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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봉 야구인생 4막 (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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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홈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516회 작성일 2004-02-1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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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 기자 해설가 그리고 스카우트. 이 모든 직업을 경험한 이가 있다. 지난 1월 말 LG 스카우트 과장으로 부임한 이효봉씨(41). 중학시절에는 기대를 한몸에 받은 유망주 투수였고,프로에 데뷔해서는 좌절을 맛본 뒤 선수 출신 두 번째 기자가 됐다. 이후 우연찮게 해설가가 돼 경험에서 우러난 깊이 있는 해설을 선보였다. 이제 스카우트의 길로 막 들어선 이효봉씨의 ‘뛰고(선수) 쓰고(기자) 말하고(해설자) 뽑는(스카우트)’ 4막의 야구 인생을 들춰본다. ▲1막1장―아마시절의 영광 공 던지는 게 멋있어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이효봉씨의 아마시절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중학시절 전국에서 이상군(충주중) 김태업(전남중)과 함께 빅3를 이뤘고 고교시절에도 최고의 투타실력을 뽐내면서 대전고를 전국 4강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고교 1년을 휴학한 것에 발목이 잡히면서 고려대에 진학한 후에는 선동렬 박노준의 그늘에 가려 출전 기회를 자연스레 잃었다. 이효봉씨는 “중고교 때는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올라왔을 때는 나보다 잘하는 선수가 있었고 그만큼 출전 기회도 줄어들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1막2장―짧은 프로생활의 좌절 이효봉씨가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상무를 거쳐 빙그레에 입단했을 때는 89년 7월 31일. 하지만 출전 규정에 묶이면서 반년을 꼬박 쉬었고 이듬해(90년)에도 일본 전훈 때 오른무릎을 다쳐 또다시 반년을 재활로 보냈다. 후반기 동안 이효봉씨가 남긴 성적은 7경기 출전 10⅔이닝 승패 없이 방어율 4.22. 이것은 그대로 이씨의 최종 프로성적이 됐다. 이씨는 “투수는 자기 공을 제일 잘 안다. 괜찮게 던졌다 싶은 공인데도 선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더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이순철 LG 감독(전 해태)에게 맞은 홈런은 큰 충격이었다고. 결국 이효봉씨는 스물여덟이던 90년 10월 노진호 당시 빙그레 단장에게 찾아가 직접 유니폼을 반납했다. 구단은 만류했지만 그 길이 옳은 것으로 보였다. 야구잡지인 ‘주간야구’의 김창웅 주간으로부터 “기자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은 것은 그즈음이었다. ▲2막―야구선수 출신 기자 2호 이효봉씨는 지난 91년 ‘주간야구’에 특채로 입사했다. 그때부터 글쓰기 전쟁이 시작됐다. 기사 한 꼭지를 쓰는 데 하루가 넘게 걸렸다. 원고지에 글을 써본 게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사를 쓰다가 1주일에 3∼4일은 회사에서 잠을 청했고 밥먹듯이 밤을 샜다. 수습 3개월째 맡은 두 페이지짜리 태평양 최창호의 투구폼 분석 기사를 쓰는 데는 꼬박 1주일이 걸렸다. 이효봉씨는 “선배들이 기사를 쓰고 데스크에 가져가면 다시 써오라는 지청구를 맞기 일쑤였는데 나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1주일 내내 집에 안 들어가고 기사만 쓸까봐서 데스크가 봐준 것(?)이었다”며 웃었다. 당시 기자직에 대한 이씨의 집념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효봉씨는 94년 모회사라고 할 수 있는 청보가 흔들리면서 주간야구가 폐간되자 94년 7월 한국스포츠 TV로 직장을 옮겼다. ▲3막―방송 해설가로의 변신과 투쟁 97년 말 터진 IMF는 이효봉씨의 인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서 사원수가 150명에서 40명으로 현저히 줄어 1인 2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효봉씨가 99년 해설가로 탈바꿈한 것도 자금 사정상 해설위원을 둘 수 없어 당시 프로듀서가 이씨에게 해설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해설위원 데뷔 첫해 파트너는 김성주 현 MBC 아나운서였다. 이효봉씨는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아 해설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의 말에 귀를 많이 기울였다. 같은 프로야구 선수출신이어서 그런지 많은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이씨는 2002년 중반부터 2003년까지는 여의도 SBS 본사 밖에서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SBS가 스포츠TV를 인수하면서 살벌한 구조조정을 했고 이 와중에 피해자가 생겨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씨는 280여일 동안 파업농성을 벌이면서 여의도공원 앞에서 노숙도 했다. 또한 이 일로 애착을 갖고 열심히 했던 해설 일도 접어야 했다. ▲4막―스카우트,또 다른 도전 2004년 2월4일. 이효봉씨는 경남 남해 야구캠프에 있었다. 선수도,기자도,해설가도 아닌,제4의 인생 구단 프런트 직원으로서 그라운드에 컴백한 것이다. 이효봉씨는 “아무래도 기자나 해설가를 하면서 프로에 눈을 맞췄는데 아마선수들을 봐야하니까 우선 눈높이를 낮춰야 할 것 같다. 선수들 이름 외우는 데만 1년 넘게 걸리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선수들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모습이 제법 스카우트 티가 났다. 이효봉씨는 인터뷰 말미에 “해설을 놓는 게 제일 어려운 결정이었다. 정말 이것저것 다 해보는 팔자인가 싶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프로야구 선수에서 기자로,그리고 해설가에서 스카우트로…그의 4번째 야구인생 도전은 또다시 막이 올랐다. /남해=김양희 whizzer4@sport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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