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무오사화 vs. 국정원 2013년의*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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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874회 작성일 2013-06-30 02:47본문
- “기록을 정쟁의 도구로 삼고 망가뜨린 것에 분노”
- 경향신문 25면 3일전
- ㆍ전진한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소장 “정보공개청구 운동하는 활동가가 국가정보원에 ‘당신들... 웃긴다. ” 전진한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소장(39·사진)은 국정원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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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계사사화(癸巳史禍-2013)-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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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조 무오년(1498) 사화는?
사초(史草)로 발단되었다고 해서 사화(史禍)로도 불린다.
국가정보원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계기로 이 사화가 새삼스럽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우원식 민주당 최고위원은 어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사태를 무오사화에 직접 비유하기도 했다.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가
신진 세력으로 떠오르는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공개해서는 안되는 기록을 이용한 것 등이 닮아서일 것이다.
실제로 두 사건은 515년이라는 시간적 거리가 있지만
전체적인 틀과 맥락이 비슷한 데가 많다.
ㄱ.비공개 기록을 정쟁의 도구로 이용한 점,
ㄴ.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발언 또는 기록을 문제삼은 점,
ㄷ.사건 당시 최고 권력자의 선대가 ‘쿠데타’로 집권한 점,
ㄹ.최고 권력자가 문제의 기록 공개를 주도 또는 방조한 점 등이 그렇다.
그래서
무오사화와 그 주역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됐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이번 사태의 미래를 내다보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 포진한 신진사류의 비판이 껄끄러워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 포진한 신진사류의 비판이 껄끄러워
사초를 문제삼아
그들을 숙청했던 연산군의 말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화의 빌미를 제공했던 이극돈(李克墩·1435~1503)은?
냉혹한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성종실록>을 수찬(修撰)하면서
김일손이 자기의 악행을 쓴 것을 보고 깊이 원망을 품고 있다가
선왕의 일을 결부해서 유자광을 사주하여 이를 고발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사류(士流)를 죽이고 귀양 보내기를 매우 혹독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이
무오사화에는 이극돈이 수악(首惡)이라고 말했다.”
연산군일기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사후에도 100건에 가까운 기사가 검색되는데,
대부분 사사(史事)를 누설한 그의 죄를 추론(追論)하는 내용이다.
그 결과
ㄱ.관작이 추탈되고
ㄴ.유림에서 배척되며
ㄷ.실록에도 길이 ‘연산조의 간신’으로 기록된다.
세조의 찬위를 도와 득세한 훈구세력이 사화를 통해 실권을 다지지만,
재야에서 실력을 배양한 사림세력이 선조대부터 중앙 정계를 장악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계사년 사화의 주역들은 이를 아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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