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수의대 황우석 박사(下) '슈퍼한우'이어 호랑이 복제에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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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홈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3,635회 작성일 2001-10-20 10:30본문
서울대 수의대 황우석 박사(下)
'슈퍼한우'이어 호랑이 복제에 도전
‘소 박사’로 유명한 황우석교수가 소 연구에 몰두하게 된 것은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른다.
“소 하고는 어렸을 적부터 인연이 깊습니다. 아버님이 제가 5살 때 세상을 떠나셨는데, 어미니 혼자 한우 소작을 하며 우리 6형제를 길렀습니다.”
한우 소작이란 남의 소를 길러주고 이 소가 새끼를 낳으면 어미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송아지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충남 부여의 한 벽촌의 농가에서 자란 황 교수는 어린 시절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소 꼴을 먹이는 게 주요 일과였다.
그가 소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황 교수의 모친은 대전으로 유학을 간 아들이 모처럼 귀향하는 날이면 동네 어귀까지 달려오곤 했다.
그는 논둑의 꼴을 먹이면서 거머리에게 물려 벌겋게 부어오른 모친의 종아리를 보며 다짐을 했다. “고생하는 어머니께 자식된 도리를 해보자, 우리 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돼서 소를 연구하자.”
'자식된 도리'위해 수의학과 지원
명문고인 대전고의 우등생이었던 그가 주위 사람들이 강력하게 권유하고, 많은 이과학생들이 선망하던 서울대 의과대학을 ‘외면’하고 농대 수의학과를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입학원서에 제1지망부터 2, 3지망까지 내리 수의학과를 써넣었다.
대학 진학 후 가축의 생산성, 즉 번식에 골몰했다. 사람으로 치자면 산부인과분야에 몰두한 것이다. 대학 2학년부터 소의 항문에 손을 넣어 건강을 진단하는 직장(直腸) 검사를 수도 없이 해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말을 못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손으로 진단하는 촉진(觸診)은 필수적인 진단방식이다. 하루에 100번 꼴, 많으면 400두를 검사했다. 그가 했던 직장검사 횟수는 줄잡아 50만번에 달한다.
이렇게 다져진 현장경험과 감각은 이후 황 교수가 전개한 세계 최첨단의 생명공학 연구에 큰 힘이 됐다. 그는 복제생명체를 제대로 안착시킬 수 있는 건강한 소인지, 착상시기가 괜찮은 것인지 등 과학의 힘만으로는 감별하기 힘든 미묘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황 교수가 다른 나라의 연구진보다 유산 등 시행착오를 덜 겪으면서 연구를 진척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런 경험과 감각 때문이었다.
그가 최첨단의 복제분야에관심을 쏟게 된 데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파벌문제로 국내에 자리를 바로 잡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게 된 것이 전화위복이었다.
“학내에서 엉뚱한 파벌문제가 불거져 뜻하지 않게 낭인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으려고도 했지요. 그때 정창국 수의대학장이 선진국의 가장 앞서가는 연구팀에서 미래를 대비하라며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 가도록 다리를 놓아주셨습니다.
가나가와 히로시라는 세계적인 석학 밑에서 인공임신을 공부했습니다. 그 좌절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복제소를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1986년 서울대교수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돌아온 그는 몸집이 크고 우유도 많이 생산하는 복제소를 만들어 축산농민을 돕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우리나라는 우루과이라운드(UR. 현재 세계무역기구의 모체가 된 회의)에서 농업개방이 결정될 경우 외국 소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한우를 기르는 우리축산 농가가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우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UR 이후 대비책으로 가축의 유전능력개량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SF소설에나 나올 법한, 아득한 미래의 이야기 같던 그의 ‘슈퍼한우’ 계획은 빠른 속도로 하나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88년 쌍둥이 송아지 탄생에 이어 93년 시험관 송아지, 95년 수정난을 이용한 생식세포 복제기술로 젖소와 한우를 복제했다.
복제 연구는 하나의 연구 성과를 올리기까지 수천 수만번의 실패를 거듭해야 하는, 그래서 엄청난 인내심과 끈기를 요구하는 고난의 대장정과도 같다. 이 때문인지 그는 연구에 몰두하던 87년 ‘죽을 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기도 했으나 몇 차례의 대수술 끝에 소생했다.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그는 복제기술의 마지막 단계로 불리는 체세포 복제를 놓고 세계적인 몇몇 연구소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였다.
선두는 어미양의 유방에서 떼낸 체세포로그 유명한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영국 연구진에게 돌아갔지만 그도 세계에서 4번째로 99년2월 복제 송아지 영롱이를 탄생시키는데 성공했다. 여덟 살 난 암소의 자궁세포를 복제해 9개월만에 대리모를 통해 출산에 성공한 것이다.
연구비 타령 못마땅, 중요한 것 아이디어
그는 지금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백두산 호랑이 복제 실험이다. 호랑이의 정자와 호랑이가 아닌 다른 종류의 동물 A의 난자를 융합한 뒤 호랑이도, 동물 A도 아닌 동물 B를 대리모로 삼아 착상시켜 출산시키는 삼원 이종복제를 추진중이다.
그가 이끌고 있는 연구실의 ‘타이거 팀’은 오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3시까지 하루 21시간 가동하고 있다.
“백두산 호랑이 정자는 북한에서 구했고, 다른 동물의 이름은 밝히기 어렵습니다. 왜 이런 어려운 연구를 하느냐구요. ‘타이거 프로젝트’는 누가 시켜서, 또는 지원을 해준다고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100% 자발적인 연구입니다. 정부가 지원을 제의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고, 또 성공한다면 학문적 희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호랑이는 민족혼이 담긴, 한민족의 영물이 아닙니까. 조만간 성과를 내놓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장담할 수 없고, 앞으로 수만 번 실험을 더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해야 할 일을 실패가 두렵고, 투입되는 노력이 아깝다고 하지 않는다면 과학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투지 때문인지 많은 연구자들이 하고 있는 ‘연구비 타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연구비가 부족해, 선진국처럼 연구시설 등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않아 연구를 제대로 못하겠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국가의 실정과 여건에 맞게 사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연구여건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저는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와 능력, 성실근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은 다음이지요.”
이와 함께 그는“이제 우리도 모든 분야에서 다 잘하겠다는는 생각보다는 경쟁력이 있는 특정 분야에서 스타플레이어를 키워내는 쪽으로 선회해야 한다”며 정부의 과학지원도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교수처럼 생명을‘주무르다’ 보면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사라지고 마치 자신이 조물주가 된듯한 환상에 빠질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한 소에서 채취한 세포로 탄생시킨 복제소라도 몸집은 비슷하지만 성격이 다르다”며 “생명에 대한 연구를 할수록 신의 존재를 더욱 믿게 되고, 생명의 신비에 더욱 놀라게 된다”고 말했다.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 kckim@hk.co.kr
'슈퍼한우'이어 호랑이 복제에 도전
‘소 박사’로 유명한 황우석교수가 소 연구에 몰두하게 된 것은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른다.
“소 하고는 어렸을 적부터 인연이 깊습니다. 아버님이 제가 5살 때 세상을 떠나셨는데, 어미니 혼자 한우 소작을 하며 우리 6형제를 길렀습니다.”
한우 소작이란 남의 소를 길러주고 이 소가 새끼를 낳으면 어미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송아지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충남 부여의 한 벽촌의 농가에서 자란 황 교수는 어린 시절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소 꼴을 먹이는 게 주요 일과였다.
그가 소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황 교수의 모친은 대전으로 유학을 간 아들이 모처럼 귀향하는 날이면 동네 어귀까지 달려오곤 했다.
그는 논둑의 꼴을 먹이면서 거머리에게 물려 벌겋게 부어오른 모친의 종아리를 보며 다짐을 했다. “고생하는 어머니께 자식된 도리를 해보자, 우리 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돼서 소를 연구하자.”
'자식된 도리'위해 수의학과 지원
명문고인 대전고의 우등생이었던 그가 주위 사람들이 강력하게 권유하고, 많은 이과학생들이 선망하던 서울대 의과대학을 ‘외면’하고 농대 수의학과를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입학원서에 제1지망부터 2, 3지망까지 내리 수의학과를 써넣었다.
대학 진학 후 가축의 생산성, 즉 번식에 골몰했다. 사람으로 치자면 산부인과분야에 몰두한 것이다. 대학 2학년부터 소의 항문에 손을 넣어 건강을 진단하는 직장(直腸) 검사를 수도 없이 해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말을 못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손으로 진단하는 촉진(觸診)은 필수적인 진단방식이다. 하루에 100번 꼴, 많으면 400두를 검사했다. 그가 했던 직장검사 횟수는 줄잡아 50만번에 달한다.
이렇게 다져진 현장경험과 감각은 이후 황 교수가 전개한 세계 최첨단의 생명공학 연구에 큰 힘이 됐다. 그는 복제생명체를 제대로 안착시킬 수 있는 건강한 소인지, 착상시기가 괜찮은 것인지 등 과학의 힘만으로는 감별하기 힘든 미묘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황 교수가 다른 나라의 연구진보다 유산 등 시행착오를 덜 겪으면서 연구를 진척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런 경험과 감각 때문이었다.
그가 최첨단의 복제분야에관심을 쏟게 된 데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파벌문제로 국내에 자리를 바로 잡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게 된 것이 전화위복이었다.
“학내에서 엉뚱한 파벌문제가 불거져 뜻하지 않게 낭인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으려고도 했지요. 그때 정창국 수의대학장이 선진국의 가장 앞서가는 연구팀에서 미래를 대비하라며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 가도록 다리를 놓아주셨습니다.
가나가와 히로시라는 세계적인 석학 밑에서 인공임신을 공부했습니다. 그 좌절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복제소를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1986년 서울대교수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돌아온 그는 몸집이 크고 우유도 많이 생산하는 복제소를 만들어 축산농민을 돕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우리나라는 우루과이라운드(UR. 현재 세계무역기구의 모체가 된 회의)에서 농업개방이 결정될 경우 외국 소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한우를 기르는 우리축산 농가가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우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UR 이후 대비책으로 가축의 유전능력개량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SF소설에나 나올 법한, 아득한 미래의 이야기 같던 그의 ‘슈퍼한우’ 계획은 빠른 속도로 하나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88년 쌍둥이 송아지 탄생에 이어 93년 시험관 송아지, 95년 수정난을 이용한 생식세포 복제기술로 젖소와 한우를 복제했다.
복제 연구는 하나의 연구 성과를 올리기까지 수천 수만번의 실패를 거듭해야 하는, 그래서 엄청난 인내심과 끈기를 요구하는 고난의 대장정과도 같다. 이 때문인지 그는 연구에 몰두하던 87년 ‘죽을 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기도 했으나 몇 차례의 대수술 끝에 소생했다.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그는 복제기술의 마지막 단계로 불리는 체세포 복제를 놓고 세계적인 몇몇 연구소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였다.
선두는 어미양의 유방에서 떼낸 체세포로그 유명한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영국 연구진에게 돌아갔지만 그도 세계에서 4번째로 99년2월 복제 송아지 영롱이를 탄생시키는데 성공했다. 여덟 살 난 암소의 자궁세포를 복제해 9개월만에 대리모를 통해 출산에 성공한 것이다.
연구비 타령 못마땅, 중요한 것 아이디어
그는 지금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백두산 호랑이 복제 실험이다. 호랑이의 정자와 호랑이가 아닌 다른 종류의 동물 A의 난자를 융합한 뒤 호랑이도, 동물 A도 아닌 동물 B를 대리모로 삼아 착상시켜 출산시키는 삼원 이종복제를 추진중이다.
그가 이끌고 있는 연구실의 ‘타이거 팀’은 오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3시까지 하루 21시간 가동하고 있다.
“백두산 호랑이 정자는 북한에서 구했고, 다른 동물의 이름은 밝히기 어렵습니다. 왜 이런 어려운 연구를 하느냐구요. ‘타이거 프로젝트’는 누가 시켜서, 또는 지원을 해준다고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100% 자발적인 연구입니다. 정부가 지원을 제의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고, 또 성공한다면 학문적 희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호랑이는 민족혼이 담긴, 한민족의 영물이 아닙니까. 조만간 성과를 내놓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장담할 수 없고, 앞으로 수만 번 실험을 더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해야 할 일을 실패가 두렵고, 투입되는 노력이 아깝다고 하지 않는다면 과학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투지 때문인지 많은 연구자들이 하고 있는 ‘연구비 타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연구비가 부족해, 선진국처럼 연구시설 등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않아 연구를 제대로 못하겠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국가의 실정과 여건에 맞게 사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연구여건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저는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와 능력, 성실근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은 다음이지요.”
이와 함께 그는“이제 우리도 모든 분야에서 다 잘하겠다는는 생각보다는 경쟁력이 있는 특정 분야에서 스타플레이어를 키워내는 쪽으로 선회해야 한다”며 정부의 과학지원도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교수처럼 생명을‘주무르다’ 보면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사라지고 마치 자신이 조물주가 된듯한 환상에 빠질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한 소에서 채취한 세포로 탄생시킨 복제소라도 몸집은 비슷하지만 성격이 다르다”며 “생명에 대한 연구를 할수록 신의 존재를 더욱 믿게 되고, 생명의 신비에 더욱 놀라게 된다”고 말했다.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 k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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