 기억 독점과 공식 담론 이외의 모든 해석을 차단하는 억압의 무기로 기능해 왔다. 국가는 전쟁의 해석·기억·기념의 유일
담지자였다. 이를 통해 정치와 이념의 지형은 보수 압도로 주조되었고, 국가의 오류와 범죄는 오랫동안 도전받거나 교정될 수 없었다. 기억 독점에
대한 도전은 가혹한 법의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북한의 선제 남침이 곧 남한의 모든 실정과 오류를 정당화해주거나, 그에 대한 비판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북한과 남한 공히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문제는 명백히 이념과 적대를 넘어 존재한다. 인류가 ‘인도에 반하는 범죄’와 ‘평화에 반하는
범죄’를 말해온 연유다. 특히 학살에 이어 빨갱이와 반동으로 낙인찍은 현실은 국가의 이중 범죄였다. 기억의 독점을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극복을 위해선 전쟁에 대한 인간주의적 응시와 위로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대체 이산가족 상봉의 인간 문제가 왜 이념에 의해 계속
저지되어야 했는가?
이때 진보적 담론과 진영은 남한과 미국에 의한 학살만을 기억하고, 보수적 담론과 진영은 북한에 의한 학살과 납치만을 기억하는
이중성은 극복되어야 한다. 이는 ‘무기의 전쟁’을 ‘기억의 전쟁’으로 연장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양쪽에 의한 민간학살이 함께 포용되지 않으면
우리는 6·25담론을 넘어 진실과 화해, 공존과 상생으로 나아갈 수 없다. 북한은 아직 민간학살 문제의 초입에도 들어가 있지 못하다. 민주화
이후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규명 노력이 보수 정부의 출범과 함께 폐지되고, 진보 정부 아래에선 북한에 의한 학살과 납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진 것은 인간문제를 여전히 이념 차원에서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진실 규명의 정지와 함께 국가의 반성이 중단된 것은 인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남북관계에 관한 한 ‘6·25담론’이 과장은 있었을지언정 국가 안보를 위한 기제로 작동해온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남침은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제2의 남침은 미래의 현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6·25담론’이 국가 안보를 넘어 내부 정치로
확장되고 소비될 때였다. 남침과 북침을 둘러싼 남과 북의 6·25기억 경쟁은 모든 갈등을 남북의 체제 정통성 경쟁 차원으로 몰아가, 6·25기억
체계는 남한과 북한에 완전 통합을 강요하였다. 내부의 개혁 시도, 아래로부터의 저항, 섬세한 차이들은 6·25담론이 부과하는 ‘전체’로서의
남한과 북한에서 억압되고 배제되었다. 공식 해석에 대한 최소한의 문제 제기조차 불가능했던 북한은 말할 필요도 없고, 남한에서도 전쟁 기억의 국가
독점은 ‘남북관계’와 ‘안보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 내부의 담론 범주를 설정한 근본 요소였다.
민주 세력과 저항의 논리들은 전쟁 기억에 바탕을 둔 국가 안보 담론으로 인해 체제 불안 요소로 탄압받았다. 6·25담론이
독재 논리로 작용해 남북관계와 상관없는 내부 개혁 요구들조차 급진주의나 친북 노선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담론은 오랫동안
민주주의·생명·인권·분배·노동·평화주의에 대한 탄압의 강력한 논거였다. 과거 기억이 현재의 민주·복지·개혁·노동·참여의 논리를 억압하는 기제였던
것이다. 그 일도양단의 기억 체계를 넘어서는 만큼 한국 사회는 발전할 수 있었다. 민주화 이후 과거사를 둘러싼 입법 전쟁과 정치 공방은 기억
전쟁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군번1번 이형근의 질타
이제 오늘의 ‘6·25승전 담론’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시기의 한국전쟁 서술은 국가수호를
긍정하면서도 남침을 막지 못한 데 대한 비판 역시 강력하였다. 그에 비추어 자기반성이 생략된 오늘의 6·25승전 담론은 박정희 시기만도 못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진실,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국력 경쟁은 이제 너무도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시대착오적인 ‘전승절’ 기념에
더해 남한마저 또다른 ‘승전기념’을 추가하여 경쟁한다면, 두 한국은 얼마를 더 기다려야 화해와 공존, 평화와 통일의 기억과 철학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남한은 6·25승전 기념이 아니더라도 내세울 업적과 가치가 많다.
군번 1번 이형근이 사반세기 전 필자에게 남긴 추상같은 증언은 지금도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의 6·25기록에서
남침 저지와 국민 보호에 실패한 남한 정부와 국군 자신의 반성은 좀처럼 찾을 수 없다. 국민과 국가를 도탄과 위기에 빠뜨리고도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런 군대와 나라가 또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이 맹성은 후세를 위한 자기성찰로서 한국전쟁에 대한
<난중일기>와 <징비록>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웅변한다. 공산 남침에서 나라를 지켜내고 승리했는데 무슨 반성이 필요하냐는
반문은, 이순신과 류성룡이 나라를 지켜낸 일등 공신이었다는 점에서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
이제 우리는 기억 독점, 기억 적대, 기억 전쟁의 시대를 끝내고, 기억 성찰, 기억 공유, 기억 균형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전쟁과 혁명의 반복되는 참상에서 비롯된 인류의 깊은 지혜를 떠올리자. 민족주의와 이데올로기가 낳은 비극의 치료제는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유·평등·인권·민주주의·평화·생명과 같은 보편주의라는 점이다. 민족적·이념적 적대구조의 극복 문제는 결국 우리가 보편의
광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기비판의 능력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