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리엄 해리슨 유엔군사령부 중장(맨 왼쪽)과 남일 북한 인민군 대장(맨 오른쪽)이 1953년 7월27일 오전 회담장으로 쓰던 판문점 목조 건물에서 각각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
[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
② 한국전쟁은 도대체 무엇을 남겼는가?
최악의 적대적 분단구조 낳아
남한선 반공·북한선 반미가
절대적 지배이념으로 고착
‘좌경’ ‘반혁명’, 사회 전 분야서
내부 다른 노선 집단 제압논리 돼
남한 진보당, 북한 연안파 제거
한국 근대성에 조종 울린 사건
한국전쟁의 비극 극복 노력은
‘더 나은 사회’ 대안 제시와 직결 전쟁에 동원된 세계 최고 수준의 폭력성과 잔인성 또한 전쟁의 재발을 막은 결정적 요인이었다. 한국에서 전쟁의 재발은 한국전쟁 이상의 세계폭력과 집단학살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의 거대성이 제2의 한국전쟁을 막은 역설이었다. 즉 세계시민전쟁이 수반한 세계폭력과 집단희생이 제 3차세계대전을 저지한 것이었다. 두 한국이 제2의 한국전쟁을 치르지 않은 동시에 아직도 분단되어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이 전쟁 때문인 것이다. 전쟁재발의 객관적 가능성은 소멸되었지만 한국전쟁 경험은 전후 남한과 북한에겐 살아있는 현실이었다. 그것은 체제 차원의 정치와 대중차원의 일상 모두에서 동일하였다. 두 한국은 전쟁의 재발위협에 대한 상시 위기동원전략을 통해 전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였다. 남한과 북한은 제2의 남침과 제2의 북침을 계속 경고하며 철저한 통제체제를 구축하였다. 물론 북한의 동원은 ‘북침’이라는 허구의 역사에 근거한 것이었으나 북한인민들은 ‘북침’을 사실로 믿었고, 체제의 폐쇄성을 반영해 통제효과의 측면에서는 남한보다 더 컸다. 국내정치를 위해 전쟁재발 논리를 적극 활용한 전후 한국의 두 독재체제는 전쟁동원체제에 가까웠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독재체제의 역사적 근거였던 것이다. 실제로 전후 전쟁문화와 전쟁담론, 군사주의와 군사문화는 두 한국에 넘쳐흘렀다. 전통 한국에서 장구하게 지속되어온 문민주의와 문민통치의 전통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에서 뿌리가 뽑혔다. 전쟁의 폭력성이 체제대결과 체제 자체의 폭력성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유격대 전통과 군사주의가 결합된 철저한 군사국가가 되었고, 남한은 전쟁을 거치며 급격히 팽창한 군대를 견제할 시민사회가 성장할 때까지 군사통치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서 군사주의의 지속기간과 발현양태는 크게 달랐다. 폐쇄체제 북한에게 군사주의는 체제생존을 위한 제일 요소였다. 게다가 내부에서 이를 저지할 제도적·사회적 요소는 전무했다. 실제로 한반도 군사대결체제의 양대 기둥인 정전체제와 북핵체제를 초래한 전쟁과 핵개발을 선제한 것은 북한이었다. 반면 남한은 의회·정당·언론의 도전과 비판을 포함해 밑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저항을 통해 군사주의와 군사통치를 극복해갔다. 그를 통해 북한이 독재체제와 군사국가를 지속하는 동안 남한은 이를 극복하고 민주체제를 구축하였다. 밑으로부터의 저항과 민주주의 실천능력은 남한과 북한의 차이를 결과한 결정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상호 절멸을 추구한 한국전쟁은 집단의식의 측면에선 두 한국에게 서로를 향한 최고 최악의 적대감을 낳았다. 최고의 잔인성을 수반한 전쟁으로 전후 두 한국에서 상호 증오는 하늘을 찔렀다. 특별히 오랜 단일민족국가의 역사는, 상대 때문에 동족상잔의 대참화가 초래되고 민족의 단일성과 순수성이 파괴되었다는 인식으로 인해 더욱 극단적인 절멸 의지로 연결되었다. 이른바 동근원성과 동일성의 역설이었다. 절반의 ‘악’을 제거해 단일성을 회복한다는 의지는, 전쟁시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장 극단적인 선악 이분법과 흑백논리로 귀결되었다. 한국전쟁은 체제의 경직성 못지않은 의식의 경직성을 낳은 결정타로서, 전후 남북대결 역시 전시 생사투쟁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를 통해 상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이념만이 가장 정당하다는 관념이 일반화되었다. 남한에서는 가장 강한 반공·반북 이념이, 북한에서는 가장 강한 반미·반남 이념이 전후체제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된 연유는 한국전쟁의 경험이었다. 이를 통해 전후 남한과 북한은 오랫동안 다른 가치와 사유가 차단된 채 하나의 이념과 가치만이 받아들이는 단일표제사회, 단일가치사회가 되었다. 통일추구는 물론, 단일표제를 명시적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요소들은 반체제요소로 간주되고 탄압받았다. 남한에서 좌경·용공·친북·빨갱이 담론과 북한에서 미제간첩·남조선 간첩·반동분자·반당종파분자 규정은 한 사람과 한 노선과 한 집단으로부터 국민정체성·인민정체성을 박탈하고, 타도대상으로 이념적 정치적 인격적 낙인을 찍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통일문제와 남북관계를 넘어 경제·교육·사회·언론·국제관계 분야에서의 개혁요구조차 생각과 노선이 다른 집단을 제거하는 최고의 무기는 이념적 낙인과 공격이었다. 이를 통해 내면의 양심과 비판의 자유는 위축·파괴되고 자기검열은 일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유·평등·인권·민주주의·평화와 같은 보편가치의 확산을 통해 민주화 이후 남한은 강고한 단일표제주의를 극복해왔으나, 최근의 종북·좌파 담론에서 보듯 전쟁담론의 유산인 이념적 낙인은 아직도 경쟁세력을 공격하는 핵심소재이다. 물론 북한은 이점에 관한 한 최소 비판조차 수용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머물러있다. 최고수준의 폭력이 강제한 생사투쟁, 완승완패 추구의 전쟁체험은 남과 북 각각에게 전체 우선주의와 함께, 타협과 공존의 사회질서 및 사유체계를 제거하였다. 특히 북한에서는 김일성 1인 및 세습체제의 완승과 장기독점체제가 지속되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체제는 사실상 전시체제, 또는 전후체제의 거의 변동 없는 장기지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구완승체제는 북한에서 ‘정권’안정과 ‘국가’쇠락, ‘가족’세습과 ‘인민’파탄의 결합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장기독재를 추구한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체제가 모두 ‘정권’과 ‘국가’를 분리해낸 시민사회의 지혜와 저항을 통해 붕괴되었다. 전쟁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한 이승만체제를 타도한 4월혁명은 전후 남한과 북한을 반대로 방향지은 첫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남한의 저항은 ‘정권’의 불안과 교체를 통해 ‘국가’의 민주화와 발전을 초래해 남한으로 하여금 한국전쟁의 영향을 앞서 극복하게 한 최대의 요소였다. 그리하여 북한과 같은 장기독점은 전연 불가능하였으나, 남한 역시 아직도 여·야-보수·진보 사이에 타협과 공존 대신 완승과 승자 독식을 추구하는 전후 정치는 지속되고 있다. 전후 한국전쟁이 낳은 남북 사이의 극단적인 선악 양분과 양자택일 논리가 초래한 최대의 피해는 무엇보다 체제대안의 봉쇄였다. 이를 통해 근대 이래 발양하고 성장해온 공화국가, 형평국가, 사회국가, 사회민주주의 구상은 전면 단절되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피해 가운데 하나였다. 근대의 여명을 열었던 다산 정약용 이래 근대 초기의 공화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헌법, 삼균주의, 식민시기 건국강령, 해방 후 한국민주당과 남한 건국헌법에 이르기까지 경제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통한 형평국가·사회국가 구상은 한국적 근대성의 요체 중의 요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 남한은 헌법개정과 미국원조의 수용을 통한 시장경제체제의 전면도입을 통해, 북한은 공산독재와 사회주의체제로의 급진적 이행을 통해 두 한국에서 공공성과 민주성과 개인성을 결합하려 했던 한국적 근대성은 조종을 울렸다. 전후 진보당과 연안파의 남과 북에서의 제거는 최후 잔기마저 뿌리가 뽑혔음을 의미했다. 형평국가와 사회민주주의 체제구상의 폭력적 종언은 분단고착, 문민우위 소멸, 적대만연과 함께 거시 한국역사를 단절시킨 한국전쟁의 최대 손실이었다. 한국사회의 민주역량은 과연 이의 한반도적 복원을 통한 복지국가 건설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전쟁은 두 한국에 오직 사람만을 남길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그 파괴는 전전의 유교의식과 반상구조, 지주소작관계와 토지불평등을 완전히 뒤흔들며 모든 이들을 같은 출발선상에 놓이도록 하는 평등주의를 전면적으로 확산시켰다. 도시와 농촌, 남한과 북한, 마을과 마을, 내륙과 해안 사이의 인구 이동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끝없이 섞였고 언제 어디서건 살아남으려 최선의 발버둥을 쳤다. 사람만의 존재, 평등주의의 전면 확산, 최선의 생존노력…. 이 요소들의 결합은 전후 초기 북한에서 그리고 60년대 이후 남한에서 세계가 놀랄만한 빠른 돌진적 발전의 한 원천을 이루었다. 다시는 전쟁을 당하지 않으려는 불꽃 튀는 체제경쟁과, 죽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게 된 개인들의 핏발선 생에의 의지는 두 한국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켰다. 느리고 정적이었던 전통 한국은 전후 빠르고 동적인 두 한국으로 완전히 변모되었다. 그러나 두 한국의 급속한 변모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전후 인간과 세계를 향한 보편적 가치와 철학이 크게 부족한 발전이었다. 전후 장기 발전에 실패한 북한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성공한 남한 역시 개인과 사회의 대안체제를 향한 철학은 결여되어 현세주의와 물질총량주의에 머물렀다. 한국전쟁이 초래한 조야한 흑백논리와 이념공방 및 극단적인 폭력성의 결합은 한국사회에 사유의 결핍과 철학의 부재를 낳았다. 사유는 판단의 출발이며 행동의 근거를 이룬다. 비극은 사유의 제일 원천을 이룬다. 거대한 혁명과 전쟁을 체험한 사회들이, 비극의 집합적 승화를 통해 새로운 사유와 철학을 탄생시키며 인류와 자기사회에 뚜렷한 사회이상과 미래가치를 제공해온데 비해 전후 한국사회의 철학의 질식과 부재는 이론과 대안 모색 모두에서 심각한 지체현상을 결과하였다. 더 나은 삶과 더 좋은 사회를 향한 시민들의 반복되는 열망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집합적 비전과 실천적 대안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에도 그러하다. 사회철학과 대안제시 능력의 부재는 전후 한국 최대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한국전쟁 영향의 극복노력은 이 거대한 세계적 비극이 요구하는 생명과 자유, 평등과 복지, 세계평화의 보편적 가치와 질서를 향한 사유체계와 대안제시에 직결되어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