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 |
금관총 이사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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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662회 작성일 2013-07-07 12:49본문
한겨레 신문 2013.7월5일자
칼집 새겨진 ‘이사지왕’ 신라 금관총 주인이십니까?
1921년 출토된 ‘환두대도’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이란 이름을 새긴 명문이 발견됐다. 신라 무덤에서 묻힌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명문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3일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명문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름이 나온 칼은 금관총에서 발견된
환두대도 세 자루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해온 한 자루. 명문의 존재를 모른 채 녹이 슨 상태로 수장고에서 92년간 잠들어 있다가 이번에
녹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글씨가 드러난 것이다.
명문은 칼집 상하단을 감싼 금동 부분에서 발견됐는데, 끝부분 앞뒤로 ‘爾斯智王’(이사지왕), ‘十’(십)자가 음각돼 있고, 칼집 상단에
‘爾’(이)가 새겨져 있다. 이와 함께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된 또다른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서도 ‘爾’(이), ‘八’(팔), ‘十’(십) 등의
명문이 확인되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은 ‘爾’(이)자가 ‘爾斯智王’(이사지왕) 명문의 일부라고 추정하고 있다. 경주박물관에 있는 나머지 한 자루는
부식이 많이 돼 명문은 확인되지 않았다.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서 ‘爾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발견됐다. |
박물관 쪽은 “이사지왕은 환두대도의 소유주로 보이며 같은 이름이 새겨진 환두대도가 두 자루 이상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금관총 피장자가
환두대도의 소유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신라 무덤에서 명문이 발견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 경주 호우총의 청동호우에서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교류를 보여주듯 고구려 광개토왕 시호(죽은 뒤 받은 이름)가 확인되고,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夫人帶’(부인대) 등의 글자가 적힌 유물이
확인된 적은 있지만 이번과 그 무게가 다르다. 6세기 이전 마립간시대(17대 내물왕~22대 지증왕) 최고 지배층의 무덤으로 판단되는 신라
무덤에서 피장자의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명문 발견은 최초인 셈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의 왕릉급 무덤들 가운데 묻힌 왕의 신원이 밝혀진 것은 비석이나 비석편이 발견된 무열왕릉과 흥덕왕릉(괘릉)뿐이다.
대부분의 무덤들은 문헌이나 전설 등을 통해 신원이 추정될 뿐이다. 그래서 신라 무덤들은 대표적인 출토 유품으로 이름을 달아 구분해왔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시 노서리에서 집수리 공사 도중 발견되었고, 금관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금관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문제는 ‘이사지왕’이란 명문이 발견되었지만 이 이름이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상고기의 왕 가운데 이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박물관 쪽은 “‘이사지왕’은
금관총의 주인공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는 하지만 다른 금석문이나 문헌에 나오지 않아 마립간 시대 6명의 왕 중 한 사람의
다른 왕명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경주박물관 윤온식 학예연구사는 “신라는 백제와 달리 중국의
묘제를 뒤늦게 받아들여 무열왕 이전까지는 문자 이전의 풍습대로 피장자의 신원을 밝히는 묘지를 넣거나 비석을 세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쪽은 “이사지왕은 고위 귀족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503년에 세워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보이는 ‘차칠왕등’(此七王等)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마립간이 아닌 갈문왕이나 고위 귀족도 왕으로 불렸다는 해석이 유력하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따르면 금관총·천마총 등 지금까지 금관이 출토된 신라 무덤을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해온 국내외 연구는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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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큰칼 ‘이사지왕’ 명문 확인…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금관총이 ‘이사지왕’이라 불린 신라인의 무덤이라면, 1921년 금관총이 발굴된 지 92년 만에 피장자가 드디어 확인된 것이다. 특히 신라 초기 고분 형식인 적석목곽분(나무널 주위에 돌을 쌓은 무덤) 가운데 주인공이 밝혀지기는 처음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부실하게 발굴한 것으로 유명한 금관총은 왕릉에 준하는 무덤이지만 주인공이 확인되지 않은 데다, 국내에서 금관이 최초로 출토돼 ‘금관총’이란 이름을 얻었다. 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홍진근 학예연구관은 “ ‘이사지왕’이 금관총 주인공일 것으로 보인다”며 “금관총은 주인공이 밝혀지는 유일한 신라 초기 무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사지왕’이란 명칭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 금석문에서 확인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이번에 발견된 명문은 학계에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연구하도록 하는 큰 숙제를 안긴 셈이다.
학계에서는 ‘이사지왕’이 금관총이 조성된 마립간시대, 즉 17대 내물(재위 356~402년)부터 22대 지증(재위 500~514년) 사이의 어느 마립간(최고 지배자)의 별칭이거나, 아니면 당시에 왕이란 명칭으로 불린 왕족 또는 최고위급 귀족일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고대사 전문가들은 마립간보다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라는 데 무게를 둔다. 신라 최고의 금석문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 264호)를 보면 ‘此七王等(차칠왕등)’ 등 마립간이 아닌 사람도 왕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신라 고분의 주인이 모두 마립간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종욱 서강대 석좌교수는 “갈문왕처럼 왕의 동생이면서 왕이란 칭호로 불린 경우가 있듯이 ‘이사지왕’도 마립간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마립간의 형제나 그 형제의 부인, 왕비이거나 최고위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전덕재 단국대 교수도 “마립간의 별칭일 수도 있지만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며 “신라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이사지왕’이 마립간이 아니라면, 금관이 마립간만의 독점적 상징물이 아니라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도 사용했다는 기존 학설을 뒷받침해준다. 홍 학예관은 “ ‘이사지왕’이 마립간이 아니라는 견해가 많은데, 이에 따르면 천마총 등 지금까지 금관이 출토된 무덤을 마립간 무덤으로 추정한 일부 연구는 재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고분 주인 밝혀졌다
ㆍ발굴 92년 만에… 환두대도 보존처리 과정서 판독
ㆍ마립간시대 왕릉서 왕 이름 첫 발견… 왕 아닐 수도
신라시대 고분인 금관총의 출토 유물에서 명문(銘文)이 확인돼 금관총의 사실상 주인공이 발굴 90여년 만에 처음 밝혀졌다. 신라 마립간시대(4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조성된 많은 고분들 중 피장자 이름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명문은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3일 “1921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서 전형적인 신라 초기식 표기의 ‘이斯智王(이사지왕)’ ‘이(이)’ ‘十(십)’ 명문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중앙박물관은 “환두대도 보존처리 과정에서 명문을 확인하고 판독했다”며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서도 ‘十(십)’ ‘이(이)’ ‘八(팔)’ 명문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중앙박물관 소장 환두대도의 명문은 칼집 끝 금동장식 부분 앞면에 ‘이사지왕’, 뒷면에 ‘십’, 앞면 상단에 ‘이’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경주박물관 소장 환두대도는 칼집 끝 앞면에 ‘십’, 뒷면에 ‘이’, 앞면 상단에 ‘팔’이 선각됐다. 전문가들은 “향후 연구가 더 시급하다”는 전제 아래 ‘이사지왕’이란 인물이 금관총 주인공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ㆍ마립간시대 왕릉서 왕 이름 첫 발견… 왕 아닐 수도
신라시대 고분인 금관총의 출토 유물에서 명문(銘文)이 확인돼 금관총의 사실상 주인공이 발굴 90여년 만에 처음 밝혀졌다. 신라 마립간시대(4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조성된 많은 고분들 중 피장자 이름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명문은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3일 “1921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서 전형적인 신라 초기식 표기의 ‘이斯智王(이사지왕)’ ‘이(이)’ ‘十(십)’ 명문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중앙박물관은 “환두대도 보존처리 과정에서 명문을 확인하고 판독했다”며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서도 ‘十(십)’ ‘이(이)’ ‘八(팔)’ 명문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중앙박물관 소장 환두대도의 명문은 칼집 끝 금동장식 부분 앞면에 ‘이사지왕’, 뒷면에 ‘십’, 앞면 상단에 ‘이’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경주박물관 소장 환두대도는 칼집 끝 앞면에 ‘십’, 뒷면에 ‘이’, 앞면 상단에 ‘팔’이 선각됐다. 전문가들은 “향후 연구가 더 시급하다”는 전제 아래 ‘이사지왕’이란 인물이 금관총 주인공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신라 금관총 주인은 이사지왕 국립중앙박물관은 신라 고분인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에서
‘이사지왕(이斯智王)’ 등의 명문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칼집 끝부분(원)에 새겨진 글자가선명하게 보인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관총이 ‘이사지왕’이라 불린 신라인의 무덤이라면, 1921년 금관총이 발굴된 지 92년 만에 피장자가 드디어 확인된 것이다. 특히 신라 초기 고분 형식인 적석목곽분(나무널 주위에 돌을 쌓은 무덤) 가운데 주인공이 밝혀지기는 처음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부실하게 발굴한 것으로 유명한 금관총은 왕릉에 준하는 무덤이지만 주인공이 확인되지 않은 데다, 국내에서 금관이 최초로 출토돼 ‘금관총’이란 이름을 얻었다. 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홍진근 학예연구관은 “ ‘이사지왕’이 금관총 주인공일 것으로 보인다”며 “금관총은 주인공이 밝혀지는 유일한 신라 초기 무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사지왕’이란 명칭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 금석문에서 확인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이번에 발견된 명문은 학계에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연구하도록 하는 큰 숙제를 안긴 셈이다.
학계에서는 ‘이사지왕’이 금관총이 조성된 마립간시대, 즉 17대 내물(재위 356~402년)부터 22대 지증(재위 500~514년) 사이의 어느 마립간(최고 지배자)의 별칭이거나, 아니면 당시에 왕이란 명칭으로 불린 왕족 또는 최고위급 귀족일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고대사 전문가들은 마립간보다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라는 데 무게를 둔다. 신라 최고의 금석문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 264호)를 보면 ‘此七王等(차칠왕등)’ 등 마립간이 아닌 사람도 왕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신라 고분의 주인이 모두 마립간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종욱 서강대 석좌교수는 “갈문왕처럼 왕의 동생이면서 왕이란 칭호로 불린 경우가 있듯이 ‘이사지왕’도 마립간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마립간의 형제나 그 형제의 부인, 왕비이거나 최고위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전덕재 단국대 교수도 “마립간의 별칭일 수도 있지만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며 “신라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이사지왕’이 마립간이 아니라면, 금관이 마립간만의 독점적 상징물이 아니라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도 사용했다는 기존 학설을 뒷받침해준다. 홍 학예관은 “ ‘이사지왕’이 마립간이 아니라는 견해가 많은데, 이에 따르면 천마총 등 지금까지 금관이 출토된 무덤을 마립간 무덤으로 추정한 일부 연구는 재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은 1921년 주택공사 중 유물이 발견되면서 조선총독부가 발굴을 진행했다.
금관총에서는 국내 최초로 출토된 ‘금관총 금관’(국보 87호)을 비롯해 황금 유물 등 4만여점이 출토됐다. 신라 금관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금관총 금관이 출토되면서 신라 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졌고, 일제가 금령총·서봉총 등 대형 고분들의 발굴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금관총에서는 국내 최초로 출토된 ‘금관총 금관’(국보 87호)을 비롯해 황금 유물 등 4만여점이 출토됐다. 신라 금관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금관총 금관이 출토되면서 신라 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졌고, 일제가 금령총·서봉총 등 대형 고분들의 발굴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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